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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살다. - [열네 번째 이야기]

권정선재 2009. 2. 4. 00:08

 

 

 

추억에 살다.

 

 

열네 번째 이야기

 

 

 

하아.

 

민용은 한숨을 쉬면서 마지막 소주잔을 비웠다.

 

여기 얼마입니까?

 

삼만원이요.

 

여기요.

 

민용은 만 원 짜리 세 장을 포장마차 테이블에 얹어놓고 난 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술 기운이 민용의 몸을 지배했지만, 이상하게도 정신만은 너무나도 또렷했다. 몸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조금은 멍청하게 굴어도 될 머리 만큼은 똑바랐다.

 

제길.

 

민용은 작게 욕을 내뱉었다.

 

, 이럴 땐 취하지도 않아요.

 

민용은 비틀 거리며 집을 향해 걸었다.

 

 

 

애미야 괜찮냐?

 

.

 

문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자 신지가 미소를 지었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나요?

 

, 그 자식 들어 오면.

 

순재가 입술을 씰룩이자 신지가 고개를 저었다.

 

오빠도 후회하고 있을 거예요.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떻게 안 나쁘게 생각하니?

 

문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민용이 그 자식은 왜 갑자기 또 너랑 이혼을 하겠다고 그렇게 설쳐 대는 거야. 두 사람 다시 재결합 한다고 했을 대도 그렇게 난리를 떨었으면서, 다시는 이혼 안 한다고 해 놓고서는.

 

죄송해요.

 

신지가 고개를 숙였다.

 

다 제가 부족해서 그렇죠.

 

아니다.

 

순재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얼마나 잘 하는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무슨 소리.

 

맞아.

 

문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신지의 손을 잡았다.

 

너 얼마나 잘 하고 있니, 며느리로써도, 엄마로써도,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로써도 너무나도 잘 하고 있잖니.

 

문희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신지를 바라보며 신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정성껏 쓸어 넘겨주었다.

 

이걸 어쩌누.

 

헤헤.

 

신지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제가 이혼 당한 거 같잖아요.

 

그래.

 

문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길을 거둬갔다.

 

아직 아니지. 그리고 앞으로도 아니지.

 

, 이혼 안 할 거예요.

 

신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렴.

 

순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야 말로 걱정하지 말거라.

 

.

 

신지가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그래, 이 양반이 민용이 다시 다잡아 줄 거다.

 

문희가 신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니까 너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고, 그저 준이 동생 태교에만 신경 써. 민용이 그 녀석도 아마 지 애 보면 마음이 달라질 거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편안히 있어. 알았지?

 

. 알았어요 어머니.

 

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어머니 덕에 마음이 놓여요.

 

그래.

 

문희가 신지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우리 준이 애미 불쌍해서 어쩌누?

 

이 놈의 할망구가 왜 또 청승이야?

 

문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하자 순재가 벌컥 역성을 냈다.

 

누가 무슨 일이 있다고 이 난리야? 준이 애미랑 민용이 자식 두 사람 사이에서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알아요.

 

문희가 살짝 위축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민용이 그 자식이 얘한테 그런 말을 했는데 당신은 그냥 무덤덤하게 있을 수 있어요?

 

그럼.

 

순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못 그럴 건 또 뭐야?

 

당신 정말.

 

문희가 미간을 찌푸리자 신지가 문희의 팔을 잡았다.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신지가 씩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어머니랑 아버님이 제 편 들어주시잖아요. 그런데 무슨 문제에요.

 

 

 

후우.

 

민용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길.

 

취하고 싶었는데 너무나도 맑은 정신으로 집 앞까지 와 버렸다.

 

하아.

 

민용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호오. 그러니까 삼각, 아니 사각 관계라.

 

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무슨 일일 드라마도 아니고.

 

해미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네.

 

 

 

다녀왔습니다.

 

민용이 힘 없는 목소리로 집에 들어서자 순재가 득달 같이 밖으로 뛰쳐 나와서 민용의 뒤통수를 쳤다.

