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그 혹은 그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 혹은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 하지만 나와 그 혹은 그녀는 서로를 사랑한 적은 없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법대로 각자의 사랑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그 혹은 그녀의 사랑을 기다렸지만, 그 혹은 그녀 역시 나의 사랑을 기다리는 쪽이었다. 나와 그 혹은 그녀는 나와 그 혹은 그녀일 뿐이었지 절대로 우리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단 한 번도 그 혹은 그녀를 떠올린 적이 없었다. 아니, 그 혹은 그녀를 떠올릴 쉼 같은 것이 나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나와 그 혹은 그녀는 이제 너무나도 멀어진 세상에서 존재하는 별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것은 미워한다는 말 같은 것으로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와 그 혹은 그녀는 서로를 미워한 적은 없으니까. 그저 서로에게 일어난 일들이 너무나도 어마어마해서 서로를 마주할 수 없었음을. 다시는 서로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음을 얘기할 따름이라. 나는 그 혹은 그녀를 삶의 쉼 같은 곳에서나 겨우 떠올릴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약간의 시간 역시 나에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그 혹은 그녀와 헤어진 후 다시 만난 곳은 광화문이었다. 나는 경복궁역에서 교보문고를 향해서 가는 중이었고, 그 혹은 그녀는 교보문고에서 광화문 쪽으로 오는 길이었다. 우리는 의경 앞에서 반가운 표정을 지은 채 손을 흔들었다. 나는 조금만 서둘렀더라면 교보문고에서 그 혹은 그녀를 만날 수 있었을 거라고 반갑게 말했지만, 그 혹은 그녀는 애매한 미소를 지은 채로 그 큰 책방 안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겠느냐 반문했다. 나는 그 혹은 그녀의 말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며 커피라도 하자 물었지만, 그 혹은 그녀는 그럴 시간이 없다고 바쁘다며 다음에 만나자는 약속만 남긴 채로 멀어졌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걸음이었지만 굳이 잡을 까닭도 없었다. 나 역시 나의 목적지가 있었고 그 혹은 그녀에게도 가야 할 곳이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미련을 둔 채로 나는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그런데 나와 그 혹은 그녀는 만나야만 하는 인연이었던 것인지, 그러고 나서 교보문고에서 마주했다. 커다란 서점에서 같은 시간에 만날 일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건만 나와 그 혹은 그녀는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먼저 알은 채를 하자 그 혹은 그녀의 눈에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묻어났다. 하지만 이내 밝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이 이리도 좁은 곳인지 몰랐다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대충 지껄이고 나니 어느새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할 말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혹은 그녀를 이대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 아무런 기약도 할 수 없었고, 이미 나에게는 그 혹은 그녀의 연락처가 깨끗이 지워져버린 후였고 머릿속에서도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렇게 주절주절 몇 마디를 더 떠들고 나니 그 혹은 그녀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나는 그 혹은 그녀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지만,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나 혼자만의 의지로 그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자는 말을 하니 그 혹은 그녀는 밝은 표정을 지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망스러웠으나 그 혹은 그녀를 원망할 일은 아니었다. 마음에도 없는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남긴 채로 나와 그 혹은 그녀는 헤어져야만 했다. 서로에게 물어볼 말이 많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서로에게 물어볼 말이 많은 것이 아니라 내가 그 혹은 그녀에게 물어볼 말이 많은 거였다. 그 혹은 그녀는 더 이상 나에게 아무 것도 궁금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속이 상하고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그것을 그 혹은 그녀에게 내색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 혹은 그녀가 아는 것은 원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내가 이런 것을 하나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혹은 그녀는 이미 나의 모든 것을 알았으리라. 그래도 나와 그 혹은 그녀가 보낸 시간이 있으니 그 혹은 그녀는 이미 나의 모든 것을 다 보고 있었을 거였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2
나는 교보문고에서 너를 만났다. 나의 상기된 얼굴에 너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었지만 나는 아무 일도 없었노라 거짓을 고했다. 너는 나의 얼굴을 보며 그저 사람 좋은 듯 웃었지만, 나는 그런 너의 웃음이 불편했다. 너에게 거짓을 고하는 나를 견디는 것도 너무 역겨워 자리에서 일어나니 너는 나보다 더 빠르게 일어섰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묻는 너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로 거리로 나섰다. 햇살은 광장에 내리쬐고 더 이상 관심을 받지 못하는 추모의 공간은 마치 투명한 무엇처럼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나는 너의 외침을 무시한 채 오는 버스를 타버렸다. 너는 내게 무언가 할 말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더 이상 할 말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무언가가 소진되어 버린 후였다. 이곳에서 뭔가 더 이야기를 해서 억지로 불을 붙인다고 해서 그것이 다시 타오를 거라는 기대를 갖는 것 자체가 우스울 거였다. 하얗게 타버린 재에서 더 이상의 불씨는 찾을 수 없었고, 그나마 날리는 불티 정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 불티가 마치 불씨라도 되는 양 불어버렸고 그 불티는 까부라지며 하늘로 날렸다.
