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에 살다.
열일곱 번째 이야기
“신지야 정말 미안해.”
민정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앞에 나타나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야.”
신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계속 말 했잖아. 어차피 네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오빠랑 나 우리 두 사람 사이 너무나도 위태위태한 사이었어. 언제 부서지고 무너진다고 해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폭풍 속의 모래 성과 같은 사이였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오빠와 헤어지게 된 게 더 속 시원하고 편한 거 일지도 몰라.”
“그래.”
고개를 끄덕이던 민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 신지야. 지, 지금 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오빠와 헤어지게 되는 게 더 속이 시원하다고?”
“응.”
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해 보니까, 내 고집만 피워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오빠 마음도 조금은 헤아려 줘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네 배에 있는 준이 동생은 어떻게 하고? 아빠랑 엄마가 있어야지 어떻게 되지 않겠어?”
“아니.”
신지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는 거 같아. 어차피 나랑 오빠랑 이혼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이 사랑을 하고 있지 않으면서 억지로 사는 것도 좋은 것 같지 않아. 두 아이도 더 불안감을 느낄 거고.”
“하지만.”
“아니야.”
신지는 미소를 지었다.
“나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어. 곧 오빠가 나와의 생활에 염증을 내겠구나. 그런데 도대체 그게 언제일까? 조금 더 천천히 오면 좋겠는데, 조금 빨리 오는 건 그래도 싫은데 말이야. 하고.”
신지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다가왔을 뿐이야. 어차피 이럴 거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까 무섭지는 않아. 다만.”
“다만?”
민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다시 이혼을 하고 잘 견딜 수 있을까 그게 조금 궁금하기는 해.”
“신지야. 정말 미안해.”
민정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가 괜히 너를 찾아가서 이렇게 된 거잖아. 내가 너만 찾지 않았더라면 너랑 이 선생님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거잖아. 정말 미안해. 내가 너를 찾으면 안 된 건데. 그런 건데.”
“아니라고 몇 번을 말 해야 알아듣겠어?”
신지가 미소를 지으며 민정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너 아니었어도 우리는 결국에는 이혼을 하고 말았을 거야. 오빠와 나는 살을 섞고 산 부부 사이잖아. 우리 두 사람 사이, 정말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어. 진심이야. 너 괜히 달래려고 하는 말 아니야.”
“신지야.”
“솔직히 네가 조금은 원망스럽기는 해.”
신지가 살짝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네가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오빠가 억지로라도 나랑 살지 않았을까?”
신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었던 거 같아. 그저 오빠는 막 터지려고 하고 있던 화산과도 같은 거였어. 네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될 일이야.”
“아닐 거야.”
민정은 고개를 저었다.
“이 선생님 절대로 너 떠날 분이 아니셨어.”
“아니.”
신지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알고 있었어.”
“제 삶 제발 제가 좀 살게 해주세요.”
민용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항상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만 살아왔습니다. 항상 아버지께서 가리키는 방향으로만 달렸다고요.”
“그게 잘못되었다는 거냐?”
순재가 따지듯 물었다.
“나는 너를 위한 거였어.”
“아니요. 아버지는 저를 위해서 저를 그렇게 기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아버지 때문이었죠.”
민용이 슬픈 눈망울로 순재를 바라봤다.
“단순히 아버지의 꿈이잖아요.”
“시끄럽다.”
순재가 민용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래서 지금 네 인생이 망가진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지 않느냐? 남들 다 하고 싶어하는 선생질도 하고 있고, 돈 걱정을 하면서 한 번 살아봤냐? 아무튼 이혼은 절대로 안 된다.”
“아버지!”
“다시 두 사람이 재결합을 한다고 했을 때 나는 분명히 반대했다. 그 때 네가 뭐라고 했더냐?”
“그, 그건.”
민용의 눈이 흔들렸다.
“미친 놈.”
순재의 입에서 욕이 터져나왔다.
“재결합?”
“예. 아버지.”
민용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순재를 바라봤다.
“서로 꼴 보기 싫다고 이혼한 게 바로 엊그제인데 또 무슨 결혼을 하겠다고 이 성화야! 그냥 둘이 지내보다가, 조금 더 있다가 결혼을 해도 될 거 아니냐? 왜 이렇게 서두르려고 그래?”
“그래, 민용아.”
문희가 순재의 옆에서 순재를 거들었다.
“두 사람 사실 이혼한지도 2년도 채 안 되지 않았니? 지금 두 사람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조금 더 있다가, 결혼 이야기 해도 되지 않니?”
