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에 살다.
열아홉 번째 이야기
“그래, 지금 이런다고 해서 변하는 거 하나 없겠지.”
신지가 다시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저 민정아 부탁이 있어.”
“부탁?”
민정이 고개를 갸웃하며 신지를 바라봤다.
“무슨 부탁?”
“어머니랑, 아버지 좀 불러다줄 수 있어?”
“할머니랑 할아버지를?”
“응.”
신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그렇게 원하는 이혼, 내가 한다고 말씀을 드려야지. 안 그랬다간, 오빠만 들들 볶으실 걸.”
“정말로 할 거야?”
“응.”
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억지로 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제발.”
신지가 가볍게 두 손을 모았다.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향해서 사랑을 구걸하면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그런 거 나랑 너무나도 안 어울리는 짓이잖아.”
신지가 씩 웃었다.
“네가 아는 신지가. 그런 거 할 사람으로 보여? 다른 남자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그런 일 말이야.”
“아니.”
민정이 가만히 고개를 젓자 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이해하지 못해도 너는 나를 이해해줄 거잖아. 내 결정 지지해줄 거잖아.”
“그래.”
민정이 무겁게 대답을 했다.
“잠깐 기다려.”
“응.”
민정이 문을 열고 병실을 나섰다.
“할아버지.”
“흐음.”
순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순재를 바라봤다.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여? 어서 말 해. 네 작은 엄마에게 가봐야 하니까.”
“저, 서 선생님 좋아했어요.”
“뭐?”
순재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하아.”
윤호가 한숨을 토해냈다.
“삼촌과 선생님 사랑하고 있을 때, 저도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윤호가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선생님이 저랑 삼촌 곁을 떠나셨어요.”
“허 참.”
순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그게 지금이랑 무슨 상관이야?”
“선생님이, 삼촌 곁 그렇게 떠나시면서, 삼촌 마음 작은 엄마에게 완전히 돌리셨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다시, 다시 바보처럼 삼촌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말았어요.”
“네가?”
“네.”
윤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돌아오셔서 저의 가게에 들리셨어요. 작은 엄마에게 드릴 케이크를 사기 위해서요.”
“후우.”
순재가 한숨을 토해냈다.
“그런데. 삼촌이 왔어요.”
“민용이 자식이?”
“네.”
순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평소에는 너에게 가지도 않는 놈이 어쩐 일로?”
“그리고 저랑 삼촌이랑 말다툼을 했거든요?”
윤호가 쓸쓸히 미소를 지었다.
“그게 삼촌의 감정을 다시 깨운 거 같아요.”
“하아.”
순재가 윤호의 눈을 바라봤다.
“그래서 너는?”
“네?”
윤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순재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 마음은 정리가 되었다는 거냐?”
“그, 그건…….”
윤호가 말 끝을 흐리자 순재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너도 마찬가지구나.”
“………”
윤호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순재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죄송해요.”
“아니다.”
순재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네 잘못은 아니잖느냐?”
순재가 이마에서 식은 땀을 훔쳐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네?”
“네 삼촌과 작은 엄마 이혼 시켜도 괜찮겠어?”
“그, 그건.”
윤호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리자 순재가 그 시선을 외면했다.
“아무리 네가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너를 위해서 내가 민용이와 신지를 억지로 붙잡고 있지는 않을 게다.”
“할아버지.”
“공연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어서 두 사람 사이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
순재가 윤호를 바라봤다.
“너희 네 사람이 할 일이다.”
“할아버지.”
“네 사람의 감정 문제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냐?”
순재가 윤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윤호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을 들어주셔서 다행인 걸요. 그나마 마음이라도 다소 후련해졌으니까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순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민정이 나가자 신지가 한숨을 토해냈다.
“
너무나도 오랜 친구. 소중한 친구, 언제나 함께 해줬던, 고등학교 때 이후부터 쭉 가장 친한 친구.
“하.”
신지가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 당겨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민정아.”
신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까칠했다.
“우리 왜 이럴까?”
신지의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후.”
신지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
마음이 무겁기는 민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 때문에.”
민정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저 할머니.”
“아이고, 선생님. 준이 애미가 뭐 필요하다고 해요?”
“아니요.”
민정이 고개를 드렸다.
“드릴 말씀이 있대요.”
“할 말?”
“네.”
문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민정을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문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선생님은 같이 안 가요?”
“할아버지 찾아야 해서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때마침 순재가 휴게실로 들어왔다.
“!”
“!”
윤호의 민정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무슨 일이시죠?”
“신지가 찾아서요.”
“아.”
순재의 눈에 아차하는 기색이 스쳤다.
“여보.”
“왜?”
문희가 걱정스러운 듯 순재를 부르자, 순재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요?”
“후우.”
순재가 한숨을 토해냈다.
“모르지.”
“흐음.”
문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자고.”
“하지만, 여보.”
“무슨 일 있겠어?”
순재가 문희의 손을 잡아준다.
“가지.”
“그래요.”
문희가 살짝 침을 삼켰다.
“선생님.”
“어?”
윤호가 낮은 목소리로 민정을 불렀다.
“무슨 일이에요?”
“가면 알아.”
민정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안 가세요?”
“가요.”
문희가 재촉하자 민정이 황급히 두 사람 곁으로 뛰어 갔다.
“하아.”
윤호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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