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시계가 묘하게 거슬리는군요.”
한참 만에 입을 연 사내의 시선은 가만히 시계로 향했다. 의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계를 바닥에 내려놓은 후 그대로 밟아 부숴버렸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동시에 사내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커피 잔을 매만지고는 잔을 들까 말까 망설이다 그대로 멈추었다.
“나에게 궁금한 것이 무엇이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셨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그 말이 묘하게 거슬리는 군.”
의사는 눈썹을 모으고 허리를 앞으로 숙여 앉았다. 사내는 빙긋 웃더니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서 의사가 자시에게 가까워진 거리만큼 뒤로 물러난 다음 가만히 의사를 응시했다. 기다란 털이 난 검지로 자신의 오른쪽 손목시계를 두드리다 짧게 헛기침을 했다.
“이건 생각이 아니라 진실이오.”
“우리들이 누군가의 소설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요?”
“그렇소.”
“그렇군요.”
의사는 차트를 소리가 나게 한 번 펜으로 두드린 후 다시 뒤로 기대 앉아 무언가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내는 적당한 거리가 되었다고 생각을 했는지 다시 자세를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커피의 표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단 한 번도 그러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거요?”
“우리는 우리 멋대로 살고 있는 것인데 누구의 글에서 살고 있다뇨.”
“그래서 당신이 그런 배역밖에 받지 못한 거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무언가 말을 하려던 사내는 기다란 검지를 자신의 입으로 가지고 가서 눈을 감더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의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가만히 사내를 바라보다 몸을 한 번 뒤척였다. 소파에서 삐그덕 소리가 나고 사내는 눈을 뜨고 깊은 숨을 내뱉었다.
“단 한 순간도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묘하게 빠르게 흐르고 있다거나 묘하게 순리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거요?”
“그런 생각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을 해서 말이죠. 그럼 여기에는 왜 들어오신 건지 아시는 겁니까?”
“알고 있소.”
“사람을 죽이셨습니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니오.”
의사는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사내를 노려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이미 소설 속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 사내에게 별다른 것을 묻는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것도 없을 터였다. 사내는 그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현실이라는 것처럼 행동을 하면서 동시에 현실이 아니라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지금도 본인이 무죄라고 주장을 하시는 겁니까?”
“무죄라고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죄입니다.”
“길을 걷는 무고한 여인에게 칼을 찔렀습니다.”
“그 여인도 이미 알고 있었소.”
“그게 무슨?”
“당신도 의사니 알 것이 아니오. 나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다 가지고 있을 테니. 내가 거기에서 그녀에게 칼을 찔러넣는 그 순간. 그녀가 잠시라도 머뭇거렸다. 그러한 말들이 거기에 적혀 있소? 내가 알기로는 그러한 글들은 그 차트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의사는 입을 한 번 씰룩이고는 차트를 넘겼다.
“기다렸어요. 도대체 언제 나를 만나러 올까? 우리가 언제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참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다시 또 기다렸는데 드디어 이 순간에야 우리가 만나게 되었군요.”
여인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사내를 바라봤다. 칼을 든 사내의 손이 벌벌 떨리자 여인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사내에게만 보이게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가 하나도 없다는 것 알고 계시잖아요. 이미 이 모든 것들은 다 계획이 되어 있던 것들이에요. 우리들이 하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니고 피할 수 있는 것들도 아니죠. 이미 이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계획 속에 완벽하게 들어 있는 것이니까요.”
여인의 두 손이 사내의 손을 붙들었다. 사내의 눈이 커다래졌지만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손을 자신의 배로 그대로 이끌었다. 불쾌한 촉감에 사내는 칼을 놓고 싶었지만 여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럴 운명이에요. 그냥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죽임을 당할 운명이죠.”
“이건 아니야. 그럴 리 없다고.”
“당신도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여기에 왔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 고통이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끌었다. 사내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힘을 주어 그 칼을 빼내려고 했지만 여인의 힘이 사내의 힘을 압도했다. 피라고 생각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선명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여인의 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이 바닥에 고이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들을 막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
“이건 미친 거야.”
