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물도 맞추는 남자, 밥물도 못 맞추는 여자
18
“조심해서 들어가고, 내가 한 말 생각을 해봐요. 은비 씨도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알았죠?”
“네.”
은비는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선재 씨도 조심해서 들어가요.”
“나야 뭐. 집에 들어가면 전화를 할게요.”
“네.”
선재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은비는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와 있고 나니 어느 정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들어와?”
“어? 왔어.”
채연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은비를 바라봤다.
“다시 레스토랑에 출근을 하는 건 어때? 그렇게 급하게 그만 둘 것은 없잖아. 아무리 오래 걸려도 일주일이면 새로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왕 나가는 것 좋게 나가면 되는 거잖아.”
“아니.”
외투를 벗으면서 은비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안 나가.”
“나쁜 년.”
“어?”
순간 채연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은비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입이 다소 거칠기는 했지만 그래도 욕을 하지는 않는 채연이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너 나쁜 년이라고.”
“내, 내가 뭘?”
은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에게 뭐라고 하는 거야?”
“너 정말 나빠. 네가 그런 식으로 나가면 우리 레스토랑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니? 그리고 너를 아르바이트로 추천을 해주었던 나는 뭐가 되는 거니? 너는 무슨 애가 자신이 저지른 일도 책임도 지지 않고 나가려고 하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너무 한 거 아니야?”
“채연아.”
“너 정말 너무 해.”
채연은 가만히 은비를 바라봤다.
“우리 사장님도 네 걱정을 하더라. 솔직히 말을 해서 나는 네가 왜 그렇게까지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어. 그 상황에서 사장님께 그렇게 행동을 하신 것은 당연한 일 아니야? 너로 인해서 고객이 불편을 겪었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주방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건데, 너는 너밖에 생각을 하지 못하니? 그리고 너 말이야. 옷을 왜 발로 밟은 건데? 그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 행동인데!”
“내가 뭘 어쨌다고! 너는 내 친구잖아. 사람들이 다 뭐라고 해도 너는 내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거잖아.”
“아니.”
채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내가 네 친구라고 하더라도 네가 아닌 건 아닌 거야. 최소한은 지켰어야 하는 거잖아. 은비, 너는 참 다 좋은데, 그 다혈질이 문제야. 늘 화를 내고 그러는 것이 문제란 말이야. 왜 그렇게 너를 못 참는 건데? 그 상황이 그렇게 화를 내야만 하는 상황은 아니었던 거잖아. 그런데 네가 너무 간 거잖아.”
“좋아.”
은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채연의 말에 동의를 했다. 그녀가 생각을 하더라도 자신이 더 나간 부분이 있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조금 심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레스토랑에 나가지는 않고 싶어.”
“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니까.”
“은비야.”
“아직은 모르겠어. 하지만 채연아. 권선재 씨도 나를 응원을 해주었단 말이야.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네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너는 내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거잖아.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다 나에게 등을 돌린다고 하더라도, 채연이 너는 내 편이어야 하는 거잖아. 권선재 씨도 내 편을 들어주는데 네가 내 편을 안 들면 안 되는 거잖아.”
“그래서 안 드는 거야.”
채연은 가만히 은비의 눈을 바라봤다.
“모두 다 너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을 거잖아. 그러니까 너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잖아. 권선재 씨가 지금은 무조건 너를 믿어주고 있으니까, 지금은 권선재 씨가 무조건 네 말이 맞다고 해주고 있으니까, 내가 아니라고 해줄게. 권선재 씨가 있으니까 내가 아니라고 해줄게.”
“채연아.”
은비는 가만히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모두가 다 그녀의 편을 들어줄 수는 없는 거였다.
“아무튼 나는 싫어.”
“알았어.”
채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비는 한 번 자신이 하고자 한 일은 절대로 누군가가 부춘기다고 해서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채연이라면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겠지만, 은비는 채연이 아니었기에, 채연은 그저 그녀의 선택에 동의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네가 고생이겠네.”
“고생은.”
“네가 나를 추천을 해서 내가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던 거니까. 사람들은 너랑 나랑 친구인 것을 다 알잖아. 채연아 그 동안 정말로 고마웠어. 진ᄍᆞ 내가 늘 너에게 폐만 끼치고 사는 것 같아.”
“폐는 무슨.”
“늘 폐지.”
채연은 그제야 겨우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권선재 씨는 무슨 네 편을 들어주었다는 거야?”
“글을 써보라고 했어.”
