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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살다. - [열여섯 번째 이야기]

권정선재 2009. 2. 6. 00:26

 

 

 

추억에 살다.

 

 

열여섯 번째 이야기

 

 

 

삼촌 정말 미쳤던 거야?

 

하아.

 

민용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작은 엄마에게 그 아이를 유산하라고 말을 할 수가 있어? 하혈하는 사람을 어떻게 가만 둬?

 

신경 꺼라.

 

민용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건 내 일이야.

 

이게 어째서 삼촌만의 일이야?

 

윤호가 따지듯 물었다.

 

삼촌 하나로 인해서 온 가족이 얼마나 변해야 하는 지 알아?

 

후우.

 

민용이 연기를 토해냈다.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

 

?

 

윤호가 민용을 바라봤다.

 

그렇게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

 

사랑?

 

민용이 코웃음을 쳤다.

 

너는 서 선생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

 

윤호가 민용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너는 그저 동경일 뿐이라고.

 

민용이 다시 한 번 깊게 담배 연기를 빨아 들였다.

 

아무리 네가 서 선생이 좋다고 하더라도 서 선생은 너를 2년 전의 어린 윤호로 밖에 보지 않을 거야.

 

아니.

 

윤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달라졌어. 선생님이 자랑스러워 할 만큼 훌륭한 대학교에 들어갔고, 내 직업도 있어.

 

다 네 힘으로 한 거냐?

 

?

 

윤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좋아. 대학교에 들어간 그 시험은 네가 직접 본 거지. 하지만 그게 오롯이 네 노력만은 아니었잖아.

 

윤호가 민용을 바라봤다.

 

, . 네 아버지, 그러니까 형 돈 아니었으면 네가 다 그런 거나 가당키나 했겠어? 너는 그저 어린 아이야.

 

나 더 이상 어리지 않아.

 

좋아.

 

민용이 담배를 바닥에 버린 뒤 비벼 껐다.

 

너 진심으로 서 선생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 있냐?

 

당연하지.

 

윤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선생님을 마음에서 지운 적 없었어. 단 한 순간도.

 

나도 마찬가지야.

 

!

 

서 선생, 내 마음에서 지운 적 없다.

 

민용이 슬픈 눈으로 윤호를 바라봤다.

 

네가 나 좀 봐주면 안 되겠냐? 너는 나 잘 알고 있잖아. 내 성격이 어떤 지 잘 알고 있잖아.

 

삼촌.

 

나 서 선생 없으면 죽을 거 같다.

 

민용이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진심이야.

 

어리광 부리지 마.

 

윤호가 차갑기 그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삼촌이 부리고 있는 말도 안 되는 그 어리광 때문에 얼마나 만흔 사람들이 아프고 있는 지 알아?

 

하아.

 

민용이 한숨을 토해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아프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람으 사랑할 수 밖에 없다면?

 

민용이 윤호를 바라봤다.

 

그것도 문제가 되는 거냐?

 

.

 

윤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옳지 않은 사랑이라면 문제야.

 

옳은 사랑, 그리고 옳지 않은 사랑.

 

민용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정의 내리는 건데?

 

삼촌이.

 

윤호는 담담하게 말했다.

 

삼촌 바보 아니잖아.

 

?

 

삼촌은 한 사람의 어른이야. 내가 정말 좋아하고, 내가 정말 존경하는 그런 삼촌이라고.

 

윤호가 살짝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내 사람의 롤 모델이 된 것도 바로 삼촌이야. 나는 그런 삼촌이 이렇게 무너지는 거 정말 싫어.

 

이윤호.

 

단순히 선생님과 나, 그리고 삼촌. 또 작은 엄마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건 아니야.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였어.

 

윤호가 벤치에 걸터 앉았다.

 

우리 아빠랑 엄마. 참 좋은 사람들이지, 하지만 누군가를 본 받으려면 자신과는 조금 다르면서도 멋있어 보여야 해. 그 점에 있어서 삼촌은 나에게 너무나도 멋있어 보이는 사람이었어.

 

내가?

 

.

 

윤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할 말 다 하고. 언제나 당당한 사람, 그게 바로 삼촌이었어. 그런데 지금 삼촌 모습은 뭐야?

 

윤호의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어린 애 같고, 투정만 부리는 사람이야. 자기 입장만을 내세우는 그런 고집쟁이로밖에 보이지 않아. 전의 삼촌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어. 하지만 지금 삼촌은.

 

윤호가 살짝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역겨워.

 

나도 내가 역겨워.

 

민용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지금 내가 제 정신이 아니라는 거 다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어쩔 수가 없다. 미쳤다는 거 알고 있는데, 어쩔 수가 없어.

