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7:42
첫 번째 이야기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유 팀장님 뭐 좋은 일 있으세요?”
“어?”
자꾸만 실없이 웃어대는 채경을 보고 윤우가 미소를 띠며 묻는다.
“무슨 일이신데요?”
은호도 옆으로 다가온다.
“팀장님.”
“내가 어제 말한 이야기 기억해?”
“음.”
윤우와 은호가 서로를 바라본다.
“어제 그”
“지하철에서 만났다는 남자분이요?”
“응.”
“그 분이 왜요?”
두 여자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그게,”
채경이 미소를 지으며 뜸을 들인다.
“팀장님.”
“그래 알았어. 말해줄게. 그 사람이랑 나 사귀기로 했어.”
“네?”
“정말요?”
“우와!”
두 사람이 채경보다 더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채경은 고개를 젓는다.
“두 사람은 뭐가 그렇게 즐거워?”
“우리 팀장님 서른 되기 전에 애인 만드신 거요.”
“어?”
채경은 살짝 어이가 없다.
“그게 뭐?”
“에? 다 들었다고요.”
“뭘.”
“팀장님 아직, 처녀시라면 서요.”
“어?”
채경의 얼굴이 붉어진다.
“고등학교도 명문이고 대학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알아주는 S대학교. 공부만 하시느라 연애할 틈이 없었다고 들었어요.”
“게다가 얼마나 남자 관리는 철저하신지, 사소한 스캔들 하나 그냥 넘기신 적도 없고, 매일 야근도 자처하셨다면서요?”
“어? 어.”
채경은 얼굴이 붉어진다.
“그런 팀장님이.”
“연애를 하신다니!”
두 사람이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다.
“회사에 소문내도 괜찮죠?”
“어?”
채경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안 돼! 절대!”
“아주 입이 찢어지겠다. 찢어지겠어.”
“헤헤.”
진호가 태균의 핀잔에도 웃기만 한다.
“그렇게 좋냐?”
“응.”
“으유.”
태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여간 나는 너란 녀석이 이해가 안 된다니까.”
“그래도 괜찮습니다.”
“아, 네.”
태균이 작업대로 가다가 멈칫한다.
“그러고 보니까, 너 이번 달에 대학 등록해야 하는 거 아니야?”
“!”
진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어떻게 할 거냐?”
“돈이 없는 걸.”
진호가 머릿속으로 통장 잔고를 생각한다. 예치금 30만원을 제하고도, 등록금이 문제다. 어떻게 하면 용케 1년은 다닐 수 있겠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일단 지금은 돈을 버는 일이 우선이다.
“대학은 나중에도 갈 수 있는 걸.”
“미련한 녀석.”
태균이 뭔가를 던진다.
“이게 뭐야?”
“통장이다.”
“통장?”
“내가 좀 모아 놓은 거야.”
“어?”
“그 걸로 너 대학 다녀라.”
“태, 태균아.”
태균이 미소를 짓는다.
“우리 친구잖아. 친구 사이에 그 정도는 빌려줄 수 있어.”
“됐어.”
진호가 미소를 지으며 통장을 밀어놓는다.
“야 인마 받아. 그냥 주는 거 아니라니까, 빌려주는 거야. 이자도 받을 거라고. 그러니까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아니.”
진호가 밝게 웃는다.
“네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태균아.”
태균이 통장을 집어서 진호의 손에 쥐어준다.
“받아라.”
“하지만”
“너 지금 친구 성의를 무시하는 거냐?”
“아니야.”
“아니면 그냥 받아 둬.”
진호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친구사이에 무슨.”
태균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너 머리 좋은 거 다 안다. 그 때의 일만 아니었으면, 너 아마 대단한 놈 됐을 거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따라가면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이런 구질구질한 생활 너라도 청산해야 하지 않겠냐?”
“태균아.”
“감동 먹었냐?”
“아니. 너 지금 하나도 안 어울리거든.”
진호가 무덤덤하게 말한다. 물론, 그 말을 들은 태균의 표정은 지금 저 자식을 죽일까 살릴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하아.”
채경은 포장마차에 홀로 앉아서 술을 따랐다. 아무리 윤우와 은호가 회사에 이야기를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오후에 알린 소식을, 본사에서까지 알게 되어서 축하 문자가 들어오게 하다니, 인간 유채경 창피하다.
“미치겠네.”
“어? 저 사람 네 님 아니냐?”
“응?”
진호가 고개를 돌렸다. 정말 포장마차에 채경이 앉아 있다.
“가 봐.”
“어?”
“빨리.”
태균이 장난스런 미소를 짓는다.
“정말?”
“그래, 내일 보자.”
“으, 응.”
진호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태균이 미소를 짓는다.
“채경 씨?”
“?”
고개를 든 채경의 눈앞에는, 자신이 당당하게 꼬인, 아니 꼬이려고 한 그 남자가 서 있다. 이런! 말도 안 돼! 이렇게 추한 모습을 보여주게 되다니.
“어, 어머 진호 씨.”
젠장, 젠장, 이런 젠장!
