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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송이 - [두번째 이야기]

권정선재 2008. 1. 1. 23:01
 





-두 번째 눈꽃송이-




“다행히 지각은 아니다.”


시계를 보니 10시 59분입니다. 휴, 겨우 숨을 돌리며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에


“정 기자. 국장님 호출”


국장님의 호출이군요.


“왜?”


박 기자가 어깨를 으쓱합니다. 박 기자도 모르겠다는 것을 보니 아마 어제 여운희 씨와 한 인터뷰 때문인가 옵니다. 저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국장실로 들어갔습니다.




“오 정말 인터뷰 잘 했는데. 역시 정 기자야.”


들어가자마자 들리는 찬사. 제 칭찬이 아니어서 그런지 듣기 거북하군요.


“제가 인터뷰한 기사가 아닙니다.”


국장님의 얼굴에 당황함이 스쳐갑니다. 쿡, 그 얼굴이 꼭 거북이 같습니다.


“그거 이 기자가 한 겁니다.


“어떤 이 기자?”


하여간 국장님도 척하면 척이지. 제가 말할 이 기자가 또 누가 있겠습니까?


“제 사진기자인 이민성씨요.”


“이 기자가?”


놀란 국장님의 표정.


“네.” 


“그럼 이 기자 좀 불러 주게.”


“네.” 


저는 조심스럽게 국장실의 문을 닫고 나왔습니다. 또 하나의 후배가 저를 밟고 올라가는 군요. 하지만 뭐 저야 죽을 날까지 받아 놓은 사람이니까요. 후배들이 저를 밟고 올라가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저 말고는 또 누가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 주겠습니까?




“오늘도 지각이구나.”


사나이 이민성 학교 다닐 때 버릇을 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매일 뛰어 올라가니  헬스장은 다닐 필요가 없겠군요.


“14층까지 나는 매일 달린다. 아자!”


주변에 사원들이 이상한 눈으로 봅니다. 또 미친 놈 취급을 받겠네요.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매일 사무실이 있는 14층 까지 뛰어갑니다. 폐쇄 공포증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못 타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예 부를 선택한 것은 그녀. 저만의 그녀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정민아. 정 선배 때문입니다.




때마침 이민성이 출근을 하고 있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무슨 기차화통을 삶아 먹었나요? 목소리가 아주 우렁차군요. 저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말했습니다.


“이민성!” 


저는 언제나 크게 소리 지르기에 사무실 식구들은 별 상관 안합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소리를 지르지 않는 날이면 제게 와서 정성스레 묻습니다.


‘어머. 정민아씨 어디 아파?’


‘우리 오늘 회식이라도 할까?’


‘민아 씨 나에게 돌아온 소개팅 있는데 대신 할래?’


정말 생각 만해도 끔찍합니다.


“네 선배님!”


이런 저 녀석도 저처럼 소리를 지르는 군요. 건방지게


“국장님이 너 좀 오라신다!”


“왜요?”


“인터뷰 너무 잘했다고!”


“제가 했다고 국장님께 말씀 드렸어요?”


그 녀석이 저에게 다가오며 말했습니다.


“그래.” 


“왜 그러셨어요? 그냥 선배가 했다고 하시지.”


어라 이놈이 저를 후배들 공 훔쳐가는 사람으로 보는 가 봅니다.


“내가 그렇게 밖에 안 보이냐?”


“아니요.” 


저 도리도리. 나이 24살이라는 게 왜 저리 어린 애처럼 행동을 할까요? 때론 귀엽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빨리 들어가 봐.”


그 녀석은 국장실로 들어가려다가 말고 뒤를 돌았습니다.


“왜 또?”


“선배 오늘 점심 약속 있어요?”


“아니. 왜?”


“그럼 나랑 점심 먹을래요?”


웬 데이트 신청이죠?


“사절이다.” 


“왜요?” 


“나 남자랑은 밥 안 먹거든.”