 

!

 

못된 놈.

 

순재가 부들부들 떨면서 민용을 바라보자, 민용이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순재를 바라봤다.

 

왜 때리세요?

 

왜 때리세요?

 

순재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지금 내가 너를 왜 때리는 지를 몰라서, 왜 때리세요? 라고 말을 한 거냐?

 

.

 

민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버지에게 맞을 이유 하나 없네요.

 

, 이런.

 

순재가 다시금 주먹을 쥐자, 황급히 문희가 나와서 순재를 말렸다.

 

영감 왜 이래요?

 

!

 

순재가 민용을 발로 찼다.

 

이혼? 네가 생각하기에는 이혼이라는 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해도 되는 장난으로 보이더냐?

 

누가 장난이라고 했어요?

 

장난이 아닌데! 장난 아닌 거 아는 놈이, 그렇게 쉽게 이혼하자는 말을 내 뱉어? ! 네 자식은 어쩌고!

 

양육비 줍니다.

 

민용이 무덤덤하게 답했다.

 

무책임하게 그 아이 버리겠다는 게 아니라, 양육비도 다 주고, 그런다고요. 하지만 더 이상 그 아이와 살을 섞으면서 한 이불 덮으면서 못 살겠어요. 아버지. 저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너는 결혼이 사랑으로만 이루어지는 거니?

 

문희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민용을 바라봤다.

 

그냥 함께하는 그런 것도 있잖아.

 

아니요.

 

민용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공연히 마음에 없는 사람이랑 평생 같은 이불 덮고 자는 것도 너무나도 웃긴 일이잖아요. 저는 그런 거 잘 못합니다. 저랑 그런 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그런 건 저답지 않은 일이에요.

 

!

 

순재가 다시금 민용을 치려고 하자, 민용이 그 손을 잡았다.

 

아버지야 말로 왜 그러세요?

 

너 이 손 못 놔!

 

이거 제 삶입니다. 아버지 삶 아니라고요. 아버지 삶도 아닌데 왜 자꾸 제 삶에 관여할려고 하세요.

 

오빠 말 너무 심한 거 아니야.

 

?

 

신지가 나오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자 민용이 신지를 바라봤다.

 

너 왜 아직도 이 집에 있는 거야? 너랑 이혼하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이 집에 있어?

 

내 집이니까.

 

?

 

민용이 기가 막히다는 듯 신지를 바라봤다.

 

이게 어떻게 네 집이야?

 

어머니, 아버님 손주도 이 집에 있고, 내 남편도 이 집에 있는데, 그러면 도대체 여기가 내 집이 아니면 여기가 뭐야? ?

 

.

 

민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더 이상 너랑 살지 않겠다고. 더 이상 너라는 여자 애랑 한 침대에 눕지 않을 거라고. 이혼하자고.

 

아니.

 

신지가 고개를 저었다.

 

나 이혼 못 해.

 

하게 될 거야.

 

아니.

 

신지가 민용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 이 가정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 지금 이 행복 어떻게든 부수고 싶지 않아. 준이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

 

민용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애가 러시아로 공부하러 가고 싶다고 해 놓고서는 아들 내팽개치고 떠나? 퍽이나 모성애 가득하다.

 

그러니까 이러는 거잖아.

 

신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 때 준이에게 못 해준 게 너무나도 많으니까 지금 다시 준이를 그렇게 아프게 하지 않게 하려고 이러는 거잖아.

 

웃기지 마.

 

민용이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준이 핑계 대지 마. 너도 알고 있었잖아.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거 말이야.

 

오빠.

 

나 아직도 서선생 사랑해.

 

!

 

신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너라는 사람에게 청혼했던 거?

 

민용이 코웃음을 쳤다.

 

그저 동정이었어.

 

민용이 매서운 눈초리로 신지를 노려봤다.

 

너에 대한 애정 따위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다고!

 

애미야!

 

그 순간 신지가 무너지듯 주저 앉았다.

 

. .

 

신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애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