“여긴 어쩐 일이세요?”
채경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그냥 지나가다가 채경 씨가 보여서 들어 왔어요.”
진호가 씩 웃는다.
“여기 앉아도 되죠?”
“그럼요.”
채경도 같이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혼자에요?”
“아, 네.”
“왜 혼자서 술을 드시고 계세요.”
진호가 미소를 짓는다.
“이모, 여기 잔 하나 더 가져다주세요.”
“그래.”
진호가 소매를 걷더니, 채경의 잔에 술을 따른다.
“먼저 받으세요.”
“아, 네.”
채경이 잔이 채워지자마자 깔끔하게 원 샷을 한다.
“술 좋아하시나 봐요?”
“그냥 즐기는 편이죠.”
“아, 그러시구나, 저는 술을 전혀 못하거든요.”
“?”
채경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잔을 청하셨잖아요?”
“그냥 채경 씨가 술 별로 못 하시면 제가 대신 마셔 드리려고 했는데, 잘 마시신다니까, 괜찮겠네요.”
뭐, 뭐야? 이 남자. 그러면 나를 완전 술독에 빠진 여자로 볼 거 아냐! 인간 유채경 첫 번째 연애, 남자와의 첫 데이트에 이런 알코올 중독자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되는 거야? 오신이시여!
“무슨 생각 하세요?”
“아니에요.”
채경이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미소를 짓는다.
“지금 까지 일 하다가 오시는 거예요?”
“그렇죠 뭐.”
“일은 잘 되요?”
“장사요? 글쎄요. 아무래도 요즘 불경기다 보니까, 장사가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열심히 해 봐야죠.”
이런 말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닌데, 망했다.
“채경 씨는 무슨 일 하세요? 아침마다 정장 입고, 다니시는 걸 보니 회사에 다니시는 것 같기는 한데,”
“아, 그냥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아, 그러시구나.”
이 남자 웃는 거 은근히 멋있다. 내가 찍은 남자답다.
“언제부터 그 일을 하셨어요?”
“네?”
“구두닦이 일 말이에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본다.
“고등학교 중퇴하고 나서요.”
“아.”
고등학교 중퇴.
“할 줄 아는 것도 없었고, 하고 싶은 일도 없었어요. 그냥 돈이 벌고 싶다는 생각. 그거 하나 뿐 이었어요. 아는 형이 구두를 닦는 다 길래, 와서 그냥 구경하고, 형이 결혼하고 부인과 식당 운영하면서 지금 자리 저에게 물려줬어요. 그리고 계속 구두 닦고 있어요.”
“아. 그럼 학교는?”
“검정고시는 합격했어요. 대학도 아마 내년부터 다닐 거 같아요. 그런데 채경 씨 우리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만 할 꺼에요?”
“네?”
아, 회사에서 일하던 버릇이 나왔다. 미치겠네.
“아니에요. 혹시 진호 씨 기분 나쁘셨어요?”
“아니요.”
그가 활짝 웃는다.
“오히려 저에게 관심이 있으신 거 같아서 기분이 좋은 걸요.”
게다가 성격까지 끝내준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늦은 거 같은데, 안 들어가세요?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네?”
나는 시계를 본다. 어느 새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일어나시죠.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아니에요.”
“?”
“저 그냥 여기서 택시 타면 바로 근처에요.”
“아.”
진호 씨의 얼굴에 살짝 서운한 기색이 엿보인다.
“진호 씨도 피곤하시잖아요.”
“괜찮은데.”
“제가 미안해서 그래요.”
나는 싱긋 웃었다. 그러자 그도 나를 따라 웃었다.
“그러면 하는 수 없죠. 제가 택시라도 잡아드리겠습니다.”
“네.”
그리고 그는 먼저 가게를 나섰고, 나는 계산을 했다.
“내가 지금 가진 돈이.”
주머니를 대충 더듬어 보니, 모범택시는 무리라도, 일반 택시라면 태워줄 수 있을 정도의 형편이다.
“택시!”
‘끼이익’
“채경 씨!”
“네!”
그녀가 웃으며 이리로 걸어온다. 완전 여신이다. 여신.
“택시 잡아 놨어요.”
“고마워요.”
“고맙긴요.”
나는 미소를 짓는다.
“어서 타세요.”
“네.”
나는 기사 아저씨에게 5만원을 건넸다.
“이 숙녀 분 댁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아, 진호 씨 안 이러셔도 돼요.”
“아닙니다. 제 여자친구인데 이 정도도 못 해드리나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예!”
택시는 그녀를 태우고 천천히 멀어져 갔다.
“킥.”
기분이 좋다. 나도 애인이 생겼다.
“하아.”
부담되게, 돈도 없으면서.
“어디까지 가세요?”
“청담동이요.”
휴, 미안해서 어떡해? 하루 종일 번 돈 일 텐데.
“하아.”
미치겠다.
“오빠 왔어?”
“응.”
진희는 나의 동생이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나는 진희를 정말 열심히 키워 왔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지 않도록.
“저기 오빠.”
진희가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한다. 아마 돈 이야기 일 것이다.