“그럼 제가 선배에게 남자인거에요?”


이런 저 녀석의 말에 또 휩쓸려 버렸습니다. 역시 저 녀석 말은 이길 수가 없다니까요. 할 수 없이 저 어린 녀석과 밥을 먹어야 하는 군요.


“네가 사는 거다.”


“당근 100만개죠.”


“그래 기다리마. 수고해라”


“네. 선배님도요.”


결국 저는 마지못해 승낙을 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야 이 기자가 너 좋아 하나 본데?”


“그래서?” 


저의 무심한 말투에 박 기자가 무안한 표정을 짓습니다.


“왜? 쟤 괜찮지 않냐?”


“너무 어리잖아.”


“겨우 4살이야.”


“4살이 적니?”


정말 박 기자의 뇌는 한 번 해부해 봐야겠습니다. 4살이나 어린 녀석을 사귀어 보라고 꼬드기다니.


“나 애 키우기 싫다.”


서류를 정리하면서 무심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 기자가 너보다 훨씬 어른스러운데.”


박 기자가 제 얼굴을 보면서 말합니다.


“얼씨구. 너랑 나랑 절친하지만 자꾸 이러면 나 화낸다.”


“농담 아니야. 너랑 정말 잘 어울려. 네 마지막 사.”


‘쾅’ 


저는 제 인내력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박 기자. 자꾸 사람 짜증나게 하지 마! 싫다고 했잖아. 어리다고 했잖아. 그리고 뭐가 마지막이야? 어!”


저는 박 기자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맞는 말인데 자꾸 눈물이 흐르네요. 정말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그거 때문인데 말이죠.




“이 기사 이 기자가 쓴 거라면서요.”


“예.” 


“정말 훌륭하군요.”


국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지만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사양하겠습니다.” 


국장님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보였습니다.


“어째서요?” 


“그냥 정 선배 주세요.”


“정민아씨를요?” 


“예.” 


무언가 불만이라는 국장님의 눈빛


“설마 정 기자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국장 정말 족집게군요. 아니면 제가 너무 눈에 보이게 행동을 하고 있던가요.


“성공보다 사랑이 중요하다. 알았어. 나가 봐.”


“감사합니다.” 


내가 잘 하는 건가요?




“어? 박 선배. 정 선배 어디 갔어요?”


나가보니 정 선배가 보이지 않습니다.


“밖에.” 


“왜요?” 


“너랑 사귀어 보라고 했다고 욕만 먹었다.”


선배가 한 숨을 쉬면서 말합니다.


“뭐라고 그러는데요?”


“네가 너무 어리데.”


제가 어리다고요?


“선배랑 4살 밖에 차이 안 날 텐데. 선배 나이 숨겼어요?”


“걔가 조금 고리타분한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거 이해 못해.”


“암튼 박 선배 고마워요.”


“뭘. 내가 앞으로도 잘 도와주마.”


선배가 밝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제가 민아 선배만 좋아하지 않는다면, 사랑하고 싶은 미소를 지녔습니다.


“선배 내가 저녁에 술 살게.”


“내가 민아 데리고 가마.”


저는 박 선배에게 웃어 보이고 밖으로 따라 나갔습니다.


“거기 있겠지?”




“이 기자는 정 기자가 아픈 거 몰라?”


“아마도?” 


“말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걱정스런 목소리.


“그래도 정 기자가 숨기고 싶어 하는데 우리가 말하면 기분 나쁘지 않을까?”


저의 절친한 고등학교 동창 이민아. 그녀는 심장병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이지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우리 사무실에 김 선배와 유 기자와 최 기자 그리고 저뿐입니다.


“그래도 말을 해야지 이 기자가 덜 충격 받을 거 아냐?”


“본인들에 일은 본인들에게 맡기자고요.”


“맞아요. 김 선배.”


“최 기자. 너무 잔인해. 사랑하는 내 후배들 일인데.”