“당연한 거예요.”
“왜 아무도.”
“이게 운명이니까요.”
“나는 이런 것을 바라지 않아.”
“이미 적혀 있어요.”
사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여인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그리고 천천히 여인의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사내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단단히 배에 물린 칼은 그리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내가 있는 힘껏 칼을 뽑아든 그 순간 왈칵 피가 솟아나 사내의 얼굴에도 튀었다. 여인은 힘겹게 팔을 올려 소매로 사내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더럽게.”
“오늘 저녁에는 귤 두 개와 아메리카노를 마셔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죠?”
카페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던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의 청년은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아무 물음도 없이 그녀의 앞에 앉았다.
“누구시죠?”
“아닌가요?”
“누구시냐고요.”
“내가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당신이 그냥 쉽게 믿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대요? 아무튼 오늘 저녁은 그냥 굶고 귤 두 개랑 아메리카노나 마시려고 하는 거죠? 연하게.”
“아니거든요.”
여인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애써 숨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리 나게 노트북을 두드리고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청년이 여인의 소매를 붙들었다.
“궁금하지 않아요?”
“뭐가 궁금하다는 거죠?”
“내가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말이에요. 그래도 그 정도는 궁금해 할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어떻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인지는 알아야 할 걸요? 아니면 집에 가서도 계속 궁금할 거잖아요.”
“좋아요.”
여인은 청년의 손을 뿌리치고 가만히 눈을 들여다보았다. 잘 해야 스물 중반. 꽤나 하얀 피부는 그다지 밖에 나가지는 않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의 살짝 걷어진 소매에 드러난 힘줄은 운동마저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 어디 가서 뭐라도 먹죠?”
“그건.”
“내가 살게요.”
청년은 눈을 찡긋하고는 다시 여인의 팔을 붙들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안 잡아먹으니까.”
청년의 집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옥탑. 이 동네에도 이런 곳이 있었던 것일까? 처음에 어색한 표정이었던 여인은 가만히 집을 둘러보았다. 옥탑이라고는 하지만 방도 두 개 거실과 주방도 나름 구분이 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남자 혼자 사는 곳이라고 생각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깔끔한 편이었고 창문 하나 없는 벽은 대신 온통 책장으로 가득 차서 빈틈도 없이 빼곡하게 책이 꽂혔다. 그나마 꽂히지 못한 책들도 눕혀서 이곳저곳 자리를 차지했다.
“책이 좀 많죠?”
“그러네요.”
“워낙 혼자서 하는 것을 좋아해서요. 그리고 다른 것보다 책이 가장 즐겁고요. 식사는 뭐 딱히 가리는 것은 없죠?”
“네.”
“그럴 줄 알았어요.”
오일만으로 만든 파스타와 물에 데친 소시지를 보고 여인은 살짝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포크를 들었다. 배가 고팠다. 하지만 늘 혼자서 먹는 식사가 불편했기에 카페에서 밤 늦은 시간까지 머물다 들어가는 그녀였다. 따끈한 파스타는 의외로 맛이 좋았다.
“괜찮은 편이죠?”
“그러네요.”
“올리브오일에 다진 마늘을 정말 많이 넣는 것이 포인트에요. 마늘 향이 파스타에 잔뜩 풍기면서 맛이 괜찮은 편이거든요. 뭐 조금 강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마늘은 다들 좋아하잖아요. 아닌가?”
“괜찮은 편이에요.”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고 부지런히 포크를 움직였다. 음식이 바닥을 보이고 청년이 들고 온 와인까지 한 잔 마시고 나니 여인은 더더욱 청년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편안함이 묘하게 낯설게도 느껴지는 그녀였다.
“우리는 어차피 만날 운명이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안 믿는 건가요?”
“그런 말을 믿을 리가.”
“다 적혀 있거든요.”
“네?”
“그럴 줄 알았어.”
