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물도 맞추는 남자, 밥물도 못 맞추는 여자
8
“다행히 오늘 저녁에는 손님이 별로 없어서 일찍 끝났네요.”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요.”
주연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말았다.
“그런데 저는 왜 보자고 하신 거예요?”
“나 궁금한 거 하나 있는데.”
“궁금한 거요? 말씀하세요.”
“내 이름을 알아요?”
“네?”
순간 은비는 당황했다. 늘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이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은비의 표정이 금방 변하자 요리사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은비는 자신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이거 실망이네요.”
“죄송해요.”
“여기서도 죄송.”
요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여자는 너무나도 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남자가 이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너무 착해서 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은비 씨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죄송한 거예요? 내가 보기에는 은비 씨는 죄송할 일이 하나도 없는데 자꾸만 죄송하다고 말을 하는 것만 같아요. 죄송하지도 않은데 자꾸만 죄송하다고 하면 진짜로 죄송할 일이 생기곤 해요. 그러니까 나는 은비 씨가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고맙습니다.”
“좋아요.”
요리사가 미소를 짓자 은비는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자신이 그렇게 죄송하다는 말을 많이 했던 것일까? 그녀가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까지도 그녀를 위해주기 위해서 기다릴 만큼?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 제 이름은 이세인입니다. 이세인. 앞으로는 잊지 말아요. 분명히 내 소개를 했는데 잊고 있어.”
“죄송합니다.”
“또.”
“아.”
세인의 지적에 은비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 그런 은비를 보면서 세인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봐도 귀여운 사람이었다. 뭐라고 말을 할 수 없게 착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은비에게서는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꽤나 많이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여태까지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주방이 험하죠?”
“내가 일을 못 해서 그런 건데요.”
“아니에요.”
세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주방이라는 공간은 원래 엄해야 하는 곳이었다. 칼을 다루고 불이 있는 곳이기에, 누구나 다칠 수가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큰일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기에 모두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하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진심은 그렇지 않더라도 때때로 화를 내거나 하고는 했었다.
“은비 씨. 그 사람들이 모두 나빠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그 정도는 은비 씨도 이해를 할 수 있죠?”
“그럼요.”
은비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사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주방에서 일을 하고 나니 몇 가지 사실을 알 수는 있었다. 이 사람들이 정말 열성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정말로 자신의 일을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은비에게 하나의 자극이 되고 있었다.
“다들 너무나도 자신의 일에 열심히 해서 그렇게 화도 내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해를 해요.”
“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네?”
세인은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직 주방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웬만한 요리는 다 만질 수 있었다.
“권선재 씨가 조은비 씨를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아요. 그러니까 친구. 친구로 말을 하는 거예요. 지금 은비 씨 기분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잖아요. 주방에서 그렇게 크게 일을 당했으니까 기분이 좋을 수도 없고 말이에요. 그런데 이럴 때 가장 기분을 잘 풀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요? 바로 잘 먹는 거예요. 잘 먹기만 하면 지금 우울한 기분은 모두 날아갈 테니까요.”
“괜찮아요. 퇴근하셨잖아요.”
“뭐.”
세인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 여자는 다른 사람을 너무나도 잘 배려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세인은 이런 사람을 그렇게 썩 좋아하는 편은 또 아니었다. 다른 이를 너무 배려하다 보니 정작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서툴거나 다소 부족하게 굴기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은비 씨. 지금 나는 조은비 씨를 위해서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갔죠.”
“그럼 저 수프요.”
“네?”
세인은 눈을 깜빡이며 은비를 바라봤다.
“지금 수프가 먹고 싶다고 한 거예요?”
“네. 우리 레스토랑에 정말 맛있는 요리가 많이 있지만요. 저는 이상하게 그 중에서 수프가 가장 맛있게 보이더라고요. 수프 줄 수 있어요?”
“그건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닌데. 이미 만들어져 있을 텐데. 정말 다른 요리 같은 것은 싫어요?”
“네.”
은비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수프가 먹고 싶어요.”
“NG!"
감독의 외침이 울려퍼지자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가독의 얼굴도 구겨지고 있었고 선재의 얼굴도 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NG를 연달아서 내고 있는 주연은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 이거 죄송해서 어쩌나? 또 NG를 내고 말았네요. 이거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마음처럼 안 되네.”
“원주연 씨 좀 제대로 하죠.”
“죄송해요.”
선재의 지적에 주연은 미소를 지으면서 두손을 모았다.
“열심히 대본을 보고 했는데 이상하게 이 부분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네요. 그냥 머리에 지우개가 있는 것 같아.”
“지우개라도 있으니 다행이군요. 나는 원주연 씨 머리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뭐라고요?”
