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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연인 - [열두번째 이야기]

권정선재 2007. 8. 29. 23:41
 





12화. 시련 그리고




“하암.”


민정이 눈을 떴다. 윤호가 베란다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게 보인다.


“킥.”


정말 듬직하다. 마음에 든다.




“어머니.”

윤호의 인상이 구겨졌다.


“두 말 할 것 없다. 당장 미국으로 돌아와!”


“제발요.”

“사내자식이 그 정도로 놀았으면 많이 논 거야. 언제까지 한국에서 그 따위로 살 거야? 변변찮은 대학이나 들어가고. 그냥 아버지 밑에서 경영이나 배우면 얼마나 좋니? 네가 한국으록 간지도 이제 5년이 넘어간다. 어서 미국으로 돌아오거라.”


윤호가 입술을 깨문다.


“윤호야.”


“저 못 돌아가요.”


“그 아가씨.”

“!”


“지금 놔주거라.”

“어머니!”


“지금 놔주지 않으면!”


“?”


“후회하게 될 거다.”


어머니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네가 뭐가 부족하니?”

“부족한 거 없으니까, 다른 사람 채워주며 살겠다고요.”


“윤호야!”


윤호가 애써 마음을 가라 앉힌다.


“저 지금이 딱 행복해요. 가장 행복해요. 딱 지금, 지금 딱 이만큼만,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더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 없어요. 어머니. 제발 더 이상 저를 품 안에 자식으로 두려고 하지 마세요.”


“너, 무슨 말을!”


“어머니 이러시면 저 어머니 안 봐요.”

“나 한국으로 간다.”

“!”


윤호의 눈이 동그래진다.


“어머니.”


“꼭 너 때문은 아니지만, 가야겠구나.”


“어머니!”

“이만 끊겠다.”


“어머니! 어머니!”


‘뚝’


전화를 끊어버렸다.


“젠장.”


어머니는 변하시지 않으신다. 언제나 제멋대로이시다.


“제발. 제발.”


어머니는 나를 너무 가두려고 한다.




“?”


민정이 고개를 갸웃한다.


“왜 저렇게 화를 내지?”

윤호가 너무나도 힘들어 하는 거 같다.


“윤호야.”


“내가 힘이 되어줄 수는 없는 걸까?”




“아까, 아침에 무슨 통화야?”

“네?”


아침, 신선한 샐러드와 에그 프라이, 커피 한 잔. 너무나도 좋은 아침인데, 무언가 우울하다.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말해봐.”

윤호가 망설인다.


“윤호야.”

여전히 말이 없다.


“내가 너에게 어떤 존재야?”


“네?”


“네 애인이 맞니?”


“네.”


민정이 싱긋 웃는다.


“그럼 나에게 얘기를 해주면 안 될까?”


윤호는 대답이 없다.


“나, 네가 말 안하면, 지난 번처럼 또 혼자 오해할 것 같아.”


“어머니에요.”


“어머니?”


“선생님 내가 어떤 애인줄 알아요?”


“어?”


“나 되게 부잣집 애에요.”


“!”


민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부모님은 모두 뉴욕에 계세요.”

“아.”


“어머니는 잘나가시는 패션 디자이너시구요. 아버지는 뉴욕에서 커다란 사업을 하세요. 돈도 꽤 있으시대요.”


“아.”

“그런데 이번에 어떻게 선생님이 나랑 사귀는 거 아셨나봐요. 당장 헤어지라고 길길이 날뛰시네요.”


“왜?”


“수준차이래요.”


“아.”


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요.”


“?”

“나는 선생님이 너무 좋아요.”


“어?”


“나는 그냥 나이고, 선생님도 그냥 선생님이에요.”

“어.”

“그러니까, 계속 내 곁에 있어줘요.”


“그래.”


윤호가 싱긋 웃는다.


“선생님이 있어서 너무 다행이에요.”


“어?”


“너무 고마워요.”


“나도.”




취직을 해야 하겠지? 선생님에게 어울리는 그런 남자가 되려면?


“라이아.”

너무 좋은 자리다.




“우와.”


“어서 와요.”


지인이 미소를 지으며, 윤호를 이끈다.


“이번에 새롭게 한국으로 진출하면서, 이곳 강남에 건물을 짓게 되었어요. 그 동안 로얄티만 받고, 있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한국에 진출하고 싶어요. 그리고 자리가 잡히면 본격적으로 커피전문점도 낼 계획이에요. 어때요? 우리와 함께 일해보지 않을래요? 매주 주말은 쉬고, 월차도 두 번 있어요.”


“아.”


“깨끗하고요.”


“정말 저를 써주시는 거에요?”


“물론이죠.”

지인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네?”


“자기 일에 자부가 있는 사람.”


“아.”

“반가워요. 당신의 상사인 유지인입니다.”


지인이 손을 내밀었다.




“히.”


윤호는 기분이 너무 좋다. 정말 취직이 되었다. 그 것도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호텔 라이아의 커피숍에 말이다.