“저희는 사랑하는 선배가 장가 못 갈까봐 걱정 되는데요?”


정말 다행히 말을 돌려주는 유 기자입니다.


“하하하.” 


저는 그들의 대화에 빠져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이시여. 왜 하필 민아를 아프게 하나요?  너무나도 착한 그 아이를 말이죠.




“정말 나 가지고 노는 거야? 뭐야?”


제가 아무리 시한부 삶을 산다고 해도 그렇게 젖비린내 나는 녀석이랑 엮어 줄라고 하다니. 모두 다 미친 거 아닙니까?


‘땡그랑’ 


동전을 떨어뜨리기까지 하다니. 짜증지수가 증가하는 군요.


“여기요.” 


“감사. 어? 한민재?”


“정민아?” 


제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한민재입니다.


“너 여기 다녔냐?”


“응. 광고마케팅에 다녀.”


광고마케팅부라. 돈은 잘 벌겠네요.


“너는?” 


“연예 부.”


“그 시시콜콜한 기사 쓰는 정 기자가 너였어? 설마 했는데”


뭐죠? 이 자식. 남이 열심히 쓰는 기사를 시시콜콜하다고요? 예의가 없는 녀석입니다.


“그래 그 시시콜콜한 기사를 쓰는 정 기자가 나다.”


“미안. 그런 의도로.”


‘따르릉’ 


“여보세요. 아. 네. 지금 바로 갈게요. 예.”


저 녀석이 전화를 끊고 품에서 무언가를 찾습니다.


“미안하다. 내 연락처니까. 이리 연락해.”


그 녀석은 저에게 명함을 쥐어주고 뛰어 내려갔습니다. 기분 나쁩니다. 저는 코코아 한 잔을 뽑고 벤치에 앉았습니다.




“뭐야? 저 남자. 왜 정 선배랑 있는 거지?”


어떤 잘 생긴 남자가 정 선배와 함께 있네요.


“잘 안 들리잖아.”


그 순간 남자가 이리로 옵니다. 저는 재빨리 문 뒤로 숨었습니다.


“?” 


그 남자의 품에서 무언가가 떨어집니다. 그 것을 주워보니 명함입니다.


“광고마케팅 팀장 한민재?”


저보다 높군요.  쳇.




“하늘은 높구나.”


“선배 뭐해요?”


이 꼬마는 어찌 또 저를 따라왔을까요?


“네가 무슨 일이냐?”


“선배랑 코코아 마시려고 왔죠.”


그 녀석은 제 옆에 앉습니다.


“선배는 내가 싫어요?”


“어?” 


뭐야 이 녀석. 부담스럽잖아요.


“나는 선배가 좋거든요. 그런데 선배는 자꾸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아요.”


“그.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왜 당황하는 거죠?


“박 선배에게 그랬다면서요. 어려서 싫다고.”


박 기자 죽여 버릴 겁니다. 그새 다 말하다니요! 하여간 입이 가벼워도 여간 가벼운 게 아닙니다.


“하지만요.” 


그 녀석이 제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그 녀석의 가슴으로 끌고 갑니다.


“여기는 그 어떤 남자보다 뜨겁거든요.”


저 왜 이렇게 얼굴이 뜨겁죠?


“아. 아하.”


저는 억지로 손을 빼냈습니다. 하지만 손에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나 다시는 사랑 안 해.”


그 녀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왜요?” 


“지겹거든.” 


“사랑이 지겨워요?”


놀라는 이 녀석


“매일 똑같은 말에. 똑같은 일들. 너무 지겨워.”


“내가 매일 새롭게 해줄게요.”


“그래도 지겨운 건 지겨운 거야.”


“그게 다에요?”


“그리고 나는 어린 사람이랑은 안 사겨.”


그 녀석이 저를 진지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죠?


“내가 어른스러워 지면 나랑 사귈 거 에요?”


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