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네, 은비 씨도요.”
선재가 멀어지고 나서야 은비는 편하게 숨을 내쉬었다. 저 남자와 있으면 은근히 긴장이 되는 그녀였다.
“이제 오냐?”
“어? 채, 채연아.”
“놀라기는.”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던 채연이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의 눈을 보는 순간 은비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들었다.
“왜?”
“너 권선재 씨 싫다며. 그런데 왜 자꾸 저 사람하고 얽히려고 하는 걸까? 우리 은비가 생각을 바꾸셨나?”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면?”
“집에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
“어?”
은비가 숨기지 않고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니 채연은 더욱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을 이야기를 한다는 거지?
“뭐? 그러니까 천하의 권선재가 너한테 기회를 달라고 한 거야? 3주라는 시간 안에 네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응.”
코코아가 담긴 잔을 양 손으로 꽉 잡으면서 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너는 마음이 조금은 변했어?”
“맨 처음 만났을 때 본 거보다는 다정한 사람이더라고. 원래 매너가 몸에 베어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말이야. 사람들에게 친절한 것ㅇ르 보니까. 사람 자체는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오라.”
“왜?”
채연이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자 은비는 살짝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 마음이 변하고 있구나?”
“내 마음이 변하고 있다고?”
“응. 너 맨 처음에는 아예 권선재 씨 사람으로도 생각을 안 했잖아. 그런데 이제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거 아니야?”
“너 말 그렇게 하지 마. 내가 언제 권선재 씨를 사람으로도 생각을 안 했다고 그러는 거니? 그냥 나랑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라서 부담스럽다는 말 밖에 하지 않았어. 너 이상한 말 좀 하지마.”
“아무튼.”
채연을 팔짱을 끼고 여기저기 은비를 살폈다. 역시나 공을 들이면 여자의 마음은 변하는 것일까?
“천하의 조은비가 이제 남자친구가 다 생기려나 보네. 나는 이제 막 애인이랑 깨졌는데, 이거 너무 부러운데.”
“앞서 나가지 마.”
“앞서 나가는 것이 아니지. 그 사람은 네가 너무나도 좋다고 하고. 너는 마음이 야금야금 바뀌고 있으면, 뭐 결과는 좋은 거 아닌가?”
“아닐 수도 있어.”
은비는 단호히 말을 하며 남은 코코아를 단숨에 마셨다. 따뜻한 것이 몸에 퍼지니 기분이 살짝 나른해졌다.
“그 사람이 매너가 좋고 착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대하면 대할수록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함께 알게 되겠더라고. 나랑 너무나도 다르게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서 확실히 부담이 가.”
“어디가?”
“전부.”
“전부라니? 그런 게 아디있냐? 그 사람에 대해서 조금 더 성의 있는, 그런 대답을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은비는 한숨을 토해냈다. 분명히 좋은 사람이었고, 너무나도 착한 사람이었다. 사장님이 그 사람과 그렇게 오랫동안 친구 사이라는 것은 인간으로 보더라도 그렇게 빠지는 구석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끌리지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아 이 남자야! 하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채연아, 너는 첫 눈에 반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그 사람에게 빠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봐?”
“가능하지. 안 될 것은 뭐가 있어?”
“그래.”
“왜? 첫 눈에 반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생각을 하는 거야? 그래서 자꾸만 권선재 씨를 밀어내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은비는 살짝 아랫입술을 물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지만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 사람 정말로 좋은 사람인 것일까?”
“그걸 나에게 물으면 안 되는 거지. 하지만 네가 권선재 씨랑 자꾸만 부딪히고 있잖아. 그러면 네 나름대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아니면 나쁜 사람인지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거 아니야?”
“결론을 내릴 수야 있지.”
은비가 힘 없이 대답했다. 자신이 생각을 하기에 그 사람은 너무나도 좋은 생각이었다. 다만 그것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가질 수 있는 생각인지가 확실하지 않을 뿐이었다.
“엄마, 나 이제 나가서 살까봐.”
“응?”
