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물도 맞추는 남자, 밥물도 못 맞추는 여자
10
“내가 태어나서 이렇게 재미 없는 데이트를 하게 될 줄이야.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최고라는 남자한테서.”
“아, 거 좀 조용히 좀 합시다.”
선재는 미간을 잔뜩 모으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희준이 녀석에게 레스토랑을 열어 놓으라고 분명히 말을 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레스토랑의 문은 닫혀 있었으며, 심지어 희준이 자식은 전화도 받지 않고 있었다.
“가까운 패스트푸드 가게라도 가요.”
“그게 음식입니까?”
“그럼 음식이죠.”
“말도 안 돼.”
선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무엇이 들어갔는 지도 모를 패티에, 맛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수많은 소스들이 뿌려진 그 음식들. 대충 기름에 튀겨서 원래 어떤 모양인지도 파악을 할 수도 없는 것들은 음식이 아니었다.
“조은비 씨 명심하세요. 그러한 것들은 음식이 아니에요. 그저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한 쓰레기라고요.”
“그럼 그걸 먹는 사람들은 뭐예요?”
“무지한 사람들.”
“하여간 제 멋대로라니까.”
은비는 살짝 입을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기대가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디를 가기에 이렇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그래서 이제 어디를 가려는데요?”
“밥 먹으러요.”
“이 시간에 문을 연 식당이 어디에 있어요?”
“희준이 한테 갈 겁니다.”
“사장님 전화 안 받으신다면서요?”
“그 녀석 집에요.”
“네?”
은비는 뜨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선재를 바라봤다. 아무리 친구가 지키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늦은 시간에 갑자기, 그것도 불청객인 자신까지 찾아가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저는 안 가요?”
“이번에는 또 왜요?”
“그거 민폐잖아요. 이 늦은 시간에 다른 사람의 집에 가는 거 잘못된 거라는 거 안 배워요? 이건 우리 같은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상식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는 상식인 것 같은데요?”
“그거 상식 아니에요.”
선재는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언제 어느 시간에 남의 집에 쳐들어가도 된다고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은비 씨는 걱정을 하지 마세요.”
“아니, 그건 권선재 씨의 상식이니까 그러죠. 내 상식으로는 절대로 그러면 안 되는 거라니까요? 그러면 사장님이 화를 내실 것이 분명하다고요. 이 늦은 시간에 가는데 화 안 내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화 낼 겁니다.”
“네?”
너무나도 쉽게 대답을 하는 선재의 태도에 은비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이 사람 혹시 변태인가? 상대방이 싫어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을 할 수가 있지?
“그런데도 가는 거예요? 사장님께서 싫어하실 거라고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그러면서도 가는 거라고요?”
“그 놈의 사장님 소리. 은비 씨 사장인 건 알겠는데요. 그래도 퇴근도 하고 나서 꼬박꼬박 사장님 사장님 그 소리 좀 안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밖에서는 차희준 씨. 이렇게 부르면 좋잖아요.”
“어떻게 그래요.”
“뭘 어떻게 그래요에요? 그것도 은비 씨 같은 사람들의 상식인가? 밖에서도 상사 대우를 해주는 것이?”
“무슨 말이 그래요.”
“아니 이해가 안 가니까 그런 거죠.”
선재는 살짝 미간을 모았다. 은비가 그 녀석과 같이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렇게 계속 희준이 자식을 사장님, 사장님 하니까 괜히 신경질이 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은비가 희준이 녀석에게 미소만 지어주더라도 금방 은비의 얼굴을 자신에게 돌리고 싶었다.
“은비 씨도 보였죠? 저랑 희준이 그 자식 사이. 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는 아니라는 거 말이에요.”
“뭐. 약간은?”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가도 되는 거예요. 서로 투닥거리기는 하는데 언제 어느 순간에나 마음을 열어줄 수 있는 사이이거든요.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아무리 이른 시간이라도. 언제나 찾아가도 괜찮은 친구 사이 말이에요. 그리고 너무 미안하게 생각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별장이 있었을 적에는, 그 자식이 나에게 말을 하지도 않고 거기를 엄청나게 썼거든요?”
“별장이요? 별장도 있어요?”