“아니요.”
민용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한 번 신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 주었습니다. 더 이상 그 아이 혼자서 아픈 거 보고 싶지 않습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순재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네가 생각하기에 결혼이라는 것이 그리 쉬운 어린애들 장난 같은 줄 알아? 정 둘이 살고 싶으면 동거부터 해.”
“여, 여보.”
“왜?”
문희가 새하얀 얼굴로 순재를 바라보지만, 순재는 무심히 대꾸했다.
“어차피 저 녀석 다시 결혼하고 못 살겠다고 이혼을 한다고 설치는 것 보다는, 동거를 해서 두 사람이 진짜로 맞는 지 안 맞는 지 확인하는 것이 더 속편하고 좋아. 어차피 둘이 살았었잖아.”
“동거도 좋습니다.”
민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혼이 하고 싶습니다.”
“왜?”
순재가 민용의 눈을 바라봤다.
“꼭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느냐?”
“신지를,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잘 지켜주고 싶습니다.”
민용이 간절한 목소리로 답했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아요. 조금이라도 든든하게 신지를 지켜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그냥 동거인이기 보다는 남편인게 더 더움이 될 것 같습니다.”
“후우.”
순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너란 녀석은.”
순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 번 이혼을 했던 사람들은 다시 이혼을 하기도 쉬워. 어차피 두 사람이 잘 맞지 않다는 이야기니까. 너희 둘이 지금 다시 달콤한 연애 생활을 보내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결혼이랑은 달라.”
“압니다.”
“아는 놈이!”
순재가 한심한 듯 민용을 바라봤다.
“그걸 아는 놈이 다시 결혼을 하자고 해?”
“아니까 하겠다고 말씀 드리는 겁니다.”
민용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더 이상 신지 아프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기에, 이렇게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확실히요.”
“여보.”
문희가 살짝 순재의 팔을 잡았다.
“얘가 이렇게 원하는데 그냥 결혼하게 둡시다. 나쁜 것도 아니잖아요. 준이에게도 좋고 말이에요.”
“좋기는.”
순재는 입을 씰룩였다.
“매일 같이 싸울 텐데 뭐가 좋다고, 두 녀석을 다시 같이 살게 내버려 둬? 조금 더 두 녀석이 서로와 지내는 것도 괜찮잖아.”
“당신도 고집 좀 그만 부려요.”
문희가 민용의 편을 들었다.
“얘가 한 두 살 먹은 어린 애도 아니고, 알아서 결혼도 할 수 있는데 당신에게 말을 한 거 보면 당신의 허락이 받고 싶어하는 거잖아요.”
문희가 순재의 얼굴을 바라봤다.
“당신 자식인데 그렇게 못 믿는 거예요? 당신 자식이니까 잘 해낼 거예요.”
“흐음.”
“진짜입니다. 아버지.”
민용이 고개를 숙였다.
“다시는 이혼이나 그런 걸로 아버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민용이 순재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니 한 번만 믿어주십시오.”
“흐음.”
순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말입니다.”
“얘가 이렇게 부탁하잖아요.”
문희가 다시 한 번 민용을 거들었다.
“당신은 당신 자식을 그렇게도 못 믿어요? 당신 자식이 이렇게 약속을 하는데 한 번 못 이기는 척 넘어가주는 거,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알았어.”
순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이혼이니 뭐 그 따위 소리만 지껄여 봐! 내가 가만히 안 둘 테니까 말이야.”
“네.”
민용이 싱긋 웃었다.
“저도 그런 말 하지 않을 겁니다.”
민용의 눈이 반짝였다.
“다시는 신지 아프게 해주지 않을 테니까요.”
“제 생각이 짧았었습니다.”
민용은 너무나도 간단히 말했다.
“지금 생각하니까 그렇게 쉽게 결혼, 하는 게 아니었어요.”
“못난 놈.”
순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란 놈은 항상 그 모양이야.”
“아버지.”
“됐다.”
순재가 민용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더 이상 네 일에 관여하지 않으마. 그게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순재가 윤호를 바라봤다.
“윤호야.”
“네.”
“네 작은 엄마에게 좀 데려다 주련?”
“아, 네.”
윤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재의 팔을 잡았다.
“다시는 네 놈 얼굴도 보지 않고 싶구나.”
“!”
순재는 계단을 내려가고, 윤호는 한 번 슬픈 눈으로 민용을 바라본 뒤 따라 내려갔다.
“하아.”
민용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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