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맛있어요.”
“그렇죠?”
“네.”
은비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번 선재가 만찬을 차려주었을 때 수프는 없었다. 그 어떤 양식 보다도 수프를 좋아하는 은비에게 그 점은 꽤나 아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서 열심히 요리를 한 선재에게 수프가 있냐고 차마 물을 수는 없었다. 뒤늦게 먹는 수프는 꽤나 맛있었다.
“세인 씨는 퇴근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은비 씨 지금 안 갈 거잖아요.”
“네?”
은비가 눈을 깜빡이며 세인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은비 씨 지금 알게 모르게 권선재라는 사람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에요? 표정을 보니까 맞는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은비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저 세인 씨가 수프를 줘서.”
“거짓말.”
세인은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은비의 얼굴에는 권선재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고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
“은비 씨는 참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에요. 얼굴에 은비 씨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대로 드러나니까요.”
“내가 그래요?”
“네.”
세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어두운데 은비 씨 혼자 두고 가는 것도 마음이 내키지는 않아서 말이에요. 권선재 씨 오는 거 보고 갈게요.”
“언제 올 줄 알고요?”
“금방 올 걸요?”
세인은 명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가 생각을 하기에 선재가 정말로 은비를 원한다면 금방 올 것이 분명했다.
“나도 언제 올 지를 모르겠는데.”
“남자는 알아요.”
“남자는 안다고요?”
“그럼요. 권선재 씨 은근히 진심으로 보이던 걸요? 평소에 방송이나 스크린에서 보는 것과는 달라요.”
“진심으로 보여요?”
“네.”
세인은 살짝 걱정스러운 눈으로 은비를 살폈다.
“그러면 지금 은비 씨는 권선재 씨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진심인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는 거예요?”
“네.”
은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을 하면 되게 부끄러운데, 제가 연애라는 것 자체를 이번에 처음 하게 될 것 같아서요.”
“네?”
세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학교도 졸업을 했다고 들었는데, 연애라는 것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어떻게 그래요?”
“뭐가요?”
“아니, 은비 씨가 지금 나이가 몇 개인데 한 번 연애도 못 해요? 그게 지금 말이나 된다고 생각을 해요?”
“말이 안 될 건 또 뭐예요.”
은비가 다시 되묻자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또 안 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연애를 안 할 수도 있지.
“그럼 좋아한다고 한 사람이 권선재 씨가 처음이에요?”
“네.”
“이거 난감하네.”
세인은 팔짱을 꼈다. 첫 연애가 이루어지기 힘든, 아니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남자와의 연애가 될 수도 있다니.
“왜 여태까지 연애를 안 했어요?”
“필요가 없었어요.”
“필요가 없었다고요?”
“네. 학창시절에는 공부를 하느라 열심히였고,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어요. 학생이니까 공부가 가장 중요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졸업까지 하고 나니까 공부만 한 것이 살짝 후회가 되기도 해요.”
“후회가 되야죠.”
“네?”
은비는 눈을 크게 뜨고 세인을 바라봤다. 후회가 되야 한다니? 그러니까 연애는 꼭 해야 한다는 말인가?
“연애를 하면서 사람은 크는 건데.”
“사람이 크는 거라고요?”
“은비 씨 어딘지 모르게 맹하고 착한 것이 다 은비 씨가 어른이 되지 않아서 그런 거였구나.”
“어른이 아니라고요? 저 어른이에요.”
“쿡.”
세인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사랑스러운 눈으로 은비를 바라봤다. 이 여자가 가지고 있는 어딘지 모르게 착한 느낌은 바로 거기서 오는 거였다.
“은비 씨. 사랑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냥 어린 아이일 수 밖에 없어요. 사랑이 좋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에요.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그 사람은 어른이 되는 거예요. 아픈 것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 생채기가 단단히 굳어서 한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있는 디딤돌이 되는 거죠.”
“어려워요.”
“그럴 리가.”
세인은 가만히 은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말을 듣고보니 더더욱 선하게 은비가 보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권선재 씨가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아니 그렇게 많은 연예인을 두고, 왜? 평범한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는 걸까? 그런데 지금 보니까 권선재 씨의 눈이 그 어떤 사람보다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네요. 이렇게 순수한 사람이니까. 그 소중한 사랑을 처음 이루어주고 싶을 수도 있겠어요.”
“어려워요.”
은비는 살짝 입을 내밀었다. 이 남자 좋은 남자라고 생각을 했는데 은근히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아 미안해요.”
세인은 재빨리 양손을 모았다.
“아무튼 은비 씨는 그 남자를 만나면 서로 좋을 거예요.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의지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어 조은비 씨!”
“사장님.”
세인과 은비는 황급히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희준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의 곁으로 걸어왔다.
“아직 퇴근을 안 했어요?”
“조은비 씨가 권선재 씨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아.”
희준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선재가 은비의 여우가 되는 것일까? 매일 같은 시간에 오는 어린왕자의 여우처럼?
“기, 기다린 거 아니라니까요.”
“사장님도 얼굴에 보이시죠?”
“뭐가요?”
“조은비 씨 얼굴에 딱 써있잖아요. 나 조은비는 지금 권선재라는 남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풉.”
은비의 얼굴을 살피던 희준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세인의 말처럼 정말 얼굴에 쓰여있었다.
“진짜네.”
“사장님!”