나에게 광장이라는 곳은 죽음의 장소였다. 사람들의 소리 없는 통곡이 들리는 장소였고, 그곳을 지나칠 적마다 나는 알 수 없는 마음의 부채에 답답함을 호소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를 보고 안쓰럽다거나 하는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선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고, 가여운 이들을 외면할 수 없는 존재일 따름이었다. 그저 내가 그들이 거기에 있음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곳은 모두에게 추모의 공간이었으며 거대한 슬픔의 공 같은 것이었다.
너를 만나는 것도 나에게는 마찬가지의 느낌이었다. 나는 너의 얼굴을 보고 웃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울 수도 없었다. 나에게 너는 불편한 존재였으며 같이 한다고 해서 마주하면 반가운 채 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허나 너는 아니었다. 너는 나를 보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고 나를 반겼다. 그 모습에 나는 목구멍에 역겨움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너는 나를 여전히 사랑하는 척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이전과 지금 너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 역시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으니 우리 둘의 관계가 이렇게 흘렀으리라. 나라도 조금이라도 달라졌더라면. 나라도 너와 다른 모습을 지녔더라면 우리의 모습은 지금보다 조금은 더 세련된 무언가가 되었을 수 있을 거였다. 하지만 나는 너에게 그런 세련된 모습을 보여줄 이유도 없었고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런 것은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소위 요즘 아이들이 말하는 쿨한 것과 더 가까운 모습이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런 쿨함은 오히려 불편함을 숙이는 가식적인 것이었다. 너의 그 잔혹한 미소가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면, 나의 그 가증스러운 웃음은 너의 입을 막고 있었으리라. 너는 많은 말을 지껄였지만 정작 내게 물어보고 싶은 것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을 리라.
가슴에 반짝이는 노란 리본이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고 나는 아무 것도 달려있지 않은 나의 가방을 품에 안고 가능하면 너의 눈에 보이지 않게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한 순간 너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너는 이미 나의 모든 것을 살폈고 너와 나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으나 더 이상 그러한 마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사라진 것을 뒤늦게 찾는다는 것은 초라한 것이고 유치한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을 따름이었다. 네가 궁금했으나 그것은 어떠한 미련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사소한 궁금증이었다. 나의 시간을 공유했던 네가 어떻게 변한 것인지. 그리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그저 그렇게 궁금한 것이 나의 전부였을 것이다. 너와 다른 나의 마음이 미안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에게 잘못을 빌 이유도 하나 없었다.
3
나의 집에는 아직도 그 혹은 그녀의 흔적이 묻어났다. 그 혹은 그녀가 사용하던 샴푸, 그 혹은 그녀가 사용하던 칫솔. 그 혹은 그녀가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버렸다. 그리고 멍하니 거울을 응시했다. 파리한 얼굴의 존재가 그저 거기에 비춰질 따름이었다. 물을 틀고 대충 낯을 훔쳐봐도 그것이 밝아질 리 없었다. 숨이 턱 막히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뭐에 홀린 사람처럼 부리나케 그리로 나가니 주문한 기억도 없는 작은 상자가 하나 도착했다. 가만히 그것을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것은 나에게 의미로 다가왔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흔들어보았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뭔가 가벼운 것.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 혹은 그녀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금 택배 상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혹은 그녀와 나의 시간이 다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리고 그 혹은 그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다시금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혹은 그녀가 휴대전화를 바꾸었다는 변명 덕분이었다. 어쩌면 그 혹은 그녀도 이미 나의 번호를 모두 잊은 후였고 나에게 뭔가 할 말을 잃었기에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었다. 언젠가 연락을 하겠다는 그 말에 대해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어떤 강박관념일 수도 있었다. 아무렴 어떨까? 나는 그 혹은 그녀의 번호를 받게 된 것이고 나와 그 혹은 그녀는 다시 연락이 된다는 거였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나서 그 혹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짝 긴장한 듯, 어쩌면 화가 났을지도 모르는 그 혹은 그녀의 목소리에 움츠러들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 줄 아느냐고. 조금이라도 예의를 지키면 안 되냐는 말에 그제야 시계를 바라봤다. 자정을 막 지나가고 있는 시간에 미안하다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 혹은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식으로 끊으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냐며, 이런 식으로 통화를 끝을 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연결된 그 혹은 그녀의 목소리에 설렜다. 이전에 뜨거웠던 우리 두 사람의 사이가 마치 다시 시작이 되는 것 같았다. 물론 이러한 착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고 사라졌다.