청년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면서 혀를 살짝 내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을 한참이나 살폈다. 그리고 도대체 언제나 무슨 말을 할까? 생각이 될 쯤이 되어서야 겨우 책을 한 권 뽑았다. 마치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표정을 지으며 책을 내미는 청년을 보며 여인은 당혹스러웠다. 둘 사이에 어색한 시선 교환이 있고 청년은 입을 쭉 내밀고는 자리에 앉았다.
“읽어요.”
“이걸요?”
“우리의 모든 것이 적혀 있거든요.”
결말이라는 새하얀 책은 꽤나 두꺼운 편이었다. 여인이 머뭇거리고 있자 청년이 그녀의 손을 빼앗아서 책 가운데를 펼쳐주었다. 여인은 잠시 청년에 시선을 머물다가 이내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글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여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리가 나게 책을 덮고 여인은 두려운 눈으로 청년을 응시했다.
“이게 뭐죠?”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적혀 있는 책이죠. 신기하죠? 나도 그 정도로 모든 것이 다 적혀 있는 것이 가능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거든요. 하지만 그 책에는 우리 두 사람이 고스란히 다 담겨 있더라고요.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나 갈래요.”
“거기에 적혀 있지 않았어요?”
가방을 들고 나가려던 여인이 멈칫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멈칫한다는 것까지도 거기에 적혀 있을 거였다.
“이 책을 줄게요.”
여인은 두려운 눈으로 청년을 바라봤다.
“그 책에 더 이상 내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거든요.”
“그럼 내 이야기는 여기에 적혀 있다는 건가요?”
“아직은요.”
여인은 책을 내려놓으려 했지만 청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책을 가지고 가야만 해요. 결국 누군가에게 이어지고 다시 또 이어질 수밖에 없는 책이니까. 그리고 그 책을 통해서 나는 당신에게 이어져야만 하는 거니까.”
“내가 만일 이 책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당신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을 낼 거예요.”
“네?”
“내가 아니라 당신의 이야기가 거기에서 끝이 난다는 거죠.”
여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배어나오고 비릿한 향이 퍼졌지만 여인은 멍하니 청년을 바라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청년 역시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여기까지였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나건 그것을 선택을 하는 것은 여인의 몫이었기에 청년이 끼어들 수가 없는 문제였다.
“그런 거라면 당신은 내가 이 책을 가지고 가지 않기를 바라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그 책에는 당신이 그 책을 가져가고 내가 끝이 난다고 적혀 있으니까요.”
“아니 하지만 고작 책에 한 줄의 문장으로 적힌 거라면 그걸 지키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요. 우리가 마치 누군가의 연극 무대에 올라온 배우들이 아닌 이상 이 책에 적힌 그대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요? 그냥 모른 척 하고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움직이면 되는 것 아니에요? 도대체 모든 것이 다 적혀 있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나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어요.”
청년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편안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깨닫고 난 이후 누군가에게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서 담담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처럼.
“지금은 내가 무슨 말을 하건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그 책을 가지고 가게 된 이후에는 결국 내 말을 믿을 수 있게 될 거예요. 나 역시 당신과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나는 당신보다 더 아프게 그 책을 억지로 받아들었으니까요.”
“나는 싫어요.”
여인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동시에 책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묘한 이끌림. 절대로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청년은 그런 여인을 보며 빙긋 웃었다.
“가지고 가요.”
“하지만.”
“나는 이미 내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으니까.”
“그 누구도 그것을 어긴 적이 없다면 누구 하나 그것을 어겨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래야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기는 건지 알 수 있는 거죠.”
“그런 것도 다 책에 적혀 있어요.”
“네?”
“나는 이미 다 읽었으니까.”
“내가 무엇을 하던?”
“당신이 무엇을 하건.”
여인은 잠시 청년을 바라보다가 마치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그곳을 빠져나갔다.
“괜찮아요?”
“이걸 가져요.”
“네?”
청년은 죽어가는 소년을 보며 주위를 둘러봤다. 오토바이 잔해만 있을 뿐 소년을 치고 간 차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청년과 다르게 소년은 꽤나 담담한 모양이었다. 소년은 청년의 팔을 붙들고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 책을 가져요.”
