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물도 맞추는 남자, 밥물도 못 맞추는 여자
17
“우리 오늘 술이라도 먹으러 가야 겠어요.”
“술은 갑자기 왜요?”
“좋은 날이니까요.”
선재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을 하자 은비는 입을 가리고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오늘이 좋은 날일까?
“우리 두 사람 모두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일을 그만 둔 거잖아요. 이제 우리 매일 데이트를 할 수 있겠다.”
“아니요.”
은비는 재빨리 왼손 검지를 들어서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은비의 태도에 선재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요?”
“우리 아직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요.”
“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고 했잖아요?”
“그건 그거죠. 떠올랐다고 해서 무조건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선재 씨 설마 그렇게 어린 사람은 아니죠?”
“에? 너무 한다.”
선재가 잔뜩 울상을 짓자 은비는 쿡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귀여운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내가 뭐가 너무한 건데요?”
“아니, 사람 마음 막 설레게 했다가, 다시 뚝 떨어뜨리고, 진짜 무슨 조련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조련 하는 거 맞아요.”
“네?”
선재가 고개를 갸웃하며 은비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선재 씨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내가 선재 씨를 좋아한다고 메달린 게 아니라고요. 선재 씨가 나를 좋아한다고 한 거니까. 그 말에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뭐라고요?”
선재가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연애를 하더라도 내가 약자여야 한다? 늘 은비 씨의 비위를 내가 맞춰줘야 하는 거다?”
“물론이죠.”
“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선재는 두 손을 번쩍 들며 고개를 저었다.
“연애라는 것은 상호에 신뢰가 바탕이 되는 관계로, 그런 일방적으로 밀어 부칠 수 있는 관계는 아니죠.”
“싫으면 말던가.”
은비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선재를 바라봤다.
“거듭 말하지만 말이죠. 지금 우리 두 사람이 더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내가 아닌 것 같은데?”
“완전 치사하다.”
선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이런 여자가 어디 있어? 내가 여자를 많이 만나봤지만, 이런 여자는 생전 처음 만나보네.”
“어머. 여자를 많이 만났어요?”
“그럼요. 내가 아무렴 누군데요.”
선재가 짐짓 뽐을 내는 흉내를 하자 은비는 가만히 미소만 지었다. 너무나도 달랐다고 생각이 된 이 사람이 너무나도 가까웠다.
“진짜 권선재 씨랑 이야기를 하면 너무나도 어이가 없다니까. 세상에 제 앞에 있는 여자를 좋아한다면서, 자신이 여자를 많이 만났었다고 자랑을 하는 사람은 권선재 씨 하나 밖에 없을 거야.”
“그러니까 특별한 거죠.”
“그런 특별이면 사양할래요.”
“에이, 그래도 사양은 안 됩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뭐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어요? 내가 다 들어줄게요.”
“그런 건 없어요. 오랜 만에 쉬는 거라서 그냥 휴식을 취하고 싶어요. 편하게, 그냥 있고 싶다고 해야 하나?”
“나랑 같네요.”
“선재 씨도 휴식이 필요하다고요?”
“그럼요.”
선재가 금새 피곤한 표정을 지으면서 테이블에 누웠다.
“대한민국에서 나 만큼 열심히 일을 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아우,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요.”
“네?”
갑자기 쓸쓸해진 은비의 말투에 선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선재 씨는 선재 씨가 원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행복해야 하는 거죠.”
“그럼 다른 사람들은 안 그래요?”
“당연하죠.”
은비의 말투에 선재는 가만히 그녀를 살폈다.
“내가 특별한가?”
“많이.”
“정말로요?”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에서 일을 하는 사람 중에서 정말로 자기가 하고 싶어서 일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면 언젠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하는 걸 거예요. 그러니까 선재 씨는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을 너무나도 쉽게 하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그건 아니다.”
“뭐가요?”
“쉽다는 거.”
선재가 미소를 지으면서 은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나도 되게 힘이 들어요. 나도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확신이 없고 그러거든요. 그리고 정말 내가 이 일을 잘 하는 지에 대해서도 늘 의문이 들곤 해요.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이 이거라서 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그것을 내가 잘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줄 아는 재주가 그것 밖에 없다는 의미에 잘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늘 너무나도 외롭고, 너무나도 두려워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을 내가 잘 하는 것이 아니면 나는 어떻게 하는 거지? 이 일이 내 일이 아니라면, 도대체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나는 나에게 어울리는 일을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거지? 평생을 걸쳐서 그 일을 찾지 못하고 평생 이런 일만 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걸 하면서 나는 정말로 행복하다고 할 수가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은 나 역시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을 안 하면 좋겠어요.”
“그렇구나.”
은비가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도 별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아 좋다.”
“뭐가요?”
“권선재 씨도 평범해서.”
“쿡.”
선재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많이 말을 했었는데, 그 말 제대로 안 들은 건 조은비 씨잖아요?”
“그래요. 다 내 잘못이지.”
“뭐 마실래요?”
“나가요.”
“네?”
선재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곳에 들어와서 아무 것도 시키지 않고 나간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그였다.
“그래도 여기에 있었는데.”
“그런 게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고 싶지 않은데 말이에요. 우리 두 사람의 자유를 기념을 해야 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 두 사람의 자유를 기념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어떻게요?”
“우리 두 사람이 사귄다는 기사가 나는 것은 별로 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권선재 씨가 얼굴 하나도 가리지 않고, 지금 그 얼굴 그대로, 내가 바로 권선재다. 라고 나타내면서 길거리를 걸었으면 좋겠어.”
“네?”
선재는 가만히 은비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걸 왜 이 여자가 바라고 있다는 것일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내가 왜 이런 말을 한 건지 궁금하죠.”
“네.”
선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내 소원일 텐데.”
“그러니까요.”
“네?”
선재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은비를 바라봤다. 그건 또 무슨 말일까?
“내 소원인데 왜 은비 씨가 그 소원을 빌어요?”
“당장 그곳에서 나오고 싶은 것은 내 소원이었는데 말이에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확실하지가 않아서 말이에요. 그러니까 일단 권선재 씨의 소원부터 들어주고 싶어요. 그리고 나서 내가 뭘 원하는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다가 내가 원하는 것을 다시 하면 되는 거니까 말이에요.”
“오케이.”
선재는 밝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멋진데.”
“그럼 나가요.”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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