홍차를 마시던 유자가 화들짝 놀란 눈으로 선재를 바라봤다. 지금 그녀의 아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가서 산다고?”
“왜요?”
“아니, 여태까지 집에서 잘 살다가 갑자기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독립을 한다고 그래? 그냥 있지.”
“저도 이제 나이가 그렇게 어리지 않잖아요. 그리고 요즘 아버지 나이 드시고 나서 저랑 더 많이 부딪히고, 불편해요. 그리고 웃기잖아요. 이 나이 되고서 아직까지 집에서 같이 산다는 게 말이에요.”
“그래서 어디로 들어가려고?”
유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군대에 가 있는 기간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품에서 놓은 적이 없는 아들이었다.
“희준이네 집이요. 희준이 녀석 어차피 그 큰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불쌍하기도 하고, 제 짐도 꽤나 거기로 많이 들어가 있잖아요. 크게 움직일 것도 없고, 새로 집 구할 걱정도 없이 거기가 좋은 것 같아요.”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불편할 텐데, 정 네가 나가서 살려고 하면 내가 바로 집을 알아봐줄게.”
“아니에요.”
선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독립을 하려고 하는 것인데 다시금 어머니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똑같아지는 거잖아요. 어머니 도움 받지 않고 제가 노력을 해서 뭔가를 해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괜히 마음을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집이 없는 것도 아니고 희준이에게 잠시 있다가, 제가 제 돈 가지고 다시 나와도 되는 거고 말이에요. 아직 급한 거 아니에요.”
“네 아버지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속으로는 안 그런 사람들이 겉으로는 어쩌면 그렇게 쌀쌀맞게 구니?”
“그러게요.”
선재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 확실해지면 다시 말씀을 드릴게요. 그러니까 엄마도 아버지께 괜히 이상한 말씀 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저 이 집 나간다는 말씀 들으시면, 제대로 아시지도 않고 역정부터 내실 테니까요.”
“알았다.”
유자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집을 나간다고 하니 영 서운한 것이 아니었다.
‘Rrrrr Rrrrr’
“어라? 선재 네가 전화를 다 하고 무슨 일이냐?”
‘그게 희준아. 내가 부탁이 하나 있어서 말이야.’
“부탁이라고?”
머리를 말리고 있던 희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안 가진 것 없이 다 가진 선재 녀석이 뭘 부탁을 한다는 거지?
“무슨 부탁인데?”
‘나 너희 집에서 신세 좀 지면 안 되겠냐?’
“어?”
희준은 허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떨어뜨렸다. 아니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누가 누구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될 거라고?
“너 그,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네가 왜 나에게 신세를 져? 아니 우리집에 네가 들어온다는 이유가 뭐야?”
‘아니, 은비 씨에게 더 신경을 써야 하는데 우리 꼰대가 알면 분명히 뭐라고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늦게 들어가기도 좀 그렇고 말이야. 그래서 너에게 도움을 좀 받으려고 그러는 건데. 어떻게 안 될까? 월세는 내가 제대로 낼게. 네 친구 살리는 셈 치고 한 번만 제대로 도와줘라.’
“싫다.”
정신을 차린 희준은 재빨리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이 자식과 같이 산다는 것은 분명히 힘든 일이 될 것이었다.
“너 아버지 모르게 사놓은 오피스텔 있잖아? 거기 들어가서 살면 되는 거지.”
‘아니, 안 그래도 내가 거기에 들어가서 살려고 했거든? 그러데 아까 전화를 받아보니까 누가 들어온다고 당장 짐 빼라고 하더라고. 거기서 살면 게다가 우리 아버지가 바로 아실텐데 어떻게 그러냐?’
“대단하다.”
희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여자가 좋다지만 그렇게 좋은 집을 두고 나오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아무튼 나는 싫다. 너 집에 들어오면,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다 쳐진다. 내가 네 성격을 모르냐?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꼬투리를 잡아서 내 숨통을 조이려고 할 거면서, 누구 좋은 일을 시키려고 내가 너를 우리집에 들이냐? 돈도 많은 녀석이니까, 괜찮은 호텔이라도 구하던지.”