통화가 이어지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고 나서야 나는 나와 그 혹은 그녀가 왜 헤어진 것인지 깨달았다. 우리 두 사람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헤어진 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이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 혹은 그녀를 놓을 수도 없었다. 그 혹은 그녀와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을 너무나도 기뻐하고 있음에 더 이상 그 혹은 그녀에게 미련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다시 만날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 혹은 그녀는 쉽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상황이 다르다는 말. 하지만 이대로 놓을 수 없었다. 우리의 헤어짐이 이대로 끝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그런 확신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나의 조급함이 또 다른 것을 망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그 혹은 그녀와 다시 이어가고 싶을 따름이었다.
소파에 앉아서 다시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열어보려다 아차 싶었다. 나의 이름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이름을 보니 이미 이 집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혹은 그녀에게 온 상자에 대해 나는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으리라. 무엇을 시킨 것인지 기억을 하느냐고 그 혹은 그녀에게 다시 물어보려고 하였으나 괜히 그러다 그 혹은 그녀가 나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할까 주저되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상자를 손에 들고 흔들었다. 과연 그 혹은 그녀가 집으로 시킨 물건이 무엇일지 궁금하였으나 몇 번의 흔듦을 통해서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 혹은 그녀의 무언가를 망치지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함에 조심스럽게 그러나 민첩하게 상자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따름이었다. 그 혹은 그녀가 나에게 남긴 선물일까 주저하다 나는 다시 손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그 혹은 그녀가 불쾌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선 걱정되었다.
4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나와 연락이 되었다는 것을 반가워하는 너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너에게 마치 모진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고, 너에게 너무나도 잔인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의 말이 너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쉽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나의 말 한 마디가 너에게 던져지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큰 물결이 될지 알고 있었다. 그 파문이 두려웠다. 하지만 나와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다는, 인연을 잇고 싶다는 너의 간절한 바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두려웠고 도망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도 없었고 언젠가는 마주해야 하는 거였다. 적어도 인연을 잇지는 못하더라도 제대로 끊을 수는 있어야 하는 거였다. 너와의 시간이 어떤 의미로든 제대로 맺어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터였다. 결국 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건 그게 어떤 의미가 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두려웠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동의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너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전화를 끊고 거울을 보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조금은 지친 얼굴. 머리가 긴 것인가? 싶었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내 몰골이 어떻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더 이상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저 너와 제대로 마주할 수 있기만을 바랄 따름이었다. 그러다 문득 숨이 턱 하니 막혀왔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뭔가가 가슴을 탁 막고 있는 느낌. 벽을 짚고 몇 번 억지로 숨을 쉬니 겨우 숨을 다시 쉴 수 있었다. 마치 숨을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처음부터 숨을 쉬는 법을 배운 것처럼 하고 나서야 숨이 쉬어졌다. 답답했다. 맑은 공기가 필요했다. 베란다에 나가서 입에 담배를 물었다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안도하고 다시 입에 담배를 물었다. 너는 없었다. 내가 이런 곳에서 담배를 피우면 화를 내던 너는 더 이상 없었다. 익숙하게 불을 붙이고 먼 하늘을 바라봤다. 유난히 푸르렀다. 마치 그날의 하늘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맑았나? 흐렸나? 뭐 하나 명확한 것은 없었다. 그냥 느낌에 오늘이 그 날의 하늘일 것만 같은 기분이었기에. 그냥 그렇게 혼자 감상적이 될 따름이었다.
