AM 7:42
11화
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엄마!”
오래간만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채경은 가방을 내던졌다.
“엄마, 어딨어!”
“채경이 왔니?”
아빠다. 착하기만 한 우리 아빠. 딸 시집 가는 거 말고는 걱정 하나도 없는 우리 아빠다.
“아빠, 엄마는?”
“엄마? 아직 안 들어오셨는데?”
“어디 가셨는데요?”
“모르겠다.”
“하아.”
채경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채경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아빠가 황급히 채경을 부축한다.
“일?”
채경이 허망한 듯 웃음을 짓는다.
“우리 엄마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 처음 알았어.”
“뭐?”
“우리 엄마 되게 무서운 사람이더라.”
“그게 무슨 말이냐?”
아빠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게 있어.”
“무슨 말이냐니까!”
평소의 아빠답지 않았다.
“알았어. 말 하면 되잖아.”
채경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두 설명했다.
“하.”
아빠는 고개를 숙였다.
“모두 이 아빠 때문이구나.”
“아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니야. 이 아빠가 무능력해서 그래.”
“아빠,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내가 미안해 지잖아.”
“네 엄마는 아빠랑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너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거다.”
“아빠, 절대로 아닐 거야. 엄마도 분명히 행복할 거라고,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응?”
채경은 자신의 소중한 아빠를 꼭 안았다.
“그래도 아빠한테 말하니까 마음이 편하다.
”아빠가 어떻게 해서든 우리 채경이 도와줄게.“
”아빠가 무슨.“
채경이 쑥스러운 듯 웃는다.
“이건 나와 엄마의 일이에요.”
“네 엄마는 내 부인이고, 너는 내 딸이다.”
“아빠.”
“나는 두 사람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빠가 채경의 어깨를 감싸 쥔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갈등을 빚는 다면, 이 아빠는 언제나 딸의 편이 되어 줄 거다.”
“고마워요.”
“고맙긴.”
“아주 눈물 겹군요.”
“!”
정수가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아주 아름다운 장면인데, 이상하게도 보기 안 좋군요.”
“당신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야?”
“궁금해요?”
정수는 낮게 웃었다.
“그런 거 알아서 뭐하시게요?”
“뭐?”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분은 그냥 잠자코 계시면 됩니다. 모든 게 다 채경이를 위한 일이라고요.”
“엄마!”
“너는 조용히 있어!”
정수가 매서운 눈으로 채경을 쏘아본다.
“애한테 이상한 소리 지껄이지 말아요. 괜히 애한테 헛바람 들지 않도록 말이에요.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당신 정말 많이 변했어.”
“그렇죠?”
정수가 자리에 앉더니 위스키를 따랐다.
“한 잔 마실래요?”
아빠가 대답을 하지 않자 정수는 낮게 웃더니 혼자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다.
“이상하게 당신은 하나도 안 변했어요. 유주현 씨.”
“흠.”
“그런데 어쩌죠?”
주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 박정수는 너무나도 많이 변해버렸어요. 당신 그 되먹지도 않은 시아버님하고 시동생 이제는 꼴도 보기 싫어요.”
“여보.”
“그런 소리도 집어 치워요!”
정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당신이라는 사람 때문에 나의 젊은 시절을 모두 다 버려야만 했어요. 이제 더 이상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버려?”
정수의 말에 주현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지금 버렸다고 말했어?”
“네.”
“어, 어떻게.”
“어떻게?”
정수가 잔을 내려놓았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요?”
“뭐?”
“채경이 어릴 적에 한 번이라도 밥 챙겨준 적이라도 있어요?”
“그거야. 당신이.”
“웃기지 말아요!”
정수가 악을 쓴다.
“나도 내 삶이 있었어요.”
“여보.”
