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물도 맞추는 남자, 밥물도 못 맞추는 여자
7
“어?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뭘 하긴요.”
선재가 미소를 지으면서 반갑게 은비를 맞았다.
“출근하는 거 데려다주려고 온 거죠.”
“나 알아서 갈 수 있는데.”
“왜 그러냐?”
채연은 은비의 어깨를 툭 치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아침에 출근을 하는 일은 버거운 일 중에 하나였다.
“저도 같이 타도 되는 거죠?”
“물론이죠.”
선재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은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선재에게 자꾸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데, 채연은 그녀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자꾸만 어긋나게 굴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미안한데.”
“미안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서 레스토랑이 먼 것도 아니고, 오늘 희준이 녀석을 보고 할 이야기도 있었거든요. 어차피 내가 일이 있어서 가야 하는 건데, 같이 가면 더 좋은 거잖아요. 안 그래요?”
“정말로 사장님에게 볼 일이 있으신 거예요?”
“네.”
“은비 너는 선재 씨가 맞다고 하잖아. 뭘 그렇게 묻고 그러는 거니? 하여간 애가 쓸 데 없는 의심만 많아서. 선재 씨 고마워요.”
“네.”
채연은 재빨리 은비를 끌고 차에 태웠다. 그리고 살짝 은비를 노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는 그렇게 눈치가 없냐?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라면 데려다주고 싶은 것이 당연한 거지. 너는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묻고 그러냐?”
“미안하니까 그러지.”
은비는 살짝 입을 내밀었다.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고 편하게 선재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불편하니까. 무작정 그렇게 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징한 놈.”
아침부터 싱글벙글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서는 선재를 보며 희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같이 살자는 말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된 애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기 전까지 포기를 하는 법이라고는 없었다.
“결국 황태자께서 여기까지 친히 행차를 다 해주신 겁니가?”
“행차는 무슨.”
선재가 나태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희준아. 부탁이다. 내가 언제 너에게 부탁 같은 거 한 적이 있어? 없잖아. 그러니까 친구 한 번 살리는 셈 치구 같이 살자. 응?”
“싫어.”
희준은 다시 한 번 단호히 거절을 했다. 선재는 너무나도 쉽게 거절을 말하는 희준을 보며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왜 싫어?”
“네가 성격이 좀 깔끔하냐? 그건 깔끔의 수준을 넘어선 병이잖아. 나 그런 너랑 못 산다. 절대로 못 살아. 너는 네 친구 피 마르는 꼴 보고 싶은 거냐? 왜 자꾸 나랑 같이 살자고 난리아.”
“아니 은비 씨랑 제대로 연애를 하려면 아버지께 아무런 터치도 받지 않을 곳이 필요하다니까? 그곳이 너희 집이라는 거지.”
“너 3주 후에 들어갈 거면서.”
“에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은비 씨의 마음 3주 안에 돌리겠다고 했잖아. 그리고 그 안에 마음을 돌리면 사귀기로 한 거고 말이야.”
“그렇지.”
선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자신이 금방 도로 나올 거라는 말이 어디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거지?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너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은비 씨의 마음에는 들지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지.”
“에?”
선재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저 녀석은 친구라는 놈이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만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너는 어차피 말을 하는 거 예쁘게는 말을 못 하는 거냐? 꼭 그렇게 까칠하게 말을 해야 하는 거야?”
“까칠하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를 해서 말을 하는 거야. 솔직히 말을 해서 네가 은비 씨랑 결혼을 하기를 할 거냐?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리기를 할 거냐? 괜히 그러다가 사람 아프게 하거나 하지 말고, 여기서 그냥 마음 접는게 좋은 거야.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내기하자.”
선재가 눈을 반짝이자 희준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기가 시작이 되면 선재는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참 신기하게도 분명히 확률이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내기만 하면 선재가 이기곤 하는 거였다.
“왜 싫어?”
