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12년의 시간
“그래서 스파이는 잘 하고 있습니까?”
“네? 스파이요?”
우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을 바라보자 정식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지금 그 표정 뭡니까?”
“그러니까. 그게.”
“설마 내가 부탁한 일을 하지 않은 겁니까?”
우리는 입을 막고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정식은 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우리에게 물을 건넸다.
“왜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
“왜, 왜 이러세요?”
“뭐가 말입니까?”
“왜 저, 저한테 잘 해주세요?”
“잘 해주면 안 되는 겁니까?”
“그, 그게 아니라.”
“물부터 좀 마셔요.”
우리는 생수 한 병을 다 비웠다. 그리고 숨을 내뱉은 후 정식의 눈을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팀장님이 저한테 이러시는 게 이상해서 그래요. 팀장님 이런 캐릭터 아니시잖아요.”
“그럼 내가 어떤 캐릭터입니까?”
“그게.”
정식이 자신에게로 몸을 기울이자 우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식은 우리의 옷에 실밥을 떼어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지금 내가 혹시 서우리 씨에게 실수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 그러니까.”
“전에도 말을 한 것 같은데, 내가 사람을 잘 사귀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냥 나 혼자 잘났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서우리 씨랑 시간을 보내면서 서우리 씨가 나에게 사람들하고 지내는 법을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그 동안 그 누구도 서우리 씨처럼 솔직하게 나에게 말해줄 생각을 하지 못했거든요. 혼자서 밥 먹으면 안 된다고 말이죠.”
“그건 실수로. 죄송합니다.”
“사과 들으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정식은 빈 상자를 정리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그런 정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 소문 같은 거 돕니까?”
“아니요.”
“혹시 남자를 좋아한다거나.”
“네? 그러니까. 그게.”
“맞네.”
정식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뭔가 낚인 기분이 든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그건 팀장님의 개인적인 부분인데.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지 않아서요.”
“잠깐만요.”
“네? 뭐가요?”
“설마. 서우리 씨.”
정식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지금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 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저는 그런 거에 대해서 뭐 차별 같은 거. 하나도 없어요. 이상하다거나. 거부감 같은 거 없어요. 괜찮아요.”
우리는 손사래를 치며 겨우 밝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우리의 손짓을 본 정식은 잠시 머뭇거리다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네? 아니시라고요?”
“그냥 일에 너무 빠져 있어서 여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남자를 좋아한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다들 하고 있는 겁니까?”
“다들은 아니고.”
“그럼 서우리 씨만 하는 겁니까?”
“아니요.”
우리의 반응이 재미있었던지 정식은 계속해서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저한테 왜 이렇게 잘 해주세요?”
“제가 서우리 씨에게 잘 못한 것도 있습니까?”
“그러니까.”
“평소에 업무 시간이 아니니까요. 업무라면 다르겠지만. 우리가 지금 일을 하는 중도 아니고. 굳이 서우리 씨에게 그렇게 행동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설마 내가 서우리 씨에게 화를 내기 바라는 건 아니죠?”
“아니요.”
우리는 있는 힘을 다 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정식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깨끗이 손을 닦은 후 우리에게도 물티슈를 건넸다. 우리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래서 애인하고는 시간을 잘 보내고 있습니까?”
“네? 그건 어떻게?”
“그 날의 기억이 다 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서우리 씨가 온갖 이야기를 다 해줬습니다. 대단해요. 12년이나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게. 나는 상상도 못할 거 같아요.”
“그런 말도 했어요?”
“네. 그런 말도 했습니다.”
미쳤어. 서우리. 도대체 조 팀장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너는 진짜 술 끊자. 술 끊어.
“부럽습니다.”
“뭐가요?”
“그래도 누군가와 싸우고 사랑하고 그러는 거 말이죠.”
“팀장님도 연애하시면 되잖아요.”
“아니요.”
정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그런 거랑은 멀리 있습니다. 저 이제 나이가 서른일곱입니다. 이 나이에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하고 관계를 맺는다는 거. 그거 되게 어려운 일이거든요. 혹시나 서우리 씨처럼 재미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모를까? 그런 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시작할 용기는 나지 않습니다.”
“아. 네.”
도대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같은 여자라니?
“일어나시죠.”
정식은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기분 좀 풀렸죠?”
“기분이요?”
“아까 애인하고 싸우고 거기에 혼자 있었던 거 아닙니까? 애인이 올까봐 어딘가를 한 번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잖아요. 이제 시간이 흘렀으니까 일어나요. 처음에는 별 거 아닌 걸로 싸우다가 그렇게 대화를 안 하고. 그러면 점점 멀어집니다. 물론 12년이나 사귀는 사이라면 그런 것까지 다 아는 사이가 되겠지만 말이죠. 데려다 줄게요.”
“아니요. 제가 갈 수 있어요.”
우리는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회사였다. 아까는 제대로 생각을 하지 못해서 여기까지 따라왔지만, 회사에 출근해 있는 다른 부서 사람도 있을 거였다. 괜한 소문은 싫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래요? 그럼 멀리 안 갑니다. 점심은 잘 먹었어요.”
“네. 일 보세요.”
우리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을 나섰다. 정식이 자리를 치우는 것을 보고 후다닥 옆으로 비켜나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한참이나 참은 숨을 내쉬었다.
