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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송이 - [네번째 이야기]

권정선재 2008. 1. 3. 18:15
 




- 4번째 눈꽃송이 -




“가지 마요.”


너무나도 애절합니다.


“미안.” 


“…….” 


“나에게 조금만 시간을 줄래?”


“네?”
 


“시간 말이야.”




“내가 왜 그랬지?”


괜히 진실한 사람에게 상처만 준 건 아닌가 싶네요.


“에효.” 


결국 저는 갈팡질팡 하는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채 민재에게로 향했습니다.


“민재. 민성.”




“하아” 


저에게도 기회가 왔습니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건 긍정적인 이야기가 맞는 거겠죠?


“야호!” 


너무나도 기쁩니다. 마치. 세상이 제 것인 양 싶습니다.




“왜 이렇게 안 오지?”


벌써 20분 째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너무 일찍 나온 건가?”


그 순간, 들리는 목소리.


“내가 좀 늦었지?”


“일단 앉아.”

“응.”

민아가 앉자마자,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하러 왔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뭐 마실래?”


“코코아.” 


“코코아 한 잔이랑 라떼 한 잔이요. 시럽 듬뿍이요.”


“예.” 


“그래 할 말이라는 게 뭐야?”


“나 너 좋아해.”


“!”


이런 고백을 하루에 두 번이나 들어버릴 수도 있군요.


“어?” 


민재의 눈 역시 민성의 눈 못지않게 진지합니다.


“우리 사귀자.”


“미안.”


“아.” 


그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옵니다.


“미안해, 나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 순간 웨이트리스가 다가왔습니다.


“주문하신 음료입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우리를 맴돕니다.


“누구야?” 


“나랑 일하는 파트너.”


“이민성인가 하는 친구?”


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내가 늦은 건가?”


“그런 건가?”


그가 미소를 짓는데, 마음이 시려옵니다. 괜히 미안해집니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어?”

“내 멋대로 너를 좋아해 버린 건데, 네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고백한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민재야.”

“웃어.”

어쩌면 말입니다. 민성이의 고백을 듣기 전에 민재를 만났더라면, 민재가 먼저 고백을 했더라면, 민재의 고백에 승낙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민성이의 진실한 고백을 들어버렸기에, 이미 마음이 움직여 버렸기에, 지금 이 순간 거절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민재의 마음도 진실한 것을 알지만, 민성이의 마음이 지금으로써는 저에게 더 소중학고, 더 크게 다가오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미안해.”

“아니.”

그가 밝게 웃습니다. 민재는 훨씬 따뜻한 녀석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고맙다.”


“뭐가?”

“미련 같은 거주지 않아서.”


“민재야.”

“괜히 사귈 것도 아니면서 시간 끄는 사람들 불편해. 그래도 너는 지금 이 자리에서 명확히 네 의사를 밝혀주었잖아. 괜히 내가 아파할까 말을 돌리지도 않았고, 그래서 고마워. 역시 너는 내가 좋아할 만 해.”


“킥.”


“그래도 말이야.”


“?”

민재의 머뭇거림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집니다.


“우리 친구는 할 수 있는 거지?”

“친구?”


아, 다행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나와 인연을 끊으면 어떠나 했는데, 그렇게 속이 좁은 녀석은 아닌가 봅니다.


“물론이지.”


“그럼 이제 우리는 좋은 친구다.”


“응.”


“그럼 우리 말이야.”

제가 장난스럽게 웃자, 민재가 불안한 표정을 짓습니다. 민재가 이렇게 나오니 더 재밌겠는 걸요.



‘따르릉’ 


“여보세요?” 


“야. 민성아.”


민아 선배입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심상치 않네요.


“민아 선배? 술 마셨어요?”


“그래 마셨다. 헤헤, 지금 나올 수 있냐?”


적잖은 양을 마신 모양입니다.


“어디에요?” 


“여기? 어딜까?”


단단히 취한 모양입니다. 휴.


“빨리 말해봐요. 바로 출발할 게요.”


“여기가 그래, 여의도. 63빌딩이 보인다. 헤헤”


다행히, 여기와 가깝습니다.


“바로 갈게요. 끊어요.”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죠?




“선배!” 


“일찍 나왔네.”


다행히 선배는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무슨 일이에요?”


“그냥 술 마셨어. 네 고백에 대한 대답도 생각해보고.”


“대답이요?”


조금은 떨립니다.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우리 사귀자.”


“네?”


이렇게 쉽게 선배가 승낙을 하다니. 그렇다면 조금 더 빨리 고백할 걸 그랬나봐요.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요? 


“뭔데요?”


“내가 갑자기 사라져도 놀라지 않기.”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런 건 묻지마.”

자신이 아픈 것은 이야기 해주지 않는 군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그녀의 옆에 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이죠.


“그럼, 안 물을게요.”


제가 미소를 짓자, 민아 선배도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그래. 그럼 오늘부터 1일이다.”


이런 게 행복이군요.


“그나저나 선배 좀 똑바로 서봐요.”


“헤헤.”


어떻게 선배를 집까지 데려다 주죠?




“하아.”


저 멀리 민아를 부축하고 가는 그 녀석이 보입니다. 저를 물리친 녀석, 대단한 녀석이군요.


“훗.”


그런데 왜 마음이 쓸쓸하지 않을까요? 그녀를 지켜줄 남자가 그녀의 곁에 있기 때문일까요?저 그렇게 낭만적인 녀석은 아닌 데 말이죠. 그래도 다행입니다. 나 말고도 그녀를 지켜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춥다.”

혼자서 조용한 곳에서 술 한 잔 마시고 싶은 밤입니다. 마음은 하나도 외롭지 않은 밤이군요.




“민성이는 잘 갔으려나?”

그나저나 저도 주책입니다.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야, 다른 사람 연애 상담이나 해주고 있다니.


“하아.”

오늘 잠은 혼자서 조용히 술을 마셔야 겠군요. 어디 좋은 술집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