“뭐, 별장은 아니고.”
선재는 미소를 지으면서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은비가 미안해 하는 마음도 아예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생각을 해보니까. 은비는 희준에게 사장님이라는 말 밖에 하지 못할 정도로만 친했다. 두 사람은 그냥 무지막지하게 친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어색한 사이라면 미안해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선재는 상황이 조금은 달랐다. 그와 희준은 언제 어느 순간 찾아가더라도 서로를 내쫓거나 밀친 적이 없는 사이였다. 거의 선재가 희준에게 찾아가기는 했었지만, 희준은 늘 미소를 지으면서 선재를 맞았다. 너무나도 고마운 친구이기에 더 막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늘 웃어주는 좋은 녀석이었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마음을 붙일 수 없는 선재가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가식적으로 보일 필요도 없었고, 있는 그대로 그를 보여주면 되는 거였다.
“다 왔다.”
“우와.”
창밖을 내다보던 은비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대한민국에 이런 집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으리으리한 건물이었다. 밖에서 보면 그냥 빌딩으로만 보일 것 같은데 주차장도 있고 경비실도 있는 것을 보니 사람이 사는 곳이긴 한 모양이었다. 얼핏 봐도 으리으리 했다.
“사장님도 잘 사나봐요.”
“이게 잘 사는 건가?”
경비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며 선재는 성의 없게 대답했다. 은비는 그런 선재를 한 번 노려보더니 곧 시선을 돌렸다.
‘Rrrrr Rrrrr'
“흐음.”
희준은 대충 전화기를 들어 액정을 확인했다. 망할 자식. 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전화기를 저 아래에 던졌다. 이 녀석은 또 이 늦은 시간에 왜 또 전화를 하고 있는 거야? 희준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Rrrrr Rrrrr'
“음.”
무시를 하려고 베개 밑에 머리를 박았다. 저 벨 좀 안 울렸으면 소원이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벨은 멈추었다. 이제 끝인가 하고 잠에 좀 빠져들려는 찰나.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Rrrrr Rrrrr'
“아 씨.”
그제야 생각이 났다.
“아 레스토랑!”
희준은 재빨리 배터리를 분리했다. 그 녀석 성질이라면 날뛰어도 그냥 날뛰지는 않을 거였다. 하지만 내일로 일단 미루고 싶었다. 이 늦은 시간에 봉변을 당하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아, 차희준 망했다.”
희준은 털썩 침대에 주저 앉았다. 목이 탔다. 절대로 안 된다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애매하게 의사를 표현한 것이 문제였다. 분명히 레스토랑에도 해코지를 해놓았을 것만 같았다. 멍청한 차희준. 희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내일 어떻게 하냐?”
다시 잠을 자려고 했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권선재의 성질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쉽게 잠을 잘 수는 없을 거였다. 그렇게 한참을 잠도 자지 못하고 선재의 얼굴을 어떻게 대하나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딩동’
“응?”
처음에는 장난으로 누가 벨을 누르는 줄 알았다.
‘딩동 딩동’
하지만 점점 더 신경질이 더해지는.
‘딩동 딩동 딩동’
미친 듯한 초인종 소리.
“야 차희준 문 안 열어!”
그리고 결정적으로 선재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니 희준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토해냈다. 모른 척 하고 싶었지만 같은 라인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희준은 터덜터덜 현관으로 가 문을 열었다.
“선재야 미안하다.”
“미안할 거 아는 자식이.”
그 순간 잠시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꺄악!”
비명 소리가 들렸다.
“죄, 죄송해요.”
“아닙니다.”
혼자 살기에 늘 삼각 드로즈만 입고 자던 희준은 얼굴이 붉어져서 제대로 은비의 눈도 보지 못했다. 선재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오케이, 차희준 저 녀석은 이제 은비 씨에게 함부로 접근하지는 않겠군.
“이 늦은 시간에 여기는 웬일이냐?”
“밥 먹으러 왔다.”
“밥?”
희준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시계를 봤다. 이미 두 시가 훌쩍 지난 시각이었다. 이 시간에 밥을 먹다니.
“너 미친 거냐?”
“내가 미친 걸로 보이냐?”
“어.”