“미쳤어. 서우리. 거기에서 도대체 뭐 하는 거야? 그리고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그런 이야기까지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치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미친 거야.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다고.”
머리를 쥐어뜯는데 문이 열리고 타려던 사람이 멍하니 그런 우리를 바라봤다. 우리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그 사람은 타지 않고 엘리베이터 문은 다시 닫힌 채로 1층으로 향했다.
“아. 서우리 쪽팔려.”
우리는 몸을 배배 꼬며 울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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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척도 안 할 거야?”
“왔어?”
게임을 하던 재필은 뒤도 보지 않은 채로 답했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그런 재필을 노려본 후 서재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손목으로 눈을 가린 채 한숨을 토해냈다.
“답답해.”
12년이나 사귀었는데도 여전히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해소가 될 거라고 생각을 했던 문제들은 시간이 지나도 짐으로 남았다. 점점 더 지나 일들로 싸우는 일이 많아졌고 그 일들은 현재의 그들을 힘들게 만드는 중이었다.
“밥은 먹었어?”
“응.”
재필은 그제야 걱정스러운지 방으로 들어왔다.
“괜찮아?”
“응.”
“화났어?”
“응.”
재필은 우리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우리에게 팔베개를 해줬다. 그를 밀어내고 싶었지만 이런 화해의 분위기를 깨뜨린다면 두 사람의 냉전은 더 오래 갈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당신 기분을 내가 몰랐어. 우리 여보가 내가 같이 가면 초라하게 생각을 할까 그랬던 거야. 혼자 보내려던 게 아니었어. 형한테 옷이라도 빌려서 갈게. 선재 형이 돈도 준다고 하더라.”
“됐어.”
이런 말을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재필이가 못 나서 그런 게 아니었다. 자신의 기대치가 높은 거였다. 자신이 아무 문제없이 회사를 다니는 것처럼 재필도 그럴 거였다.
“거기 어차피 다 내 친구들이잖아. 너 가면 불편할 거야. 다들 결혼 이야기 묻고. 직업 이야기 할 텐데.”
“춤춘다고 하지 뭐.”
“뭐래?”
“나 대학생 때 춤 좀 췄잖아. 보여줘?”
“됐어.”
우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재필은 그런 우리의 반응에 기분이 나빴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하는 거야?”
“보여줄게.”
“뭘?”
“춤추는 거.”
“미쳤어.”
우리는 아랫입술을 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재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휴대전화로 아이돌 음악을 켰다.
“진짜 하려고?”
“응. 너를 위해서. 내가 사랑하는 우리 여보를 위해서.”
“뭐래?”
재필은 예전 그녀가 사랑하던 그 소년으로 돌아갔다. 아이돌의 춤을 추면서 해맑게 웃는 그를 보는 것이 기뻤다. 우리도 그 시절의 소녀로 돌아가서 박수를 치며 그런 재필을 바라봤다. 열심히 춤을 추고 땀을 흘리는 그 모습. 너무 멋지고 설렜다.
“어때? 나 잘 추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재필을 보며 우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수건을 들어 그의 땀을 닦았다.
“우리 이제 늙었다. 그런 거 못 해.”
“그러게. 아. 힘들어.”
재필은 침대에 누웠다. 우리는 재필의 가슴에 머리를 둔 채로 그의 곁에 누웠다. 심장 소리. 떨림. 그 모든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좋다.”
“사랑해.”
“나도. 나도 사랑해.”
그냥 이 행복이 계속 되었으면 했다. 이걸로 충분했다. 두 사람에게 12년이란 그냥 시간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의 공유였으니까. 이 모든 시간은 서로에게 의미가 있었고 쉽게 사라질 시간이 아니었다.
“너 자꾸 그러지 마라.”
“뭐가?”
“네가 나 서운하게 하면 나 정말로 아프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 너 하나인데. 너 자꾸 그러면 나 힘들어.”
“미안해.”
우리의 투정에 재필은 우리의 허리를 갑자기 안았다. 우리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지만 재필의 표정은 진지했다.
“너 왜 그래?”
“나도 알고 있어. 내가 되게 초라하다는 거. 그래서 너에게 별로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나는 알 수 있어. 그 정도 눈치도 없는 그런 머저리는 아니니까.”
우리는 재필의 팔을 풀고 그의 눈을 바라봤다. 재필의 기가 죽은 표정. 우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임재필. 네가 마음에 안 들면 네가 나를 아무리 붙잡아도 내가 너를 떠날 거야. 너 이렇게 못나게 구는 거 정말로 마음에 안 들거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초라하면 안 되는 거잖아. 안 그래?”
“그런가?”
“그런 거야.”
우리가 힘을 주어 말하자 재필은 살짝 웃었다. 우리는 재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 그리고 언젠가 네가 바라는 그 모든 거 너는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내가 너를 믿는다고. 내가 너를 믿는데 도대체 왜 너는 너를 못 믿는 거야? 그러니까 스스로도 믿어. 믿어도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지?”
“정말 괜찮은 거야.”
재필은 그대로 우리를 품에 안았다. 우리는 천천히 재필의 등을 두드려줬다. 그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역시 너밖에 없다.”
“그럼. 너 나 말고 뭐 다른 사람 생각을 했냐?”
“아니.”
재필은 이를 드러내며 씩 웃더니 그대로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우리는 즐겁게 비명을 질렀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넘길 수 있는 게 12년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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