잠수함 속에 갇힌 것 마냥 세상은 아주 작은 문으로만 보였다. 그리고 그 작은 문은 나에게 있어 어떠한 조급증 같은 것을 선사했다. 내가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닌데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스몄다. 나만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 아닐 텐데.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은 마찬가지일 거였다. 저마다 자신이 무언가를 더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서 소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리라. 그런데 내가 감히 그런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누구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니었다.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나는 부끄러운 사람일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담배가 꽁초가 되어 불이 나에게 닿고 나서야 나는 내 손에 담배가 들려있음을 깨달았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느껴질까 재빨리 담배를 끄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공간이 너무나도 답답하여 나는 커튼을 치고 소파에 앉아 몸을 둥글게 말았다. 문득 찾아오는 추위에 온 몸이 시리고 뼈까지 차가워졌다. 너를 만나겠다는 생각이 나에게 이런 오한이 들게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으나 그래도 너와는 만나야만 했다. 그 모든 이야기를 해야만 했고, 그 답답한 것들을 토해야만 했다. 너는 늘 나에게 기대기만 하는 사람이었으니 한 번쯤은 내가 너에게 기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고, 반대로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허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나와 너의 만남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피하려고 한다고 해서 그것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외면하고 싶다고 해서 외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너는 나를 만나기 고대하고 있었으며 나는 더 이상 너에게 나를 숨길 수 없었다.
5
나는 그 혹은 그녀와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다 문득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아직 얼굴에서 조금 아이 같은 모습이 보이던 그 혹은 그녀는 나와는 조금 다른 세계의 사람인 것 같았다. 우리가 과연 친해질 수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는 것과 다르게 그 혹은 그녀는 이미 내게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우리가 친하게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며, 앞으로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며. 그리고 나와 그 혹은 그녀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볼 적에는 혹 사귀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나와 그 혹은 그녀는 다정한 사이였다. 그리고 나와 그 혹은 그녀는 정말로 연인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럴 줄 알았어. 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의기양양한. 그리고 너무나도 행복한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뿐이었다. 나와 그 혹은 그녀 사이는 이전과 전혀 다른 것이 없었다.
이런 것이 연인이라고? 라는 의문이 늘 우리 곁에 맴돌았고 그것은 나와 그 혹은 그녀를 힘들게 하는 문제였다. 이런 것이, 고작 이런 것이 연인이라면 나와 그 혹은 그녀는 굳이 이런 식으로 어떤 선언 같은 것을 할 이유가 없었다. 나와 그 혹은 그녀는 오히려 아무 것도 아니었을 그 시절이 더 뜨거웠고 서로를 더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나와 그 혹은 그녀가 연인이 된 이후 오히려 나는 그 혹은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 혹은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혹은 다른 사람들이 나와 그 혹은 그녀의 관계를 바라볼 대 어떤 식으로 보일지 관심을 갖는 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와 그 혹은 그녀는 전보다 식은 나와 그 혹은 그녀의 사이는 점점 더 나와 그 혹은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전복하지 못했다. 나와 그 혹은 그녀의 관계는 그렇게 점점 더 침몰하는 배처럼 깊은 곳으로 들어갈 따름이었다. 점점 더 깊은 바다 속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혹은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있어서 그 혹은 그녀는 나를 미소 지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고, 내가 살아가는 하나의 이유가 되어가는 사람이었다. 삶의 버거운 순간마다 그 혹은 그녀는 내 곁을 든든히 지켰으며, 나는 그 혹은 그녀 덕에 그 모든 고비를 넘을 수 있었다. 한 번도 먼저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으며 내 곁을 지켜주는 그 혹은 그녀를 보며 나는 알 수 없는 어떤 공포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이렇게 나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다가 그 혹은 그녀가 나를 두고 갑자기 떠나버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에게 있어서 그 혹은 그녀가 어떤 의미를 남겨둘 수라도 있는 것일까? 하는 그런 두려움이 생겼다. 그리고 아마 그 순간부터 나와 그 혹은 그녀가 멀어지게 되었으리라. 내가 그 혹은 그녀를 점점 더 억압하고 그 혹은 그녀에게 어떤 정답을 받고자 노력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그 혹은 그녀는 지치게 되었다. 더 이상 내 어린아이와도 같은 투정을 그 혹은 그녀는 봐주고 싶지 않았으리라. 나도 싫었던 나의 모습을 그 혹은 그녀에게 무조건 용납해 달라 주장하는 것도 너무 우스운 일이었고, 너무나도 이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유치한 일이었다.
