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에 살다.
열여덟 번째 이야기
“할아버지, 정말 두 사람이 이혼하게 두실 건 아니죠?”
“왜?”
순재가 윤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 아니 준이도 있고 말이에요. 이제 곧 준이 동생도 태어날 건데, 그냥 이혼을 하게 둬요?”
“민용이 내가 어쩔 수 없는 아이다.”
순재가 쓸쓸히 말했다.
“저 아이가 그렇게 원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게 해주어야지. 그 아이 말대로 내가 끼어들 일도 아닌데 말이다.”
“할아버지.”
윤호가 발을 멈췄다.
“왜 그러느냐?”
순재가 기이한 듯이 윤호를 바라봤다.
“드릴 말이 있어요.”
“드릴 말?”
순재가 윤호의 눈을 바라봤다.
“나 이혼 할래. 혼자서도 잘 키울 수 있어. 나, 정말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 남편 그런 거 별 거 아니잖아.”
신지가 쓸쓸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싱글맘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민정이 말 끝을 흐렸다.
“이 선생님도 말로는 그렇게 말씀을 하셨지만, 막상 너와 이혼을 하게 된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이 선생님도 자기 아이가 있는데 그렇게 쉽게 너랑 갈라서시겠니? 응? 신지야.”
“아니.”
신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나랑 이혼했잖아.”
“그, 그건.”
“이번에도 내가 말할 거야.”
신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을 먼저 꺼낸 것은 오빠지만, 그 이혼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건 여전히 나야. 나 오빠랑 이혼할래.”
“그게 무슨 말이야?”
민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이혼을 하려고 그래?”
“봤잖아.”
신지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나를 사랑해주지도 않는 사람하고 살 용기가 없어. 그 동안은 없었는데, 이제는 정말 더 없어.”
신지는 고개를 떨궜다.
“더 이상 이 결혼 행복하게 유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없어. 더 이상 그럴 수는 없어.”
신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 싫어.”
“신지야.”
“제발.”
신지의 목이 잠겼다.
“내가 결혼, 한다고. 할 거라고. 말 했을 때 우리 부모님 정말로 나 말리셨었어.”
신지가 한숨을 토해냈다.
“그런데, 그런데 어쩔 수 없어. 없었어. 너무 좋아서. 그 때는 오빠의 청혼이 정말 너무나도 좋았거든.”
신지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그런 게 그게 정말 나를 위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
“신지야.”
민정이 신지의 손을 잡았다.
“너 괜찮겠어?”
“응.”
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도 못 견디면서, 그런 바보 아니야.”
신지가 눈물을 훔쳤다.
“엄마랑 아빠에게 말을 하는 거, 그게 조금 두렵기는 한데, 이혼하는 것 자체는 두렵지 않아.”
신지가 얼핏 미소를 지었다.
“이미 한 번 오빠와 이혼을 했었으니까, 그저 한 번 더 똑 같은 경험을 겪는 거 뿐인데 뭐.”
“하지만, 너 되게 힘들어 했잖아.”
민정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신지를 바라봤다.
“너 그 때도 이혼하고 엄청 아파했잖아.”
“그래.”
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때, 그랬으니까 이번에는 조금 괜찮을 거 같아. 이미 한 번 겪어 본 일인데 뭐, 어때서.”
신지가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그 때만큼 아플 거 아니잖아.”
신지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이미 한 번 그 아픔 때문에 너무나도 힘들었는데 다시 바보처럼 그대로 겪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이혼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민정이 신지의 손을 꽉 잡았다.
“이 선생님 곁에 있으면…..”
“아니.”
신지는 고개를 저었다.
“오빠 내가 잘 알아.”
신지가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 때, 오빠가 한 말 전부 다 진심일 거야. 오빠, 정말로, 진짜로 나에게 더 이상 아무런 마음 없어. 그 사실 확실해. 오빠의 마음이 그렇게 확고히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억지로 조를 수는 없는 거잖아.”
“신지야.”
“나는 괜찮아.”
신지가 겨우겨우 미소를 지었다.
“민정아.”
“응?”
“너 한국에 있을 거지?”
“어?”
“응?”
신지가 다시 묻자 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마도.”
“그래?”
신지가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우리 같이 살자.”
“어? 그, 그게 무슨?”
“나 이혼할 거라고 했잖아.”
신지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게도 너랑 같이 살려면 꼭 이혼을 해야 하는 모양이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그렇잖아?”
어느새 신지의 얼굴에는 슬픔의 기색이 사라져 있었다.
“정말 이혼 할 거야?”
“응.”
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오빠 붙잡고 싶지도 않아.”
“이 선생님은 바라실 지도 몰라.”
“민정아. 제발.”
신지가 민정의 눈을 바라봤다.
“괜히 네가 미안해하고 그럴 필요 없어. 그냥, 너는 아무런 죄도 없는 거야. 다 오빠랑 나의 문제라고, 내가 그 동안 조금만 더 확실히 오빠의 마음을 붙잡았다면 이런 일 생기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내가 나타나서.”
“아니래도.”
신지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잘 된 거야.”
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혼 오히려 잘 된 거야.”
“하아.”
민용이 한숨을 토해냈다.
“이혼 하라고?”
이상하게 섭섭했다.
“후우.”
자신이 원하는 걸 하라고 하면, 아버지가 그러라고 하면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다. 더 이상 아버지가 자신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린다면 홀가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가슴 한 켠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하아.”
민용은 한숨을 토해내며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물었다.
“후우.”
새하얀 담배 연기 사이로 흐릿한 하늘이 보였다.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 답지 않은 밤하늘이 마치 자신의 갑갑한 인생인 것처럼 보였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인생.
“제길.”
민용은 담배를 발로 비벼껐다.
“이혼.”
너무 쉽게 꺼낸 말이었을까?
“아니야. 이혼. 해야 했어.”
민용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이대로 사는 거 행복하지 않을 거야.”
신지의 얼굴이 유난히 하얗다.
“아프잖아.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주지 못하고 서로를 향해 미소 짓지도 못하는 거잖아.”
“지금 이 선생님 잠시 그러시는 걸 거야. 나 때문에, 아주 잠시 그러시는 걸 거라고. 그러니까 내가 도로 떠나면 괜찮아 질 거야. 내가 더 이상 한국에 있지 않으면 그 마음, 아니 잘못된 그 생각 도로 잡으실 거라고.”
“훗.”
신지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억지로 나를 위로할 필요 없어.”
신지의 웃음에 쓸쓸함이 가득 묻어 났다.
“나도 잘 아니까.”
“신지야.”
“슬프지는 않아.”
신지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그저 억울할 뿐이야.”
“뭐가?”
“같은 사람에게 빼았겨서.”
“!”
민정의 눈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너를 원망하고 싶은 생각 하나도 없어. 너는 이미 오빠에 대한 마음 모두다 지워버린 거 보이니까.”
신지가 가만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민정아.”
“응.”
“너 내 가장 소중한 친구인데 가끔 네가 미워.”
“…….”
민정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러면 안 되는 거 내가 잘 알고 있거든. 너에게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잘 알고 있는데, 그런데.”
신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내 가장 소중한 친구가, 두 번 씩이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간다는 게 나 너무나도 미워.”
“아니야.”
민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그래.”
신지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겠지.”
“신지야.”
민정은 슬픈 눈으로 신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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