“글?”
채연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은비를 바라봤다.
“갑자기 글은 왜?”
“내가 선재 씨보고 부럽다는 이야기를 했었거든. 그러니까 소설을 쓰는 것은 하나도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나보고도 소설을 써보라고 하더라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만큼 도와주겠다고.”
“그래 너는 잘 할 거야.”
“내가 무슨.”
은비는 수줍게 웃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그런 재주나 있니?”
“왜? 너는 학교에서 시를 써서 백일장에서 넷북을 받은 적도 있잖아. 너 정도 실력이면 소설은 어렵지 않을 걸?”
“그래도 다르지.”
“다르기는.”
채연은 생글거리면서 은비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런 건 내가 네 편을 들어줄게.”
“진짜지?”
“물론이지.”
“아 다행이다.”
은비도 채현을 향해서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원주연 씨가 권선재 씨에게 사과를 하고, 자연스럽게 다시 드라마에 합류를 했으면 하는데.”
“사과요.”
주연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의 매니저를 바라봤다.
“오빠 국장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옳은 거예요?”
“상황에 따라 다르지.”
“하지만 나는 사실만 이야기를 했는 걸. 저는 국장님 편이어서 하나도 거짓말이 없었단 말이에요.”
“그, 그거야 그렇지.”
국장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사실 살짝 빗나간 시선에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
“어머, 그래서 국장님은 제 탓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언제 권선재 선배 나가야 한다고 했나요? 그런 건 아니잖아요. 국장님께서 이러시면 저 되게 서운해요. 다른 드라마도 많았는데 다 안 된다고 하고, 겨우 출연을 하고 있다는 거 국장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저처럼 어린 친구들은 드라마를 할 때 이렇게 긴 호흡의 작품이 아니라 짧은 호흡을 한다는 것도 아시잖아요.”
“알지, 다 알아.”
“그런데 제 탓을 하시는 건 너무해요.”
“그러니까 원주연 양의 탓이 아니라니까.”
국장은 여간 난처한 것이 아니었다. 원주연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평소에 드라마 현장을 어지럽히는 것은 그와 부딪혔던 권선재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눈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원주연이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권선재의 편을 들고 싶은 것이 아니라 원주연의 편을 들고 싶었다.
“아무튼 나도 체면이라는 것이 있고, 우리 방송국도 그러한 입장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자네 선에서 무마를 해달라는 거지.”
“저는 손해만 보잖아요.”
주연은 잔뜩 울상을 지으면서 일부러 혀가 짧은 소리를 냈다.
“다른 사람들이 저를 얼마나 나쁜 아이로 보겠어요. 국장님은 제가 그런 취급을 받으면 좋겠어요?”
“아니지. 암.”
“그런데요?”
“적당한 선에서 어떻게든 마무리가 되게 해주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 방송국에서 작품을 계속 할 수 있는 계약서도 쓰고 말이야.”
“계약서요?”
주연의 눈빛은 순간 바뀌었다. 한 방송국과 일정 분량 이상 계약서를 쓰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었다. 어딘가 계속 등을 비빌 수가 있다는 거니까, 일이 들어오지 않더라도 안심이 되곤 했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제 막 떠오르는 그녀에게는 이러한 계약이 부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럼 이건 어때요?”
“어떤?”
“앞으로 드라마 다섯 편을 하겠지만, 그 사이에 다른 방송국의 드라마를 해도 무방하다고 말이에요.”
“그런 계약이 어디에 있는가?”
국장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계약을 한다면 앞으로 다섯 편은 연속으로 우리랑 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겠지.”
“에이, 그건 제가 너무나도 손해잖아요. 국장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이제 막 떠으르고 있는 스타인데 그러면 안 되는 거죠. 저 독점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효과가 있을 텐데, 정말로 그러실 거예요?”
“그래도 안 되는데.”
국장은 입맛을 다시면서 주연을 바라봤다. 그녀의 말처럼 주연은 이제 막 떠오르고 있는 스타였다. 앞으로 몇 작품은 더 관심을 끌 수 있었지만, 다섯 작품을 넘기기는 어려워 보였다. 아무리 봐도 그녀는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국장의 눈 앞에 있는 주연은 몇 작품의 미니시리즈가 한계일 수 밖에 없었다.
“오빠, 그럼 내가 이거 해야 해?”
“글쎄다.”
매니저도 묘한 표정으로 국장을 바라봤다.
“국장님 저희 주연이 정말 클 아이입니다.”