나는 이기적이었고 그 혹은 그녀 역시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 혹은 그녀는 단 한 번도 먼저 마음을 연 적이 없었다. 도와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 그 혹은 그녀를 내가 먼저 용감하게 나서서 도와준다고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혹은 그녀는 생각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그 자존심이 강한 사람에게 먼저 손을 잡아 달라 외친 사람이었고, 이번에도 결국 마찬가지로 먼저 손을 잡아 달라 말한 것이었다. 그 혹은 그녀는 그저 내 손을 잡아줬을 뿐이었다. 어쩌면 나와 다른 마음을 가졌을, 아니 분명 그럴 그 혹은 그녀를 만난다는 것이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혹은 그녀를 만나야만 했다. 그 혹은 그녀를 만나지 않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음을 나도 그 혹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 혹은 그녀를 기다렸으며 그 혹은 그녀도 나를 기다리기 바라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6
단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는 옷을 입은 나의 모습은 너무나도 낯설고 부끄러웠다. 나의 모습은 창피하였으며 부끄러웠다. 고작 이런 옷을 입겠다며 그리도 싸우고 다투었던 것인지 한심하게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너에게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너의 기억 속에 나는 어떻게 남아있을까? 우연히 마주한 너와 나의 조우 속에서 너의 그 밝은 미소에 나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리도 너를 만나지 않기 위해서 맴돌고 피하기만 했었는데, 너는 나를 너무나도 기다리고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너의 모습에 나는 부끄러웠고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너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이나마 거울 앞에서 나를 단장했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있었더라면 너는 웃었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뭐 하는 것이냐고 그런다고 그 못난 얼굴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느냐고 말이다. 그래도 괜히 너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긴장된 마음을 숨기고 밖으로 나서려고 했으나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랜 시간 만나지 않던 이와 다시 만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의 나를 보고, 그 설레던 너의 얼굴이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두려웠다. 네가 여전히 나를 그리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너는 이제 더 이상 나를 기다리지도 않고, 내가 나타나기를 바라지 않는데 내가 괜히 욕심을 낸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이내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 차라리 다행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국 내가 어떤 모습을 보이건, 내가 어떤 마음이건 그것은 너와 나의 관계에 있어서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음을. 나는 새삼스럽게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저 부끄러운 사람이었고, 너를 만나고 네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거리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투명한 하늘이 유난히도 더 시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 왈칵 짠물이 밀려오고 나는 눈을 떴다. 너를 만나러 가는 길. 나는 그 동안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려 너를 만나러 간다. 네가 원하던 내 모습이 아닐까 나는 유리창에 비춰지는 내 모습을 살핀다. 머리는 산발이 되고 얼굴은 유난히 더 초라한 것 같아서 억지로 머리를 누르고 이리저리 매만지지만 뭐 하나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방송에서 한 연예인인지 아나운서인지 누가 한 말로 입술을 꼭 물면 조금이라도 붉어져서 예뻐 보인다는 그 말에 괜히 믿음이 가서 아랫입술을 꼭꼭 물어본다. 이런 내가 우스웠지만 그래도 이기적인 내 모습을 조금이나마 감출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네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미안하고 고마웠기에 나는 옷을 더 단정히 만지면서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광화문을 앞두고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버스는 천천히 달리다 결국 목적지 앞에서 멈췄다..
버스에 내려 종로 3가를 지나 종각 쪽으로 가는데 대로에 차가 한 대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이가 촛불을 들고 광화문 방향으로 향진을 한다. 나도 그들의 걸음을 따라간다. 이 수많은 행렬의 끝에, 이 촛불의 끝에 무엇이 놓였을까? 그리고 그들을 따라 종각역을 지나 광화문을 지나간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리로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무언가가 나의 발을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제야 내 몸이 흠뻑 젖었음을 느끼며 주위의 눈치를 살핀다. 혹여나 누가 지금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괴이하다 말할까? 이상하다 이야기를 할까 그것이 겁이 나서 자꾸만 숨고 또 숨으며 뒤로, 또 뒤로 물러나고 피하고 점점 길가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람의 수는 점점 불어나고 그들의 손에 들린 촛불에 내 몸은 조금씩 바삭하게 말라간다. 사람들의 촛불이 광장을 가득 채운 것을 보고 나서야 나는 그곳이 더 이상 죽음의 냄새가 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 애초에 그곳은 죽음과 관련이 없는 곳이었다. 그저 그 역겨운 냄새는 나에게서 나는 것이었고, 나는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너를 보며 알 수 없이 울었다.