“그럼 미쳤나 보네.”
선재는 이죽이며 희준의 앞, 그러니까 은비의 옆자리에 앉았다.
“내가 오늘 좋아해서 정말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은 여자를 데리고 아주 특별한 데이트를 해주려고 했거든? 그런데 첫 단계에서 이 여자가 화를 내는 바람에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졌단 말이야? 그래서 두 번째 단계에서 한 번 점수를 만회를 해보자. 그렇게 생각을 했단 말이야.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 가장 소중한 친구께서 오케이까지 내려주셨으니까 더욱 말이지.”
“아니, 내가 언제 오케이를 했냐? 애매모호하게 말끝을 흐렸지. 사람 뜻 그렇게 곡해하면 안 되는 거다.”
“아무튼.”
선재는 사나운 눈으로 희준을 바라봤다. 평소에 싱글거리던 놈이 저러니까 은근히 더 긴장이 되었다.
“너는 오늘 나에게만 실례가 가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레이디에게도 실례가 가는 행동을 했다는 거다.”
“아우, 그만해요.”
은비는 살짝 눈을 흘기면서 선재를 타박했다.
“지금 이 시간에 자는 사람 갑자기 깨우는 것이 더 민폐라니까요. 사장님. 늦은 시간에 갑자기 와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희준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은비 역시 이곳에 오고 싶은 생각은 없었을 것이었다. 그저 선재 자식에게 끌려온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여기서 밥 어떻게 먹게?”
“내가 하려고.”
“네가?”
“응.”
희준은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까탈스럽게 요리를 하는 것을 보면 어떤 여자가 좋아할까?
“우리 집에 아무 것도 없어.”
“어?”
선재는 당황하며 희준의 냉장고를 열었다. 각종 건강 음료를 제외하고는 우유와 달걀이 전부였다.
“너 내가 그렇게 냉장고 채워 두라고 했는데도 친구 말 깡그리 무시하냐? 밥은 먹고 다녀야 한다니까?”
“식당 주인이 자기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되지. 뭐 하려고 집에서까지 밥을 하느라 고생을 하냐? 잘 하지도 못하는 요리를 하느라 고생을 할 시간이 있으면 레스토랑 경영에 대해서 하나라도 더 배우련다.”
“대단하시네.”
이곳저곳 뒤진 선재의 손에 들린 것은 라면 두 개와 달걀 두 알이 전부였다. 선재는 한숨을 내쉬어싿.
“내가 라면은 몸에 안 좋으니까 줄이라고 했잖아. 어떻게 집에 먹을 것이 라면 하나 밖에 없냐?”
“그거라도 있는 게 어디야?”
“아유. 됐다.”
희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녀석의 잔소리는 한 번 시작을 하면 끝이 날 줄을 모르는 잔소리였다.
“은비 씨 라면 괜찮아요?”
“네? 네.”
은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재는 냄비를 꺼내더니, 또 한참 무엇을 찾아서 부시럭거리고 있었다.
“또 뭐 찾아?”
“비커.”
“그런 게 우리집에 있을 리가 있냐?”
“에? 비커도 없어?”
“비커는 왜요?”
“왜라니?”
선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은비를 바라봤지만, 은비는 오히려 더 순진한 눈으로 선재를 바라봤다.
“비커가 왜 필요한 건데요?”
“라면을 끓여야 하니까.”
“에? 라면을 끓이는데 비커가 왜 필요해요? 그냥 대충 냄비에 물 붓고 끓이면 되는 거잖아요.”
“저 녀석은 그래요.”
희준은 실소를 흘리면서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은비는 그런 희준을 보며 의하한 표정을 지었다.
“선재 씨는 원래 그런다고요?”
“저 녀석은 라면 물도 맞추는 놈이거든요. 어쩌면 그렇게 까칠하게 맞추는지. 심지어 스톱워치 가지고 시간까지 쟤 가면서 물을 끓이고 있는 놈이라니까요. 정말 징글징글한 놈이에요.”
“말도 안 돼.”
은비는 놀란 눈을 하고 선재를 바라봤다. 선재는 아직도 종이컵을 찾아서 이리저리 해매고 있었다.
“그냥 끓이라니까요.”
“안 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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