“지금 일단 구급차를 불러야.”
“아니요.”
소년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청년은 이상하게도 피가 하나도 묻지 않은 책을 받아들었다. 약간의 무게에 당황하는 사이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는 내가 죽는 순간을 미리 알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도 내가 죽기 전에 무슨 준비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답답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내가 끝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무슨 준비나 정리 같은 것을 할 수 없어요. 오히려 조금 더 무기력해지죠.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을 마지못해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거예요. 내가 이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버리니까. 슬프지만. 방법이 없는 거죠.”
“일단 말을 더 하지 마요. 피를 조금이라도 덜 흘린다면. 그러니까 일단 구급차. 구급차부터 불러야 하는 거죠.”
“구급차를 불러도 소용이 없어요.”
“아직 모르는 거죠. 그건 내가 의사가 아니니까.”
“이미 다 적혀 있으니까.”
“네?”
청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오히려 다친 소년의 얼굴은 더욱 편안했다.
“그렇게 호들갑 떨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는 어차피 죽을 사람이고 당신과 여기에서 만날 거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게 무슨.”
“모든 것은 이미 다 정해져 있으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병원부터 가서 이야기를 해요. 그 다음에는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건 내가 다 들어줄게요. 일단 구급차부터 부르고. 그리고 나서 이야기를 하라고요.”
청년이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소년이 힘을 주어 그것을 옆으로 밀쳐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말했잖아요. 그런 짓을 해도 아무런 소용은 없을 거라고요. 나는 어차피 죽을 사람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내가 죽는 모습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아니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봐줄 그런 사람이고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좋아요.”
소년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전화기를 가지고 와요. 그래야 뭐 신고라도 할 테니까.”
청년은 잠시 물끄러미 소년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슨 말이라도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고개를 젓고는 저 멀리 풀숲에 떨어진 그것을 주우러 향했다. 그동안 소년은 행복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정말로 온 거야?”
“내가 온다고 했잖아.”
“오지 말라니까.”
소녀는 민머리를 감추기 위해서 모자를 더욱 꾹 눌렀다. 소년은 그런 소녀를 잠시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제 무한도전 봤어? 유재석이 말이야.”
“내일은 오지 마.”
“어?”
“내일은 와도 나 없을 거야.”
“퇴원하는 거야?”
“아니.”
소녀는 그 어느 순간보다도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마 죽을 거야.”
“그런 말이 어디에 있어.”
소년은 순간 얼굴을 구겼다. 단 한 번도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상대. 그런 소녀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너 지금도 꾸준히 치료하고 있잖아. 그리고 아줌마한테 들으니까 효과도 꽤나 있는 편이라고 말씀을 하시던데?”
“사람이 죽는 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야. 나만 특별하게 죽는 거 아니라고.”
“아니, 그래도 너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 싫어.”
“그래?”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실은 여전히 자신이 죽는다는 거였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소년이 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나는 참 다행이야.”
“도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건데?”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도대체 언제 죽을지를 몰라서 그것을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하잖아. 그래서 천천히 그 죽음으로 빠져 들어가지. 하지만 나는 내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거야. 그리고 미리 너에게 마지막이라고. 이제 안녕.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고. 만일 내가 죽는다는 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미리 준비 같은 것은 전혀 하지 못했을 거야. 이게 마지막이니까.”
“그런 말 하지 말래도.”
소년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잠시 소녀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병실을 나섰다.
“그래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
소녀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조금의 답답함. 그리고 홀가분함.
“이게 시원섭섭하다는 거구나.”
더 이상 세상에 미련 같은 것은 없었다. 소녀가 철이 들고 나서부터 늘 병원에서만 살고 있었으니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설령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리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기분이었다. 다만 소년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괴로워할까 그것이 오히려 걱정이었다.
“이런 거구나.”
청년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은 유난히 달이 밝은 날이었다. 어쩌면 그 어느 날보다 죽기 좋은 날일지도 몰랐다. 허무한 기분. 어쩌면 다행이라는 기분. 미리 알게 되어서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청년은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마지막 순간. 이런 거구나.”