“선재 지금 오고 있대요. 촬영이 길어져서 조금 늦은 모양이더라고요. 얼마나 급했던지 나에게 전화를 해서 은비 씨를 잡아 놓고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은비 씨에게는 늦은 거 티를 내지 않고 싶은 모양이에요.”
“아.”
은비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 남자는 역시나 자신을 먼저 배려를 해주는 사람이었다. 따뜻하기는 했다.
“사장님은 저녁 드셨어요?”
“샌드위치.”
“에? 그게 밥이 되요. 세인 씨 수프 더 있어요?”
“있죠.”
“한 그릇만 사장님 드려요.”
“됐어요.”
희준은 재빨리 양손바닥을 보였다.
“아니에요. 사람이 밥심으로 살아야 하는 거죠. 여기는 밥도 없으니까, 아쉬운데로 수프심으로 버텨야죠. 사장님 안 계시면 저희들 일자리는 다 없어지는 거니까 말이에요. 그러니까 드세요.”
“듣고 보니까 그러네요.”
세인도 미소를 지으면서 은비의 말을 거들었다.
“사장님 앉으시죠. 아까 보니까. 식사도 제대로 안 하고 계시던데 말이에요. 제가 금방 가져올게요.”
“이거 이렇게 신세를 져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어차피 사장님이잖아요. 기다리세요.”
세인이 멀어지자 희준은 가만히 은비를 바라봤다.
“선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아니에요. 세인 씨가 장난을 치느라 일부러 짓궂게 말을 한 거예요. 권선재 씨 기다리고 있던 것이 아니라, 그냥 급하게 퇴근을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거니까 말이에요. 그나저나 사장님은 왜 아직도 퇴근을 하지 않으신 거예요? 저는 아까 사장님께서 퇴근을 하신 줄 알았는데.”
“이것저것 신경을 쓸 것이 많아서요. 그런데 은비 씨가 먹기에도 우리 쉐프의 요리가 별로라고 생각이 되나요?”
“네?”
은비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희준을 쳐다봤다. 평소에 그렇게 레스토랑에 자부심이 많던 사람이 왜 이런 것을 묻는 것일까?
“권선재 또 맛이 없다고 긁고 간 거예요?”
“아니요.”
희준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냥 쉐프가 만드는 요리보다 우리나라 요리사들이 만드는 요리가 더 잘 나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쉐프를 자르시게요?”
“모르죠.”
“제가 이런 말 할 주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요. 제가 생각을 하기에 주방 사람들이 요리를 잘 하는 이유는 바로 쉐프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쉐프가 있으니까 다들 믿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쉐프가 없다면 사람들이 안정감을 가지고 요리를 할 수는 없을 거예요.”
“맞아요.”
“세인 씨.”
세인이 미소를 지으며 희준의 앞에 수프를 내려놓았다.
“은비 씨 주방에서 접시만 깨는 줄 알았는데 이것저것 보는 것이 은근히 많은가 보네요. 사장님께서 생각을 하시기에, 쉐프의 솜씨가 부족하다고 생각을 해서 그만 두게 하고 싶으신 거라면 당연한 거겠지만, 그런 건 아니잖아요. 제가 생각을 하기에 이건 사장님께서 더 고집을 피우셔야 하는 부분으로 보여요.”
“그런가?”
희준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듣고 보니 쉐프를 자르는 것은 아직 이르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은비가 이런 저런 생각도 하고 있다는 것이 꽤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주방에서 그냥 임시로 있는 거 아니었어요?”
“맞아요.”
은비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귀엽게 혀를 내밀었다.
“하지만 아무리 임시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잖아요. 혹시 제가 말을 해서 사장님 기분이 상하셨나요?”
“아니요.”
희준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ㅅ인 씨는 계약직이라서 매일 칼 같이 퇴근을 하면서, 어떻게 오늘은 늦게까지 있네요?”
“위로할 사람이 있어서요.”
“응?”
수프를 먹던 희준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세인을 쳐다봤지만 은비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세인 씨. 설마?”
“뭐.”
“두 사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아닙니다.”
희준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은비는 살짝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별다른 것이 아니겠거니 생각을 하며 관심을 껐다.
“죽어도 연장은 안 해?”
“게다가 아까는 감독님께 얼마나 심하게 말을 했는데요.”
주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독은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했지만 드라마 국장이 주연을 예뻐라 하는 것이 눈에 그대로 보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아까는 감독님께 드라마 안 찍는다고 했다니까요?”
“그게 무슨.”
국장의 얼굴이 구겨지자 주연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감독님께서 그 씬은 거기까지만 찍고 마시더라고요.”
“감독. 이게 사실입니까?”
“사실이기는 한데.”
앞뒤를 다 자르고 들으니 선재가 일방적으로 잘못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NG가 지나칠 정도로 많이 나서 말입니다. 오늘 원주연 씨가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NG를 많이 내더군요.”
“그래도 그렇지.”
국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이번 연장을 유일하게 반대를 하는 사람도 권선재 씨라는 이야기죠?”
“네.”
감독의 말에 국장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배우라고 그러는 것인지 요즘 들어 건방지게 굴고 있는 것 같았다.
“권선재 씨는 그래서 바로 집으로 간 것입니까?”
“아, 네.”
그리고 그 상황에 대신 봉변을 당하고 있는 것은 매니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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