선재는 시선을 바로 피했다. 이 여자와 자꾸 부딪히느라 레스토랑에 가야 하는 시간이 늦춰지고 있었다.
“한 번만 더 NG 내면 저 그냥 갈 겁니다.”
“뭐라고요?”
선재의 엄포에 감독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드라마가 이제 편집을 해야 바로 방송이 될 텐데 선재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더 이상 연기를 하지 않겠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감독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감독님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충분히 성의있게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찍은 것을 봐서는 저랑 저쪽 배우 분 붙이면 대충 그림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번 한 컷에도 오케이가 안 나면 먼저 가봐야 겠다는 말입니다. 가야 할 곳이 있거든요.”
“형!”
“왜?”
매니저가 멀리서 불렀지만 선재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가볍게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러니까 감독님 저에게 뭐라고 말씀을 하시지 마시고, 원주연 씨 보고 연기 좀 제대로 하라고 하세요.”
“후우. 좋아.”
감독은 표정을 바꾸고 주연을 바라봤다. 평소에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주던 감독이 화를 내자 주연은 살짝 긴장이 되었다.
“원주연 씨.”
“네?”
“들었죠?”
“네.”
“이번에 못 하면 다음부터 작가에게 말을 해서 원주연 씨 비중 조연보다도 적게 뺄 겁니다. 이 점 명시하고 이번에는 제발 제대로 연기 좀 해주세요. 지금 들어간 필름값이 원주연 씨 게런티보다 비싸니까.”
“알겠습니다.”
주연은 살짝 입을 내밀었다. 권선재를 약을 올리려고 했던 행동이 다시금 부메랑이 되어서 그녀에게 돌아왔다.
“그럼 다시 준비하고, 스탠바이!”
“이런 젠장.”
옷을 갈아입으면서 선재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미 주연이 퇴근을 했을 시간이었다. 연기를 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제대로 몰랐다.
“야, 희준이에게 전화 좀 걸어줘.”
“네.”
희준은 종이를 들여다보면서 미간을 모으고 있었다. 신메뉴라는 것이 생각 외로 반응이 좋지가 않았다. 게다가 선재가 말을 한 것이 맞는 것인지, 쉐프가 담당을 하고 있는 스페셜 요리보다는 한국인 요리사들이 요리를 하는 메뉴가 조금씩 메출이 더 올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게 웬일이야.”
평소에 선재가 그냥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녀석도 제대로 된 혀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Rrrrr Rrrrr'
선재의 번호가 찍혀있는 전화기를 보고 희준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의 생각을 하자마자 전화가 오다니.
“여보세요?”
‘아 희준이 형. 선재 형이 전화 좀 걸어달라고 해서,’
‘이리 내놔. 멍청아. 야 차희준.’
“왜?”
희준은 자세를 바꾸면서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너 지금 어디냐?’
“어디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레스토랑이지. 오늘은 어쩐다고 레스토랑에 행차를 안 하시냐?”
‘어떤 미친 년이 자꾸만 내 발목을 붙잡고 있어서 여태 못 갔어.’
“미친년?”
‘그런 게 있고. 지금 은비 씨 퇴근을 했냐?’
“했을 걸?”
시계를 보면서 희준은 심드렁하게 대꾸를 했다. 아까 직원들이 우르르 나가는 것을 봤으니 분명히 그 속에 은비도 있을 거였다.
“왜?”
‘아 미치겠네. 매일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너 혹시 모르니까 잠시 나가서 있는지 확인을 해줄래?’
“전화를 해보면 알잖아?”
‘아 맞다. 내가 왜 은비 씨에게 전화를 할 생각을 안 했지? 네 생각이 가장 먼저 나더라. 아무튼 고맙다.’
“야!”
뭐라고 더 말을 하기도 전에 선재의 전화는 끊겨져 버렸다. 희준은 전화기를 보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은비가 어디에 있는 지를 묻는데, 은비보다 자신에게 먼저 전화를 다 걸다니. 멍청한 것인지 자신을 믿는 것인지, 도대체 어느 쪽이 선재의 진심인지 제대로 감이 잡히지는 않았다.
“퇴근을 했겠지?”
그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희준이었다.
“형, 오늘 국장님이 보자는데?”
“바빠.”
차키를 들면서 선재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지금 은비를 마중 못 가게 생겼는데 그까짓 드라마 국장이 대수인가?
“형, 오늘 국장님 안 보면 앞으로 이 방송국에서 드라마 찍지 못하게 될 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잠시 얼굴이라도 보고 가요.”
“누가 겁이 난대?”
선재는 전화기로 은비의 번호를 누르면서 무심하게 대꾸했다.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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