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물도 맞추는 남자, 밥물도 못 맞추는 여자
9
“오래 기다렸어요?”
레스토랑에 숨을 헐떡이며 들어오는 선재를 보고 은비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얼마나 서둘러서 달려온 것인지,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사장님도 같이 있었고, 같이 일을 하는 이세인 씨도 함께 있었어요. 그래서 별로 기다리지 않았어요.”
“그래요?”
선재는 그제야 자세를 잡으며 여유롭게 걸었다.
“희준이 자식은요?”
“잠시 사무실서 가지고 올게 있다고요.”
“누가 왔어요?”
“아 세인 씨.”
주방에서 한 남자가 나오는 것을 보자 선재는 미간을 모았다. 꽤나 곱상하게 생긴 데다가 키도 그리 작지 않은 사내였다.
“누구?”
“아, 저랑 같이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요리사인 이세인 씨에요. 권선재 씨를 기다리고 있다니까 심심하지 않도록 함께 있어줬어요.”
“그래요?”
선재가 자신을 경계를 하자 세인은 엷게 미소를 지었다. 이 남자가 왜 자신을 경계하는 지가 너무나도 쉽게 보였다.
“권선재 씨 그렇게 긴장을 할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무슨 이야기들 하고 있어?”
“아, 희준아.”
선재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너는 은비 씨가 있다고 하면 당연히 전화를 해야지, 왜 여태까지 전화도 안 하고 있어?”
“아, 맞다.”
희준은 손을 튕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희준의 능글맞은 태도에 선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니까 네 차 나왔더라?”
“응. 나왔어.”
“그럼 나는 은비 씨만 픽업해서 간다.”
“치사한 놈. 가라 가.”
선재는 은비의 손을 잡았다. 은비는 재빨리 뒤를 돌아서 세인을 향해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오늘 놀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뵈요.”
“내 잘가요.”
세인은 두 사람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선재 씨 기다린 거 아니라니까요. 세인 씨가 맛있는 수프를 줘서 그거 먹고 있었을 뿐이에요.”
“거짓말.”
선재의 장난스러운 미소에 은비는 그냥 가만히 웃음을 지었다. 이 남자가 하는 짓이 그렇게 밉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오늘은 왜 늦게 온 거예요?”
“원주연이라고 알아요?”
“알죠. 예쁜 여배우. 그런데 그 사람이 왜요?”
“NG를 얼마나 내던지. 오고 싶어서 난리가 났네. 그래서 많이 기다렸나 보네요. 내가 뭐 했는지 궁금한 거 보니까.”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은비의 얼굴을 슬며시 보면서 선재는 빙긋 웃었다.
“너 이제야 퇴근을 한 거야?”
“어. 조금 늦었지?”
“조금?”
컴퓨터에 편하게 앉아서 맥주를 들이키던 채연이 시계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시간이 퇴근 시간보다 다섯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여태까지 권선재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걸까?
“너 태도가 되게 애매하다.”
“어? 뭐가?”
“너 권선재 씨 싫다며.”
“내가 언제 싫다고 했나?”
은비가 코트를 벗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은비의 태도를 보면서 채연은 코웃음을 쳤다. 하여간 순진한 척을 하면서 막 빼더니, 막상 또 어떤 사람이 좋다고 하니 마음은 좋은 모양이었다.
“내일 그럼 그 사람하고 데이트를 하는 거야?”
“어? 응.”
시간을 보니 벌써 그 남자와 데이트를 하는 하루가 다가왔다. 첫 번째 하루, 과연 어떤 느낌일까?
“기대되지?”
“기대가 되기는.”
은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는 채연의 표정은 꽤나 장난스러웠다.
“계집애. 너 그렇게 안 숨겨도 돼. 나도 누가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하면 마음에 안 들던 사람이라도 금방 반할 것 같아. 너무 좋겠다.”
“됐어. 나 씻을게.”
“그래.”
‘딩동’
“이 시간에 누구지?”
얼굴에 팩을 붙이던 채연이 인터폰을 보고는 당황해서 재빨리 얼굴에서 마스크팩을 떼어냈다.
“무슨 일이야?”
“그, 그 사람.”
“그 사람?”
머리를 대충 말리던 은비는 모니터를 확인하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에 보고는 왜 또 온 거지?
‘딩동’
“안에 있는 거 알아요.”
“야, 조은비.”
“알았어.”
은비는 낮게 심호흡을 하고 인터폰을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지금 00시잖아요. 우리 첫 번째 데이트를 할 시간. 조은비 씨가 나에게 24시간을 준다고 했으니까 지금부터 데이트를 해야 하는 거잖아요.”
“네?”
은비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선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간에 데이트를 하자고 오다니.
“저 지금 막 들어왔는데.”
“알아요. 그래서 일부러 씻을 시간을 주고 있었던 건데. 나는 오늘 방송 하루 빼느라 완전 고생을 했거든요. 나오죠.”
“잠시만요.”
은비는 인터폰을 내려놓고 낮게 한숨을 토해냈다.
“뭐래?”
“지금 데이트를 하러 나오라고 하네.”
“에? 지금?”
채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문을 바라봤다. 도대체 어떤 남자가 이 늦은 시간에 데이트를 하러 온다는 것인가?
“너 그래서 나갈 거야?”
“아니, 그래도 사람이 찾아왔는데.”