청년이 물을 끓이기 위해서 올려두었던 주전자에서 들리던 요란한 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후 펑 소리와 함께 어두운 동네가 소란스러워졌다.
“그 모든 것이 이 책에 적혀 있다는 거죠?”
“그렇소.”
“그렇군요.”
의사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봤다.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얼굴이면서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느껴지는 그런 얼굴에 의사는 불쾌함을 느꼈다. 분명히 지금 이 공간 안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의사인 자신이 편하게 느껴져야 하는 공간이었지만 반대로 사내의 모습이 가장 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신은 그 여인이 죽기 전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도대체 언제 이 책에 대해서 알게 된 것입니까?”
“죽기 직전에 받았소.”
“그럼 왜 죽이려고 마음을 먹은 거죠?”
사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의사는 바싹 마른 몸을 웅크리고 사내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그 어떤 질문을 던지더라도 사내는 보통의 사람들이 보이는 것 이상의 균열은 나타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아니 마치 연극처럼 그는 표정을 흉내내는 느낌이었다.
“돈이 필요했소.”
“결국 돈이 필요해서 강도짓을 하신 거군요.”
“그런 거로 생각을 할 수는 없을 테지.”
“그게 무슨?”
“단지 돈을 빼앗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공간에서 함부로 칼을 겨눌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몰래 남의 집에 들어가서 돈을 가지고 나오는 것 등을 할 텐데 나는 그러지 않고 거기에서 그녀의 몸에 칼을 넣었소.”
“하지만 아까 분명히.”
“그녀가 이끌었소!”
사내의 목소리가 낮게 울리자 의사는 살짝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경호원들을 부르는 버튼에 손이 올라갔다는 사실에 사내가 눈치 채지 않았기를 바라며 재빨리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사내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살짝 노기가 어린 얼굴은 이내 침착한 그것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왜 그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다 오늘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시는 거죠?”
“오늘이 바로 내가 마지막으로 당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그렇소.”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앞으로도 우리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충분합니다.”
“자네의 생각으로는 그럴지 모르지만 저 책에 적힌 것에는 그렇지 않소.”
사내의 검지는 책을 가리켰다. 의사는 입술을 비틀고는 책에 손을 가져갔다. 차갑고 매끈한 표지. 보통의 책과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바코드가 없다는 것, 그리고 출판사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다는 거였다. 새하얀 표지에 결말이라는 두 글자만 적혀 있는 것에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표지가 없군요. 화려한 일러스트나.”
“사람이 사는 것이 그리 재미있을 리가 없지 않소. 그저 평범하게 묵묵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은 정작 자기들이 생각을 하는 것보다 많이 어둡거나 그저 텅 비어버린 무언가가 되어있을 수밖에 없는 거요.”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이 당신이 하는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죠. 아니 사람이 죽는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 있는 책이 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겁니까? 선생님께서도 말씀을 하시면서 이상하다 생각이 드시잖아요.”
“인생이라는 것이 누군가가 바라는 대로 그리고 모두가 순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처럼 흐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사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고 두려운 표정의 의사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는 당신을 죽일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지 않소? 그런데 도대체 왜 그리 겁을 내고 뒤로 물러나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적어도 나와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을 했더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것들도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을 텐데.”
“그래서 나에게 이 모든 것을 말씀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의사를 응시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의사의 얼굴이 굳고 나서야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저 이 책을 전해주고 싶소.”
“내가 그 책을 받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나는 나의 죽음을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을 한다고요. 내가 이곳에서 의사로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정신을 분석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런 것을 받는다고요? 나는 지금 여기에 당신을 치료해주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친 사람이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기를 바라는 거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낮은 형벌을 받기 바라는 거죠?”
“사형일 거요.”
의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사내는 너무나도 담담하게 엷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 거기에서 끝이 나는 걸로 알고 있으니. 그저 형장의 이슬이 되는 것. 그게 사실 가장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이오. 나와 같은 이를 살려두는 것이 더 불쾌한 사람들이 저 밖에는 아주 많을 테니까. 당신이 나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건 그것은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할 거요. 나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야할 미친 살인마라는 것은 분명하니까.”