“선생님한테 자랑해야지.”


윤호가 전화기를 연다.




‘따르릉’


“여보세요?”


민정이 싱긋 웃으며 전화를 받는다. 얼굴에는 윤호에게 줄 케이크를 굽느라, 온 부엌이 밀가루 투성이다.


“나 윤호 엄마에요.”


“!”


차가운 목소리. 가까이 하기 어렵다.


“무슨 일이시죠?”

“만났으면 하는데?”

“저를요?”


“네.”


차갑기 이를 데가 없다.


“언제 만날까요?”

“언제 시간이 되시죠?”

민정이 시계를 본다.


“한 시간 내로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한 시간 후에 보죠.”


“네.”


“그럼.”


여자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하아.”


민정이 지긋이 눈을 감았다.


“어머니.”


예상 외에 복병이었다. 부모님이 걸릴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아.”


민정이 앞치마를 벗었다.




“어?”


윤호가 고개를 갸웃한다.


“왜, 전화를 안 받으시지?”

벌써 세 번째인데? 윤호가 다시 전화를 건다.




“만나시자는 이유가?”

“헤어져요.”


“!”


“나는 돌리는 거 싫어해요. 나는 단도직입적인 거 좋아하거든요. 헤어져줘요. 당신이란 사람 우리 윤호에게 걸림돌일 뿐이에요. 나는 우리 윤호의 앞이 막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는 윤호가 뉴욕으로 돌아와서 우리 집안의 대를 이었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어요. 그러니 헤어져요.”


“죄송합니다.”


“네?”


민정이 고개를 숙였다.


“헤어지지 못 해요.”


“무슨 뜻이죠?”


어머니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윤호가 행복하길 원해요.”


“어머니.”


“당신 같은 사람이 윤호를 더럽히는 게 싫어요.”

“!”


“지금 충분히 윤호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어요. 안 그래도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우겨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어른이 되어서도 안 들어오다니요! 윤호를 잡아주세요! 헤어져 달라고요!”


어머니가 악을 쓴다.


“제발 놓아줘.”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어, 어머니.”


“제발, 제발.”


민정이 입술을 꼭 깨문다.


“죄송해요.”

“하.”

갑자기 바뀐 어머니의 표정에 민정이 당황했다.


“어, 어머니.”

“얼마면 돼???”


“네?”


어머니가 가방을 열었다.


“울면서 감정에 호소하는 거 나에게 안 어울려.”


어머니가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나는 이런 사람이야.”


어머니가 가방에서 하얀 봉투를 꺼낸다.


“2억”


“!”


민정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머니!”


“더 원하는 거야?”

어머니가 고개를 젓는다.


“순진한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보네. 도대체 얼마를 원하는 거야? 몇 억 더 줘? 아파트라도 사줄까?”

“그만 하세요.”


민정이 주먹을 쥔다.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아, 그럼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내가 평생토록 프랑스 가서 살 수 있는 돈 줄게요. 프랑스 가서 살아요. 우리 윤호 떠나줘요.”


“!”


“나 더 이상 아들 잃고 싶지 않아!”


“어머니!”


“그 어머니 소리 집어 치워요.”


어머니가 냉정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기분 나빠요. 내가 왜 당신 어머니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요.”


어머니가 선글라스를 꼈다.


“생각 바뀌면 전화해요. 60억 정도는 줄 수있으니까.”


“!”


어머니가 자리를 일어났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가 카페를 벗어났다.




“하아.”


민정이 천천히 거리를 걷는다.


“길을 막는다.”


아까의 말을 혼자 곰곰이 생각한다.


“하아.”


정말 그런걸까?




“어머니.”

윤호가 들고 왔던, 비닐봉투를 떨어뜨린다.


“이제 왔니?”


정말 왔다.


“한국에는 어쩐 일이세요?”

최대한 무덤덤하게 물어본다.


“미국으로 가자.”


“어머니.”

윤호가 어머니를 바라본다.


“저 취직했어요?”


“그까짓 커피집은 미국에 널렸다.”


“!”


“라이아가 대단하니?”


어머니가 윤호의 커피잔을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미국으로 가자.”


“어머니.”


“가게 하나 차려주마. 아니 네가 미국에서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도록 도와주마.”


“저는 한국이 좋아요!”


“윤호야.”


어머니가 윤호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엄마의 마지막 부탁이다.”


“!”


“그 여자 때문이니?”


어머니가 윤호를 지긋이 바라본다.


“헤어져라.”


“어머니.”

“집안 망신 시킬 거니?”

“그게 왜?”

어머니가 엄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 집안이, 겨우 그런 농사꾼 집안하고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나마 가장 출세한 것이 그 아이더구나. 교사. 그 것도 겨우 교사라니.”


“어머니!”


윤호가 주먹을 쥔다.


“잘 생각해봐라.”


엄마가 선글라스를 쓴다.


