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
“없습니다.”
“그래요?”
기민의 대답에 동선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조금 짜증이 는 거 같아서.”
“그러십니까?”
여전히 기민의 표정에 별 모습이 떠오르지 않자 동선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밖에서는 그다지 티를 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아프시니까.”
“그렇죠.”
다른 말을 더 할 것도 없었다. 자신도 할 말이 없었고. 반대로 기민 역시 할 말이 없을 거였다.
“나라서 안 되는 건 아니고?”
“네?”
영준의 물음에 기민은 미간을 모았다.
“무슨?”
“나라서 아무 보고서도 못 주는 거 아니냐고?”
“아닙니다.”
기민은 차분히 대답했다. 동선에게 그런 일이 없다고 말을 하기가 무섭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였다.
“아무래도 지금 회사 안에서 제대로 된 직책이 없으시고, 그저 이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사라서.”
영준은 한숨을 토해냈다. 숨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뭐라도 하려고 하지만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다시 사용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회장님 계시죠?”
“네.”
“그리 가죠.”
“네.”
기민은 영준을 도왔다. 영준은 일어나는 순간 비틀거렸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 잡기가 무섭게 기민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지 마요.”
“알겠습니다.”
“그럼 가죠.”
“네. 가시죠.”
영준은 한숨을 토해냈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이 너무나도 지치는 일이었다.
“나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
서혁의 간단한 말에 영준은 미간을 모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말 그대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건 내가 해야 하는 일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야.”
“회장인데. 회장이라면 그런 것은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마음대로 모든 것. 다 할 수 있잖아요.”
“아니다.”
서혁은 힘을 주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의 대답에 영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요?”
“왜라니?”
“뭐든 해야죠.”
“어떻게?”
“네?”
“어떻게 그러느냐?”
서혁은 차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나는 너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정말로 많은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나부터 그런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면? 과연 내가 다른 이들에게 규칙을 지키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영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규칙이라는 것. 자신 역시도 꽤나 중요하게 생각을 하던 일이었다.
“그럼 제가 뭘 하기 바라시는 거죠?”
“너는 할 수 있을 거다.”
“네?”
서혁의 말에 영준은 코웃음을 쳤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모든 게 다 영준이 그 망할 녀석의 편이라는 거 아시고 계시는 거죠?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있다.”
“네?”
“그 힘.”
“아니.”
영준은 심호흡을 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무슨.”
“네가 할 수 있는 일. 네가 정말로 잘 하는 일. 그 일을 네가 해야만 하는 거다. 그런 거 할 수 있을 거다.”
영준은 침을 삼키고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모든 것이 너무 답답한 순간들이었다.
“그래요?”
“네.”
“걱정이네.”
은수는 입을 내밀었다.
“그 녀석 안 그래도 지랄인데.”
“네?”
“몰랐어요?”
“무슨?”
동선의 반응에 은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마 동선 앞에서는 완벽한 모습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 녀석 얼마나 까다로운 녀석인데요? 내가 그래도 꽤나 오래 친구라고 하는데 못 어울려요.”
“그래요?”
“그럼요.”
“그럼 많이 참는 거네.”
“당연하죠.”
동선의 표정에 은수는 입을 내밀었다. 그리고 가볍게 그의 팔을 문지르며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그러지 마요.”
“나는 그 녀석에 대해서 몰라요.”
“왜 몰라요?”
“그러게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동선이 갑자기 자책하자 은수는 미간을 모았다. 그러라고 한 말이 아니라 많이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동선 씨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녀석을 견딜 수가 있는 거고요. 그리고 나도 이렇게 위로를 해줄 수가 있는 거고.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동선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한숨을 토해냈다. 과연 자신이 뭘 할 수가 있는 걸까?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동선 씨 그림도 잘 그리네요.”
“제가요?”
“네. 봐요.”
은수는 자신이 그린 것을 보여줬다. 확실히 컵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까 은수의 그림은 살짝 삐치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동선의 그림은 차분하니. 원래부터 컵에 인쇄가 되는 것 같았다.
“대단해.”
“아닙니다.”
동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아니. 지금 회사도 공기업에 다니는 거잖아요? 철도공사니까. 그런데 이렇게 그림도 잘 그려.”
“아.”
동선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은수는 그런 그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더욱 밝은 미소를 지었다.
“자리를 달라고?”
“그래.”
“미쳤네.”
영준의 말에 영우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최대 주주라는 이름으로 이사의 자리에 있는 것도 싫었는데, 지금 제대로 된 자리를 달라는 거. 그건 지금 그의 목을 조른다는 의미였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 믿어?”
“왜?”
“왜라니?”
“나도 여기에 자격 있어.”
“아니.”
영준의 말이 끝이 나기가 무섭에 영우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너는 없어.”
“왜?”
“호적에 없으니까.”
“호적.”
그 호적이라는 것. 그 망할 호적이라는 것. 평생 편모 아래에서 자란 영준이었다.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자신도 이 집에 들어오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건 달랐다.
“내가 원하는 자료를 모두 줘.”
“무슨 자료? 아.”
영우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영준은 회사의 거래 자료를 요구했다.
“그건 못 주지.”
“왜 못 준다는 거지?”
“회사의 것이니까.”
“회사의 것.”
영준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럴 자격이 있나?”
“뭐?”
“네 것도 아니잖아.”
“무슨.”
영준의 지적에 영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것이 아니라는 말. 지금도 그를 괴롭히는 거였다.
“뭘 하고 싶은 거야?”
“그러게.”
영준은 테이블을 문질렀다.
“내가 뭘 하고 싶은 걸까?”
“김영준.”
영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이런다고 해서 내가 긴장할 거 같아?”
“응.”
영준은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지금도 그러고.”
“뭐?”
“아니야?”
“아니야.”
“거짓말.”
영준은 다시 몸을 뒤로 젖히고 소파에 편하게 기댔다. 그리고 턱을 만지고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지금 내가 너를 도울 수도 있을 거야. 지금 내가 하는 거 나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아니.”
영준의 제안에도 영우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나를 도우려고 하는 거라면 아무런 것도 되지 않을 거야. 너는 나를 망치려는 사람이니까.”
“망치다.”
영우의 지적에 영준은 미간을 모았다. 그리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두려운 이유가 뭐야? 너는 모든 시간을 다 가진 거잖아.”
“그러니까.”
영우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이제 죽을 새끼가 왜 그러는 거야?”
“그러게.”
영준의 얼굴이 밝아졌다.
“왜 이러는 걸까?”
“꺼져.”
“심하네.”
영준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넥타이를 풀고 이리저리 목을 풀고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내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영준을 보며 영우의 얼굴이 굳었다. 영준은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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