“당신 때문에 나는 모든 걸 포기했었어요. 잘 나가는 재벌 2세 공주님이, 잘 나가나는 일류 피아니스트가! 어떤 구질구질한 인생을 만나서, 개고생을 했다고요. 그리고 이제 겨우 아등바등해서 예전의 지위를 획득했어요. 그런 인생을 가진 여자가, 자신의 딸마저 그 모양으로 살게 둘 거 같아요? 착각하지 말아요. 사랑으로 결혼한다고요? 그런 거 지나가는 개나 주라고 하세요. 사랑으로 평생 살 수 없어요. 사랑으로 못 살면 정으로 산다고요? 그 것도 지나가는 개나 주라고 해요! 정, 사랑? 그런 거 다 아무 소용 없어요. 세상은 돈이 지배하고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요.”
“세월이 정말 당신을 많이 변하게 했군, 예전에는 이런 사람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착하고 순수하고,”
“그랬었죠.”
정수가 코웃음을 친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이제는 세상을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건지 알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내 딸은 이런 일 겪게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채경이 막을 거예요.”
“엄마.”
채경이 겨우 목소리를 낸다.
“엄마가 어떻게 알아?”
“뭐?”
“내가 어떻게 살지, 엄마가 어떻게 아냐고?”
“채경아.”
“엄마랑 나랑 같아?”
“그럼 다르니?”
“응, 달라.”
채경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나는 그 사람 직업 충분히 존경하면서 살 수 있어.”
“지금은 좋아하니까 그런 거야!”
“아니!”
채경이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런 게 아니야. 그렇게 하면 나는 그 사람보다 못 해. 엄마가 돈 대줘서 겨우 대학교 들어갔지? 그리고 엄마가 연줄 대줘서 어떻게 겨우 회사에 취직한 거 아니야? 나는 그런 애라고. 내 힘으로 스스로 해 낸 게 하나도 없단 말이야. 이제 겨우 사랑 그거 하나 내 힘으로 해 낸 거야. 엄마가 조금은 나를 이해해주고, 나를 위해서 양보해주면 안 되는 거야? 응? 엄마 부탁이야.”
“그러니까! 네 말대로 너를 생각해서 이러는 거라고!”
정수는 두 사람에게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자 답답한 모양이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해.”
“여보.”
“엄마.”
“됐어. 더 이상 나도 못 들어주겠어.”
정수는 가방을 다시 집어 들었다.
“두 사람은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 해.”
“엄마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아니, 너무나도 많이 이해해서 이러는 거야!”
“엄마.”
“나 나갈게.”
정수가 집을 빠져나간다.
“하아.”
채경은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괜찮니?”
“응.”
엄마를 설득할 방법이 없을까?
“하아.”
정수는 머리가 지끈 거린다.
“어디로 모실 까요?”
“남산에 있는 별장 있지?”
“네.”
“그리로 가지.”
“알겠습니다.”
창 밖을 멍하니 보며 정수는 생각에 잠겼다. 정말 채경의 말이 모두 맞는 것일까? 모든 게 자신의 부질없는 욕심인 걸까?
“하아.”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정수가 생각하기에 정수가 하는 일이 옳다. 이것만이 민정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 정수가 옳은 것이다. 두 사람이 어설픈 객기를 보내는 것이다.
“오빠, 배고파.”
“어?”
“배고프다고.”
“그래? 뭐 먹을래?”
“오빠가 만들어준 김밥.”
“김밥?”
진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냉장고를 열었다. 계란 두 개와, 김치, 당근, 그리고 조려놓은 우엉 뿐이다.
“내가 나중에 해줄 게.”
“지금 먹고 싶어.”
“지금?”
진호가 한숨을 쉰다.
“하지만 재료가 없는 걸?”
“그냥 있는 걸로라도. 응?”
“알았어.”
진호가 팔을 걷었다.
“조금만 기다려.”
“응.”
“하아.”
채경은 벌써 몇 번이나 진호의 번호를 썼다가 지웠다 하는 중이다. 용기가 없다. 전화를 걸고 싶은데, 걸 용기가.