“나한테 득이 될 것이 뭐가 있다고 너랑 사람 마음을 가지고 내기를 하냐? 그런 일에 취미 없어.”
“없기는.”
선재는 자리를 바꿔 희준의 옆에 앉았다. 희준은 유난히 내기를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처음에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펄쩍 뛸지 모르겠지만, 곧 내기에 흥미를 가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네 앞에서 알짱거리지 않을게.”
“어?”
갑작스러운 선재의 발언에 희준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알짱거리지 않다니?
“너 그게 무슨 말이야?”
“너도 솔직히 나 불편하게 생각을 하고 있잖아. 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차희준 너 나 되게 불편하게 생각을 하고 있어. 하지만 너 성격이 너무 좋아서 나보고 물러서라는 이야기도 못 하고 있잖아. 네가 말은 하지 않고 있더라도, 우리 두 사람이 하루 이틀 친구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다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만일 네가 내기에서 이긴다면 이유 없이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네가 이기면?”
“같이 사는 거지.”
끌리는 제안이었다. 실제로 희준은 선재의 말처럼 어느 순간부터 그가 불편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띄게 행동을 한 적은 없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역시나 선재는 그리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좋아.”
“어지간히 나 싫어하나 보네.”
선재가 미소를 지으면서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이 시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3주 후에 결과를 알게 되는 거네?”
“결과는 어떻게 확인을 하지.”
“청혼을 할 거야.”
“어?”
희준은 놀란 눈으로 선재를 바라봤다. 아니 3주 안에 그 여자의 마음을 돌리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에 청혼을 쓴다고?
“네가 지금 드라마를 많이 찍거나 로맨스 소설을 많이 써서 그러는 모양인데 말이야. 3주 안에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 여자는 그리 많지 않아. 아니,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그런데 너는 그렇게 확인을 한다는 거야?”
“응.”
선재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은비라면, 그리고 그가 마음에 담기 시작한 그 첫 모습이 진실된 모습인 은비라면, 청혼을 받아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면 내기 성립하는 거지?”
“어? 그래.”
선재가 희준에게 힘주어 손을 내밀었다.
“3주, 저 사람 꼭 내 사람을 만들 거야. 그러니까 희준이 너 당장 드레스룸 비워놔야 할 거야. 그럼 나는 스케쥴 있어서 먼저 가볼게.”
“그래.”
멀어지는 선재를 보면서 희준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저 녀석이 사랑을 이루기를 바라야 하는 건가 실패를 하기를 바라야 하는 건가?
“하아.”
사장실을 나오는데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희준이 그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오늘 아침에 권선재 씨가 태워다 준 거야?”
“네.”
점심시간 내내 레스토랑에서 가장 화재가 되는 인물은 은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천하의 권선재가 직접 운전을 해서 모시고 왔다는데 안 놀랄 사람이 없는 거였다. 평소에 희준과 선재의 사이를 보던 레스토랑 사람들의 눈에 선재는 그저 까칠한 배우일 뿐, 어떤 남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은비 씨는 그 사람하고 사귀는 거야?”
“아니요.”
은비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은비가 이렇게 대답을 하자 살짝 사나웠던 시선들이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은비 씨는 권선재 그 사람이 계속 좋다고 따라다녀도 거절만 하고 그런다는 거야? 계속?”
“계속 거절이야 하겠어요? 그래도 모르죠. 다들 즐거운 식사 하세요.”
은비에게 질문이 끊어지지가 않자 채연이 재빨리 끼어들어서 너스레를 떨었다. 채연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은비를 바라봤다.
“그거 다 대답을 해주면 어쩌자는 건데?”
“아니 궁금하다고들 하시니까.”
“궁금하면? 너도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면서 누구한테 설명을 해주고 있는 거냐? 이런 소문 나가면 좋을 거 하나 못 돼. 너 권선재 씨l에게 득은 못 되더라도 해를 끼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야?”
“응. 아니야.”
“그러니까 말이야.”