“네가 미국으로 들어왔으면, 하고 아버지도 바라신다.”


“저는 미국으로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흠.”


어머니가 안경 너머로 윤호를 빤히 바라본다.


“내가 힘을 써야 겠니?”


“어머니!”


“나는 너희 둘이 행복한 결말을 맞았으면 하는 구나.”


“행복한 결말은, 저희가 함께 사는 거에요.”


“과연 그 여자도 그럴까 싶구나.”


“설마!”


윤호가 입술을 꼭 깨문다.


“만나셨어요?”

“그게 문제니?”

어머니가 밍크코트를 걸친다.


“내가 만나면 안 될 사람도 아니고.”


“어머니!”


“그럼 난 간다.”


“하아.”


‘쾅’


윤호가 가슴이 공허해짐을 느꼈다.


“젠장.”


윤호의 눈에 빛이 번뜩인다.


“설마?”




“헤어진다?”

민정이 고개를 숙인다. 너무 추억이 없다.


“진짜 네가 행복한 거니?”


‘딩동’


“누구세요?”


민정이 현관문을 열었다.


“!”


비에 젖은 윤호가 서 있다.


“윤호야!”


“선생님 미안해요.”


윤호가 민정을 껴안았다.


“윤호야!”


민정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엄마 왔다면서요.”


“!”


“미안해요. 당신 힘들게 해서 미안해요.”


“아, 아니야.”


윤호가 민정을 더 꼭 안아준다.


“나 떠나지 말아요.”


“!”


“엄마가 뭐라고 했는 지 알 것 같아요. 그런데도 힘들어 하지 말아요. 나는 선생님 없으면 못 살아요. 나는 당신 없으면 죽어갈 꺼예요. 나는 하루하루 말라서 죽어버릴 거라고요. 제발 나를 두고 가지 말아요.”


“안 가.”


민정이 싱긋 웃었다.


“나도 너 없이 절대 못 살아.”


“선생님!”


“나도 너만 사랑해.”


민정이 윤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너야 말로 나를 떠나지마.”


“안 떠나요.”


“그럼 된 거야.”

민정이 윤호를 끌어안는다.


“나는 너를 먼저 떠나지 않아.”


“선생님.”


“나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고마워요. 고마워요.”


“아니.”


민정이 도리질친다.


“내가 더 고마워.”


“왜요?”


“나 같은 사람 좋아해줘서.”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윤호가 싱긋 웃는다.


“나는 당신 없으면 죽으니까.”




“그런데 나 기분 나쁘다.”


“네?”


입 안 가득 파스타를 먹던 윤호가 민정을 바라본다.


“너 왜 선생님이라고 안 해?”

“당신이 이상해요?”


“내가 어른이잖아.”


“킥.”


윤호가 미소를 짓는다.


“나도 어린 애 아니거든요.”


“너 나보다 7살 어리잖아.”


“킥.”


윤호가 장난스럽게 민정에게 입을 맞춘다.


“당신 너무 귀여워.”


“뭐?”


“앞으로 선생님이라고 안 부를 거야.”


“너!”


민정이 화난 표정을 짓는다.


“계속 당신한테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나 계속 당신한테 어린애일 거니까. 그러니까 나 당신이라고 부를 거야.”

“!”


민정의 얼굴이 붉어진다.


“나 당신한테는 남자이고 싶어.”


“킥.”


“그냥 당신이라고 부르면 안 돼?”


“좋아.”


민정이 싱긋 웃는다.


“듣다 보니 귀에 익네.”

“그래서 내가 당신 좋아한다니까.”


둘이 코를 부빈다.


“맞다. 나 출장 다녀와.”


“출장요?”

“응.”


“어디요?”


“전주.”


“거기 까지요?”


“출장 겸, 집도 가보고.”


“내가 같이 가 줄까요?”


“너 강의 있을 거 아니야?”


윤호가 싱긋 웃는다.


“그깟 강의가 당신보다 중요할까봐?”


“킥. 됐어."


민정이 윤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당신 마음만 해도 고마워.”

“고마워요.”


윤호도 싱긋 웃는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요.”


“고마워.”




“하아.”


설거지를 하는 윤호를 보는 민정의 마음이 착잡하다.


“길을 막는다.”


정말 그런걸까?


“하아.”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가 건네주신 비행기표를 받고 말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이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거라고.”


“아.”


“내가 공부할 수 있게 도와줄게요.”

“!”

어머니의 눈이 떨렸다.


“제발 윤호 놔줘요.”


“어머니.”


“제발요!”


어머니가 악을 쓴다.


“당신이 윤호를 정말 사랑한다면, 놓아줘야 해요.”


“어머니.”



“무슨 생각해요?”


“아니야.”


윤호가 커피를 내민다.


“이거 뭐야?”

“커피깔루아.”


“술이잖아.”


“약해요.”


맛이 색달랐다.


“사랑해.”


“저도요.”


둘이 부드럽게 입을 맞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