“휴우.”
진희는 괜찮은 걸까? 정말 자신이 헤어지기만 한다면 그 사람들은 모두 무사한 것일까? 채경은 자신 때문에 그들이 너무나도 큰 상처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두렵고, 미안하기만 하다.
“사랑이 죄구나.”
누군가에게 사랑이 힘이겠지만, 자신에게는 사랑이 죄였다.
“하아.”
정수를 만나서 설득이라도 하고 싶지만, 정수는 싸운 후 집에 들어오지 않고, 주현 역시 정수를 찾으러 나간다면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채경은 홀로 방 안에서 자신의 무릎을 껴안고 고민에 잠겨 있다.
“해결 방법이 뭐지?”
이럴 때, 채경에게도 윤우와 은호의 관계처럼 돈독한 친구가 한 명쯤은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휴우.”
정수는 별장에 도착해서 편안하게 침대에 누웠다. 너무 많은 것을 생각했다. 잠시만 쉬어야 할 것 같다.
“사모님. 도와드릴 것이 있겠습니까?”
“아니,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네.”
기사마저 나가고, 정수는 조용히 사색에 잠긴다.
“하아.”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모른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주현이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정수는 보이지 않는다.
“휴.”
주현은 다시 전화를 걸어보지만 여전히 전화기가 꺼져있다.
“젠장.”
한 때는 아름다운 연인이었는데, 왜 이모양이 되었는 지 모르겠다. 답답하다. 미치겠다. 이런 걸 원한 건 아니다. 자신 때문에, 그 순수하고 맑던 정수가 변해버린 듯 하여서 너무나도 미안하다.
“여보.”
제대로 딱 십 분 만이라도 이야기 나누고 싶다.
“맛있다.”
“그래? 다행이다.”
진희가 열심히 김밥을 먹는다.
“음료수도 같이 마시고.”
진호가 따른 쿨피스를 단숨에 들이키는 진희다.
“배 많이 고팠구나?”
“오빠, 미안해.”
“어?”
“미안.”
진희가 겨우 김밥을 다 삼킨다.
“나 때문에, 그 언니랑 싸웠지?”
“무슨 말이야?”
“다 알아.”
진희가 가만히 고개를 숙인다.
“나 데리고 간 사람들, 그 언니 가족이 보냈다며.”
“진희야.”
“오빠라면 분명 그래서 그 언니한테 한 소리 했을 거야.”
“아니야.”
“아니, 내가 오빠를 모르니? 분명히 헤어지자고까지 말을 했을 게 분명해. 하지만 오빠, 헤어지지 마라.”
“진희야.”
“그러면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언제나 내가 오빠의 짐인 것 같아서, 내 기분도 좋지가 않아.”
“네가 왜 미안해.”
“내가 바보처럼.”
진희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빨리 도망이라도 치지.”
“진희야.”
“그러니까 오빠, 그 언니랑 꼭 행복해야 해.”
“하지만.”
“괜찮아. 아까 잡혀가서 보니까, 조금 무섭기는 한데, 이제는 괜찮을 지도 모르겠어. 응? 그리고 이렇게 오빠가 다시 구해줄 게 분명하잖아. 그러니까 그 언니랑 계속 서로 좋아하는 사이로 남아라.”
“그럴 수는 없어.”
진호는 단호하다.
“네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데, 내 고집 부릴 수는 없잖아.”
“오빠.”
“싫어.”
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먹고 물에 담가놔라. 오빠 다시 일하러 갈게.”
“오빠! 오빠!”
진호는 집을 나가버렸다.
“하아.”
진희는 멍하니 김밥을 바라본다.
“이 바보, 그런 곰 같은 아저씨 둘에게 붙잡혀 가지고는.”
여태까지 자신은 항상 오빠의 짐이였다. 이렇게 짐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도 견딜 수가 없다.
“하아.”
방법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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