“알지, 아는데.”
국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한 계약 같은 경우 정말로 톱스타들에게만 하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이제 막 떠오르는 스타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도 파격적이어서 다른 이들 같았으면 감사합니다. 하면서 넙죽 받았을 텐데, 요즘 한참 인기가 있다는 이유로 주연은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있었다.
물론 국장의 마음으로는 아무리 그녀가 재고 있다고 하더라도 계약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과 같았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지금의 매력은 적을지 모르지만, 계속 드라마를 하다보면 하나가 다시 터질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다시 그녀가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을지 몰랐다. 잠시의 흔들림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으면서도, 완전히 김이 빠지지 않는 다섯 편 연속 계약이 국장의 마음에는 가장 우선이었지만, 주연이라면 그보다 조금 못한 조건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국장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한 배우를 방송국에서 전속으로 묶는다는 것은 더 높은 곳에서도 허락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또한 배우가 다음 작품에서 실패를 한다면 남은 작품도 모조리 실패를 할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다른 방송국에서 출연을 한다고 하면 일도 꽤나 복잡해지곤 했었다.
“일단 그 부분은 더 생각을 해보지.”
“그럼 저도 사과는 생각을 하겠습니다.”
“흐음.”
국장은 미간을 모았다. 만일 선재가 빠른 시간에 합류를 하지 않는다면 드라마는 파국으로 치닿을 수가 있었다.
“오늘 내로 연락을 주지.”
“알겠습니다.”
주연은 미소를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국장님 쉬세요.”
“그래.”
주연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 국장실을 나섰다. 국장실을 나서자마자 주연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아우 짜증나.”
“조용히 좀 해.”
“내가 뭘?”
매니저는 안절부절하면서 주연을 바라봤다.
“국장실에 다 들리겠다.”
“들리라고 하시지.”
주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보고 사과를 하라고?”
“일단 지금은 너보다 더 인기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 시청률을 견인을 하고 있는 거잖아.”
“웃기시네.”
주연은 못 마땅하다는 기색을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냈다.
“지금 나 때문에 우리 드라마 보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런데도 그게 말이나 되는 거야?”
“안 되는 거지.”
매니저는 최대한 주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 국장님께서 그렇게 이미 결정을 내리신 것 같은데 말이야. 안 그래?”
“그러니까.”
주연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을 내밀었다.
“게다가 권선재 그 사람은 나를 되게 싫어한단 말이야. 내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랑 일을 해야해? 내가 이 자리에 오르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그건 다 그런 사람들하고 일하기 싫어서란 말이야.”
“알지. 알아.”
“그런데?”
“미안하다.”
매니저는 어이가 없었지만 계속 주연의 말에 대꾸를 해주고 있었다. 주연이 아무리 지금 잘 나간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권선재에게 될 것은 아니었다. 그쪽은 탑이었고, 이쪽은 말 그대로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지는 태양도 아니고 정오의 태양처럼 쨍쩅하게 해를 내리쬐고 있는 그쪽은 확실히 거물이었다.
“아무튼 우리가 사과는 해야 할 것 같다.”
“아우 자존심 상해.”
주연은 너무 분한 나머지 발을 동동 굴렀다.
“내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해?”
“일단 우리가 더 약자니까.”
“우리가 왜 약자야?”
주연은 매니저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솔직히 내가 없으면 이 드라마가 제대로 돌아가기는 할 것 같아? 아니야, 내가 있어서 잘 돌아가는 거라고.”
“맞지 맞아.”
매니저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를 했다. 그녀의 말처럼 그녀 역시도 그리 작은 역할은 아니었다.
“그런데 국장님은 권선재 씨 역성만 드시니까, 하여간 노인네들은 저래서 말이 안 되는 거야.”
“노인네라니.”
“맞잖아.”
주연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그 노인네는 몸도 엄청나게 사리고 말이야. 이번에도 결국에 자신이 일을 다 저지른거면서 우리에게 다 떠넘기고. 언제까지 우리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야? 도대체 내가 아직도 신인 여배우로만 보이는 건가? 다른 방송국에서 나 데리고 가려고 난리난 거 정말로 모르는 거래?”
“아직 드라마가 하고 있는 중이고, 너도 데뷔를 한지 그리 오래 된 것은 아니니까 그러시는 거겠지.”
“하여간.”
주연은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도 알지? 최대한 내 예쁜 이미지가 망가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거 말이야. 기자회견 조심해서 준비해.”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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