 

민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내가 신지를 외면할 수 없다는 거, 그리고 내가 이미 신지를 품에 안았다는 거 다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서 선생이 나타나니까 모든 게 다 흔들리고 있는 거 같아. 내가 내가 아니야.

 

삼촌이야 말로 추억에 사는 구나.

 

윤호가 쓸쓸한 눈빛으로 민용을 바라봤다.

 

추억에 살아?

 

민용이 고개를 갸웃하며 윤호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전에 삼촌이 나에게 그랬잖아. 지금 나는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과거에 붙잡힌 거라고 말이야.

 

민용이 윤호를 바라봤다.

 

삼촌이 지금 그런 거 같아.

 

?

 

지금 삼촌의 마음은 지금 삼촌의 마음이 아니야, 그저 2년 전 아직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던 그 당시의 삼촌의 마음일 뿐이야. 만일 삼촌의 말 대로, 삼촌이 더 이상 작은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삼촌이 작은 엄마를 불쌍하게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청혼하지는 않았을 거야.

 

윤호가 민용의 눈을 바라봤다.

 

삼촌, 자신에게 한 번 물어봐. 정말로 작은 엄마랑 사는 이유가, 단순히 작은 엄마가 불쌍하기 때문인지 말이야. 내가 생각하기에는, 단순히 그런 이유인 것 같지는 않아. 단순히, 정말 단순히 작은 엄마가 불쌍해서는 아닌 거 같아.

 

하아.

 

민용이 한숨을 토해냈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민용이 고개를 숙였다.

 

너보다 나이도 한참이나 많은 삼촌이 이렇게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거 잘 알고는 있는데 어쩔 수가 없다. 나도 내 마음을 전혀 모르겠어.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어.

 

삼촌.

 

지금은 오직 서 선생 생각 뿐이야.

 

민용이 내뱉듯이 말했다.

 

다른 건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아. 지금 내가 생각을 해도 내가 미친 놈 같다는 건 잘 알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신지에게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 되어 버렸어.

 

삼촌.

 

신지가 마음에 없다는 건 진심이야.

 

민용이 쓸쓸히 말했다.

 

서 선생을 진짜로 마음에 담고 있는 지는 전혀 모르겠어.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신지를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라는 거, 그거 하나만큼은 진심이고 확신할 수 있어. 나 신지를 사랑하지 않아.

 

어떻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청혼을 해서 그 사람에게 삼촌의 아이를 가지게 할 수가 있어?

 

윤호가 따지 듯 묻자 민용이 입을 다물었다.

 

삼촌 말 좀 해 봐. 삼촌이 겨우 이런 사람이었어? 한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릴 그런 사람이었어?

 

작작해!

 

민용이 고함을 쳤다.

 

이윤호, 지금 네가 내 입장을 알아? 얼마나 머리가 아프고 복잡한 지 알고 있냐고. 나 너 아니어도 지금 머리가 터져 나갈 지경이니까 제발 좀 그만 해.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알아 들어!

 

무슨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거냐?

 

, 할아버지.

 

윤호의 눈이 커다래졌다.

 

, 여기는 어떻게?

 

어떻게는.

 

순재가 윤호의 머리를 쥐어 박았다.

 

병원 휴게실에서 그렇게 두 사내 놈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말을 할 거라는 생각은 왜 못 해?

 

순재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이민용. 내가 말하는 데 너 절대로 이혼 못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랑 신지 이혼 못 시켜.

 

저는 합니다.

 

민용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 인생이에요.

 

시끄럽다.

 

순재가 민용을 매서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 동안은 아버지가 하라는대로 그렇게 꼭두각시 인형처럼 살아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아버지께서 이루지 못한 꿈의 대가로 살지 않을 겁니다.

 

민용은 다부지게 말했다.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을 아버지가 원하는 길로만 살아왔어요. 제가 원하는 삶을 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요. 모든 것이, 정말 모든 것이 다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그런 방향이잖아요.

 

그게 불만이라는 거냐?

 

.

 

민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도 불만입니다.

 

어째서?

 

순재는 따지듯 물었다.

 

준하 녀석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형을 보니까 더 절실히 느껴졌습니다.

 

민용이 순재를 바라봤다.

 

뭐든지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형과, 뭐든지 아버지가 말을 하는대로만 했어야 했던 저. 누가 더 행복하고, 누가 더 많은 추억을 가지고 살아왔을 지 아버지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모른다.

 

순재는 고개를 저었다.

 

다 너를 위한 거야.

 

.

 

민용은 코웃음을 쳤다.

 

저를 위한 거요?

 

민용의 목소리가 조금은 기이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