“아무 것도 결정이 된 것은 없습니다.”
탁한 의사의 음성에 사내는 조금 더 밝게 웃었다.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군.”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더 이상 사형 집행은 되지 않습니다. 정말 만에 하나 사형 판결이 난다고 하더라도 그저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 사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지 않을 거요.”
의사는 깍지를 낀 채로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의사는 잠시 물끄러미 사내의 눈만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뵙겠습니다.”
“나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거요.”
문을 열고 나서려던 의사는 멈칫하고 뒤를 돌았다. 사내의 얼굴에는 여유가 감돌았다.
“나는 오늘이 끝일 테니.”
“하지만 저는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당신에 대해서 어떠한 판단을 내릴 근거도 주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러니 아직 당신에게 기회가 있습니다. 그냥 이대로 끝일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당신의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소. 이미 자기들이 내린 결론이 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거요? 그리고 당신도 나를 위해서. 혹은 스스로를 위안을 하기 위해서 아직 선택권이 있다고 그 무엇도 결정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고 싶겠지.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은 다 결정이 되어 있소.”
“절대로 아닐 겁니다.”
사내는 책을 펼친 후 짧은 심호흡 후 입을 열었다.
“여인을 죽인 사내는 자신의 마지막이 담겨 있는 책을 그의 담당의에게 건넨 후 사형을 언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이게 내 마지막이오.”
사내의 시선은 강렬하게 의사를 사로잡았다.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던 의사는 사내가 시선을 돌리고 난 이후에야 겨우 그곳을 빠져나왔다.
“정신질환자가 분명합니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소?”
의사의 말은 그저 공허한 외침이나 다름없었다.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그리고 들어줄 생각도 없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보는 눈앞에서 여인을 죽였소. 그것도 반항을 할 힘도 가지지 않고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는 여인을. 그런 여인을 죽인 사내를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주라고? 그것도 고작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도 일종의 장애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소!”
“하지만.”
“의사의 생각은 잘 알고 있소. 그리고 그 사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 정도도 나도 알고 있소. 세상에 그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죽일 적에 다른 사람의 시선도 생각을 하지 않고 길 한 복판에서 그런 짓을 저지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런 정도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제정신이 아닐 테지. 하지만 어쩔 수가 없소.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이 난 것이니까. 이미 여론도 그러한 방식으로 흐르고 있으니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소.”
“하지만 아무런 죄도 없는 정신질환자를 사형장으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자네가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소. 이미 모든 것은 다 결정이 난 거요.”
의사는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두들겨 맞은 듯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합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끼어들 수 있는 문제도 없었다. 모든 것은 사내가 이야기를 한 것과 마찬가지의 흐름이었다.
“그럼 제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는 있습니까?”
“그것도 어려울 것 같소.”
“그렇지만 저는 그 사람의 담당입니다. 적어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에 대해서 제가 말을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더 편한 상황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 누구도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없을 거요. 이미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 없으니.”
“그리 빨리 집형이 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내일 판결이 나고 바로 집행이 될 것 같소.”
“그게 지금 말이나 됩니까? 그런 식으로 사형 집행을 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이 일은 매우 엄중하고도 긴박한 일 아니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을 그리 쉽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자는 이미 인간이 아니오.”
“인간이 아니라니.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범죄자의 인권까지 운운하고 싶은 것은 아니라고 믿겠소.”
의사는 입을 벌렸다가 곧 자신이 멍청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물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지금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결국 나도 내 마지막이 어떤지 이미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의사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나이프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당신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미 나는 결정했습니다.”
의사는 손에 나이프를 단단히 쥔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에게 당신이 미래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대신 내가 당신의 몫까지 살아남겠다고. 그래서 이 책에 적힌 내용이 그대로 흘러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의사는 한 발, 한 발 당신에게 다가선다. 의사는 책을 건네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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