‘너는 생각이 없냐? 나 같은 애가 호텔에서 살면 가십거리가 될 거라는 건 당연한 거잖아. 하여간 너는 생각이 많은 척을 하면서도 생각이 없는 것이 큰일이라니까. 차희준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요.’
“됐다.”
희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 녀석과 함께 사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나 너무 불편해. 아무리 우리가 친구라고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 라이프 스타일이 좀 다르냐? 이건 그냥 다른 것도 아니고 무슨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있잖아. 그런데 어떻게 같이 살아? 나는 못 살아. 절대로.”
‘그러지 말고. 응? 친구야. 친구 좋다는 게 다 뭐냐? 너 아니면 나 정말로 큰일난다. 그 여자 마음 잡고 싶다니까?’
“너는 정말로 3주라는 시간 안에 조은비 씨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냐? 그래서 그러는 거야?”
‘돌릴 수 있어.’
선재는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그런 선재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희준은 어이가 없었다. 왜 저렇게 자신만만한 것인지.
“아무튼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 괜히 나에게 도움 받을 생각은 하지 말고.”
‘희준아. 희준.’
희준은 단호히 전화기의 종료버튼을 눌렀다. 하여간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이 녀석이 사랑이라는 것에 빠질 줄은 전혀 몰랐지만. 꽤나 신선한 일이기는 했다. 앞으로 어떻게 굴 지가 더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나쁜 자식.”
선재는 끊겨진 전화기에 대고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하여간 친구라는 녀석이 꼭 필요한 때는 어긋나게 놀고 있었다.
“뭐 그래도 내가 들어가면 들어가는 거지.”
선재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은비야. 나는 네가 되게 부럽다.”
“뭐가?”
“아니 솔직히 생각을 해봐.”
채연이 침대에서 방향을 돌려서 은비를 바라봤다.
“대한민국에서 권선재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아? 그런데 그 사람들을 모두 권선재가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너는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거지. 그것도 제대로 된 선택 말이야.”
“선택은 무슨.”
은비는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끌어올렸다.
“나는 그런 선택은 하나도 고맙지 않아. 그냥 나랑 비슷한 수준의, 같이 있더라도 내가 비교가 되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어.”
“자격지심이야.”
채연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권선재는 은비를 무시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래서 3주라는 시간은 그냥 다 줄 거야?”
“응.”
은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로 준 것이던지, 실수로 준 것이던지, 아무튼 그 사람에게 약속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오롯이 그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 사람이 잘 해준다고 했으니까. 솔직히 나도 궁금해. 그 사람이 내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말이야.”
“돌릴 수 있을 거다.”
“어?”
은비가 고개를 돌려서 채연을 바라봤다. 어떻게 저렇게 확신을 할 수가 있는 것일까?
“내가 그렇게 쉽게 마음이 넘어갈 것 같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권선재 씨가 생각보다 공을 쏟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 정도면 네가 마음을 돌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게 공을 들이는데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너도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
“문제는 무슨.”
“얼음인간인 거지.”
“얼음인간?”
은비는 천천히 채연의 말을 따라했다.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정말 무조건 그녀를 사랑해주는 선재에게 쌀쌀맞게 굴 수 있을까? 끝까지 지금처럼 냉정하게 행동을 할 수가 있는 것일까?
“너 은근히 차가운 대가 있다니까. 그럴 때 보면 너 되게 무섭고 그래. 나까지도 섬뜩하고 그러는데.”
“그거랑 마음이 변하는 걸아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있을 걸?”
“됐어.”
은비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잠을 자야 했다.
“그나저나 채연이 네가 남자친구가 없다니까 신기하네. 내가 너 알면서 남자친구 없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아.”
“그러니까 말이다.”
채연이 안타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꽤나 괜찮은 남자였는데 채연에게서 그렇게 매몰차게 떠날 줄이야.
“그러니까 네가 더 부럽다는 거야.”
은비는 더 말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정말 자신이 부러운 사람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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