“돌려보내야지. 이 시간에 도대체 데이트를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너는 그렇게 애매하게 행동을 하고 그러니? 네가 미안해서 못 말을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 지금 이 시간에 데이트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
“알았어. 내가 할게.”
은비는 낮게 한숨을 토해냈다.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선재가 워낙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하던 24시간이라는 것이, 기대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도 거짓일 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데이트를 한다는 것은 확실히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
“저기.”
“왜요?”
“지금은 좀 그렇지 않나요? 너무 늦은 시간인데.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데이트를 하는 건 어때요?”
“그건 좀 그런데.”
선재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역시도 은비에게 피해가 가고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잠시 얼굴이라도 보죠.”
“알았어요. 잠시만요.”
은비가 인터폰을 내려놓자 채연이 바로 그녀를 바라봤다.
“뭐래?”
“잠깐 얼굴이라도 보자고 그러네.”
“이 늦은 시간에? 게다가 너 추위도 엄청나게 잘 타잖아. 오늘 나가면 너 감기 바로 걸릴 거야.”
“잠깐인데 뭐.”
은비는 미소를 지으면서 외투를 걸쳤다.
“하여간, 잠시만.”
“왜?”
잠시 방에 들어갔던 채연은 목도리와 장갑을 꺼내와서 은비에게 건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도대체 착한 것인지 맹한 것인지. 사람에게 상식이 어긋나는 일을 하면 당연히 거절을 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얘는 그러한 것도 없었다. 이렇게 옆에서 보지 않으면 답답하게 다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았다.
“밖에 추워.”
“금방 다녀온다니까.”
“잠시라도.”
채연은 살짝 은비의 머리를 밀었다.
“너 그러고 보면 다 거짓말이야. 권선재 씨 남자로 생각을 한 적 단 한 번도 없다고 해놓고서는, 지금 보니까 남자로 엄청 생각을 하고 있네.”
“내, 내가 뭘.”
“내가 뭘?”
채연이 코웃음을 치자 은비도 미소를 지으면서 검지로 코 아래를 비볐다. 요 근래 조금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알기 시작한 은비였다. 끌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으로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금방 다녀올게.”
“나 안 자고 기다린다.”
“자. 알았지? 늦을 지도 몰라.”
문을 열고 나서는 은비를 보면서 채연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쟤가 행복하게 되는 것인가?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여기.”
“짜증나.”
은비가 살짝 입을 내밀자 선재는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다른 여자들은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그가 깜짝 방문을 해주면 즐거워 하고 좋아했었는데, 이 여자는 확실히 다른 사람하고는 달랐다.
“기분이 나빠요?”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라 솔직히 당혹스럽죠. 이게 무슨 데이트야? 한밤에 그냥 일방적으로 소환하는 거지.”
“어허. 소환이라니요.”
선재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면서 검지를 좌우로 저었다.
“분명히 내가 은비 씨에게 3번의 데이트 기회를 달라고 했을 때, 그 시간은 00시부터 24시라고 이야기를 했었잖아요. 그리고 은비 씨는 그때 내가 한 이야기에 동의를 했었던 거고 말이에요.”
“거듭 말하지만 동의를 한 적은 없어요.”
은비는 팔짱까지 끼면서 새초름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그때는 정말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올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죠. 그래서 지금부터 24시간 데이트를 하자고요?”
“네.”
“네?”
선재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자 은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정말 지금 데이트를 하자는 거예요?”
“그럼요.”
“잠깐 얼굴을 보자고 한 거잖아요.”
“그렇게 안 하면 나오지도 않을 줄 알았죠.”
선재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면서 은비는 어이가 없었다. 이 남자 그저 정공법으로만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귀여운 짓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24시간을 버티는 것은 확실히 무리였다.
“나 지금 진짜로 피곤한대.”
“심심하면 바로 집에 들어가게 해줄게요.”
“네?”
“내가 24시간 안 졸리게 해주겠다는 이야기에요.”
이 남자는 절대로 아니야. 라고 머리에서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음은 묘하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연예인이라는 것, 작가라는 것, 절대로 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 이것 세 가지를 빼면 그 역시도 평범한 남자였다.
“대신 지루하면 바로 집에 들어갈 거예요.”
“세 번.”
선재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손가락을 세 개 펴서 은비에게 보였다. 은비는 그를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세 번이라는 것이 무슨 말이에요?”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실수도 할 것을 생각을 해서 세 번의 기회를 달라는 거죠.”
“말도 안 돼.”
은비가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세 번이나 지루하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면 하루라는 시간이 다 가겠네요. 그런 법이 어디에 있어요?”
“한 남자가 한 여자가 이렇게 좋다고 쫓아다니는데, 그 정도 해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내 어려운 일이에요.”
선재는 빙긋 미소를 지으면서 가만히 은비를 바라봤다. 떽떽 거리는 것 역시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보이는 여자였다.
“아무튼 그러면 오케이죠?”
“알았어요. 그럼 저 잠시 집에 좀 다녀올게요.”
“집은 왜요?”
“옷은 갈아입어야죠.”
그제야 선재는 은비의 옷이 보였다. 편한 차림에 외투만 걸친 모습이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어디에 나가기에 부족한 옷차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람들 눈에 그렇게 띄는 곳은 아닐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선재가 자랑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를 믿어요.”
은비는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으면서 선재가 내미는 손을 마지못해 잡았다.
“그런데 정말 믿어도 되는 거예요?”
“물론이죠.”
선재는 눈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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