“이번에는 무슨 일인데?”
“이번에 학교에서 소풍 간데. 에버랜드로 가는데, 자유이용권은 만 천원이고, 입장권은 오천 원이래.”
“그래?”
나는 지갑을 열었다. 다행히 만 원짜리가 몇 장 보인다.
“여기.”
“고마워.”
“고맙긴, 내가 네 오빤데.”
“나, 먼저 잘게.”
“그래.”
‘탁’
진희의 방문이 닫히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쩌냐?”
지갑에는 오천 원짜리 지폐 하나만이 나를 보며, 반갑게 웃고 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골치 아픈 일은 생각하기 싫다.
‘띠’
문이 열리고, 어둠이 나를 반긴다.
“휴.”
불을 키고, 익숙하게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한 잔 따른 뒤, 무의식적으로 TV를 켠다.
“하아.”
그리고 멍하니 그를 생각한다. 구두 닦이라, 정말 사귀는 건가?
채경은 자신의 전화기를 바라보지만, 전화가 올 기미조차 없다. 자신이 먼저 걸어야 하는 걸까? 채경이 전화기 슬라이더를 열다 멈칫한다. 사실 아직 진호의 전화번호조차 알지 못한다.
“하아.”
“하아.”
한 편 같은 시간 진호 역시 같은 고민 중이다.
“전화를 해야 하나?”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간인 걸?
“휴우.”
지금 전화하면 불편해 하지 않을까?
진호는 몇 번이나 채경의 번호를 썼다가 지웠다가 하고 있다. 방금도 통화 버튼을 눌렀다가, 바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후.”
전화 해도 되는 건가?
이 남자 나 안 좋아하는 거야?
채경은 답답하다. 분명 전화가 와야 하는 건데. 윤우와 은호에게 배운 바로는 당연히 남자가 먼저 전화하는 거라고 했는데, 왜 전화가 없지?
“미치겠네.”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며 쿠션을 던졌다 받고 있는 채경은 지금 이 시간이 너무나도 무료하다.
“하아.”
전화야 와라! 제발!
“그래.”
진호가 굳은 표정으로 전화기의 슬라이더를 연다.
“후우.”
그리고 천천히 채경의 번호를 누른다.
“에라, 자야 겠다.”
마침내 채경은 자포자기로 침대에 눕는다.
“내일은 전화 번호 알아 내야지.”
‘따르릉 따르릉’
그 때 채경의 전화기에서 벨이 울린다.
“!”
‘쾅’
전화기를 잡으려다가 제 발에 제가 꼬인 채경, 하지만 아픔을 느낄 겨를은 없다. 누구인지 등록이 되어 있지 않다. 분명 그다.
“여, 여보세요?”
자고 있었나? 목소리가 이상하다.
“저입니다.”
“네. 진호 씨.”
목소리가 들을 수록 이상하다.
“지금 전화 받을 수 없는 상황이신가봐요?”
“아, 아니에요.”
채경은 자신의 무릎을 연신 문지르며 미소를 짓는다.
“어쩐 일이세요?”
“그냥 잘 들어갔나 해서요.”
“아.”
“잘 들어가셨나봐요?”
“네.”
채경은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지만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진호 씨도 잘 들어가셨어요?”
“네.”
낮게 미소 짓는 그의 소리는 참 듣기 편안하다.
“목소리 참 좋다.”
“네?”
진호가 살짝 당황한다.
“목소리 좋다고요.”
채경이 미소를 짓는다.
“고맙습니다.”
진호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목소리가 좋다. 듣기 좋은 소리다.
“그러는 채경 씨도 목소리 좋으신 데요?”
“진짜요?”
“뻥이요.”
“에?”
진호는 혼자서 웃음을 참느라 어깨가 들썩 거린다.
“농담입니다. 농담.”
“에? 뭐에요! 푸핫”
채경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이 남자 농담도 한다. 웃기다. 즐겁다.
“그런데 안 주무셔도 되요?”
“채경 씨가 안 주무시는 걸요?”
“진호 씨가 주무셔야지요.”
“그럼 우리 이쯤에서 전화 끊을까요?”
조금은 서운하지만 어느 덧 시계가 두 시를 가리키고 있다.
“네.”
채경은 미소를 지으며 아쉬움을 참는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뵈요.”
“네.”
전화기를 닫는데 왠지 모를 서운함이 밀려온다.
“하아.”
이 느낌은 뭐지?
“히히.”
웃음이 새어나오다. 기분이 너무 좋다.
“푸하하!”
“시끄러!”
진희의 방에서 투정이 들려온다. 진호는 조용히 진희의 방을 바라본다.
“휴우.”
하지만 너무 좋다. 정말 좋다!
“푸킷.”
웃음이 새어 나온다. 너무 기쁘다.
“하아.”
이게 사랑이구나. 채경은 새삼스럽다.
“히히.”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살아 있는 거 같아.”
채경은 자신의 오른 손을 조심스럽게 왼쪽 가슴에 얹어보았다.
‘쿵덕 쿵덕’
뛰고 있다.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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