7
나와 그 혹은 그녀는 광화문에서 다시 만났다. 조금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그 혹은 그녀가 다시 만났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사람들이 나와 그 혹은 그녀가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할 적에도 나는 그들에게 언젠가 만날 거라고. 당신들이 틀린 거라고 말을 했는데 이제 그 사람들에게 조금 더 당당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나와 그 혹은 그녀는 서로를 그리워한 거였다고,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만날 수 있었을 거라고. 그곳에서 너는 얼마나 시달렸는지 고스란히 얼굴에 다 드러나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오열하는 내 주위로 사람들이 오고 나와 그 혹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서로 위로의 말을 한 마디씩 건네나 그것은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오직 차갑게 식은 그 혹은 그녀의 주검을 붙들고 나서야 나는 마침내 이것이 현실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것은 나 혼자만의 걸음이 아니었을 것이라. 수많은 이들이 이 광장을 채워주고, 우리가 이 광장에 있었음을 잊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라. 그리고 그 혹은 그녀가 나에게 오기 위해서 그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그 오랜 시간을 버티고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 오랜 시간을 견디고 결국 내 앞에 그 혹은 그녀가 나타났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원망도 사라지고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다. 그 혹은 그녀가 나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은 나를 보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임을. 그것을 알고 나서야 나는 그 혹은 그녀에 대한 원망을 모두 거둘 수 있었고 그 혹은 그녀에게 미안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혹은 그녀는 나를 위해 그 긴 시간을 견뎠으며 내가 그 혹은 그녀를 먼저 찾아서 감히 만나자고 요청할 때까지 그 차가운 물속에서 기다렸으리라.
그 혹은 그녀는 나를 만나기 위해서 그 힘든 시간을 기다렸다. 손톱이 다 으스러진 그 혹은 그녀의 손끝을 보며 나는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그대로 땅 아래로 꺼져서 그 혹은 그녀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 혹은 그녀의 곁으로 갈 수 없었다. 아직 그 혹은 그녀가 나에게 기다리는 일이 있었을 테니. 그 혹은 그녀가 나에게 그리 힘들게 왔는데. 내가 그저 그 혹은 그녀의 곁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무언가를 할 수 없음을. 늘 나의 모든 것을 다 받아주던 그 혹은 그녀가 없는 순간에 나 혼자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두렵고 겁이 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 모든 것이 그 혹은 그녀를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혹은 그녀는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고, 나를 착한 사람이라 말했으며 더불어 내가 정의로운 사람이라 말했다. 내가 그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지금도 당신이 말을 하는 것 같기에. 나는 그 혹은 그녀를 위해서 움직일 수 있었다.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 오고 나서야 그 혹은 그녀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미소라도 지을 수 있었다. 서로를 마주하지 않은 채로는 그 추억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혹은 그녀를 만나고 나서야 그 혹은 그녀가 주문했던 작은 상자를 열어볼 수 있었다. 내가 그토록 필요하다고 했던 작은 소품이 그 안에 있었음을 알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 혹은 그녀는 내가 마음이 식어가는 와중에도 그리고 다투는 순간에도 나를 생각하고 있었음에 미안하고 또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 혹은 그녀는 나를 보며 괜찮다고, 모든 것은 다 나의 잘못이 아니며 자신이 실수를 한 것이라 말을 했지만 나와 그 혹은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건 나와 그 혹은 그녀의 실수가 아니라 나와 그 혹은 그녀와 전혀 상관이 없는 곳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었음을. 그 혹은 그녀가 나를 위해서 준비한 소품을 대충 주머니에 밀어 넣고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 혹은 그녀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대로 추운 바닥에 주저앉을 수 없음을. 그 혹은 그녀는 스스로 리본을 달 수 없기에 나는 내 가슴에 더욱 커다란 리본을 달고 앞으로 나아간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그 혹은 그녀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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