채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아이는 너무나도 착해서 탈이었다. 그걸 다 대답을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것인지.
“어서 밥이나 먹어. 아직 너 밥 그대로 있네.”
“배가 별로 안 고파서.”
“배가 안 고프긴. 식신 조은비를 내가 모르냐? 그나저나 나는 선재 씨가 이해가 안 가. 이런 일이 스캔들이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무식하게 행동을 하는지 몰라. 정말 대단하지 않아?”
“그러네.”
은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채연의 말을 들어보니 선재는 자신보다 잃을 것이 확실히 많은 사람이었다.
“형, 원주연 쪽에서 지난 번 스캔들 미안하다고 밥이나 한 끼 하자는데, 형은 어떻게 생각해?”
“됐다.”
선재는 대본을 넘기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런 여자애랑 얽히는 것은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어차피 아니라는 거 알고 있고, 서로 그렇게 사이도 좋지 않은데 굳이 밥을 같이 먹을 필요가 있나?”
“그래도. 그쪽에서 미안하다고 하는 건데 말이야. 우리도 어느 정도 맞춰주기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럴 필요 없다니까?”
선재는 대본을 소리나게 덮으며 매니져를 쳐다봤다. 그런 선재의 시선에 매니저는 살짝 침을 삼켰다.
“형 너무 심한 것 같기도 해. 아니, 원주연 씨가 뭐가 어쨌다고 그 사람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연기를 못 하잖아.”
선재는 너무나도 간단하다는 어조로 대꾸했다. 선재가 생각을 하기에 연기도 하지 못하면서 드라마를 한다고 설치는 것은 분명한 죄였다.
“그 사람이 연기를 잘 해?”
“아니.”
“대본을 제대로 외운 적이 있어?”
“아니.”
“그렇다고 스태프에게 친절하니?”
“아니.”
“그런데 예쁜 구석이 어디에 있냐? 그런 애는 더 욕을 먹어도 싸. 내가 더 욕을 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내 파트너이고, 내가 뭐라고 한 이후에는 대사라도 외워오는 성의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얽히거나 같이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어. 그 여자 때문에 내 드라마 보기도 싫어지는데. 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됐다고 그래.”
“알았어.”
매니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재의 말을 듣고보니 주연이라는 여자는 확실히 조금은 하자가 있어 보였다.
“그나저나 요즘 연장 이야기 나오는 거 들었어?”
“안 해.”
“에? 왜?”
매니져가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의자를 끌고 와서 선재의 옆에 앉았다.
“형 여태까지 드라마에서 연장을 하자고 하면 무조건 했잖아. 드라마를 사랑해주신 시청자들을 위한 선물이라고 말이야. 설마, 연장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원주연 그 사람이 싫어서 그러는 거야?”
“아니.”
선재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나 연애할 것 같거든.”
“에?”
매니저가 놀란 눈으로 하고 선재를 바라봤다. 아니 그 동안 스캔들 한 번 제대로 나지 않고, 여자들도 가려가면서 만나던 선재가 연애를 할 것 같다고? 역시나 그 여자였던 것인가?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은 아니었다.
“형 그거 사장님은 아나?”
“모르지.”
선재는 다시 대본을 읽기 시작하면서 대답했다.
“내가 연애하는 걸 일일이 사장님에게 다 보고하면서 해야 하는 거냐? 내가 이 나이에? 그래야 하는 거야?”
“아니 보고를 하라는 건 아니고.”
매니저는 황급히 말꼬리를 흐렸다.
“그냥 기사가 나고 그러면 복잡하니까 그런 거죠. 형 정말로 이상한 생각 같은 거 하는 건 아니죠?”
“내가 남자 안 사귄다고 하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여겨야 해. 어디서 쓸 데 없는 걸로 협박이야.”
“협박이 아니죠.”
매니저는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한다고 들을 선재도 아니었지만.
“그럼 밥은 안 먹는다는 거죠?”
“응.”
“알겠어요. 그렇게 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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