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
시후는 심호흡을 하고 입을 막았다. 날카로운 비명. 그 순간 더 이상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을 수 없었다. 시후는 천천히 골목 너머를 쳐다봤다. 한 사내가 누군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누군가의 것으로 분명한 피가 흥건했다. 사내가 고개를 드는 순간 시후는 곧바로 숨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나서야 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골목 끝에 숨어있던 시후는 침묵이 골목을 삼키고 나서야 현장을 돌아봤다. 피로 얼룩져있어야만 할 골목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했다. 시후는 잔뜩 주위를 경계하며 자신의 안식처인 옥탑 방으로 향했다. 문을 잠그고 나서야 마치 숨을 모두 참고 있었던 사람처럼 시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인터넷 검색창에 살인사건을 검색해도 그 무엇도 검색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누군가 자신을 찾아와서 문이라도 두드릴까 잔뜩 긴장한 채로 현관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누웠다. 누구라도 자신을 공격하면 바로 방어를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시후는 미친 듯 뛰는 심장을 천천히 진정시켰다. 그러다 주방으로 가서 칼 하나를 가지고 와 품에 안고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어제 한 잠도 못 잔 것 같아.”
“그렇게 보여? 괜찮은데.”
시후는 별 것 없는 것처럼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익숙하게 일을 시작했다. 분명 자신이 뭔가 잘못 본 것이 분명할 거였다. 아침에 나오기 전에도 인터넷에는 그 어떤 기사도 나지 않았다. 출근을 해서도 그 무엇도 확인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뭘 본 것인지 몰라도 사람이 죽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뭘 그렇게 찾는 거야? 어디 연락이 올 곳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시후는 황급히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거였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을 할 거였다. 그런 거라면 그냥 혼자만의 비밀로 두는 것이 나았다.
“그럼 집중합시다. 집중.”
“네. 알겠습니다. 집중.”
차라리 일에 몰두하는 편이 나았다. 차라리 일에 몰두한다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경험을 한 것을 잊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끔찍한 기억은 한 순간이라도 빠르게 머리에서 지우는 것이 편했다.
“살려주세요.”
시후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사, 살려.”
매일 가는 편의점에서 일하는 여자가 암녹색 코트를 입은 사내에 목이 졸려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녀가 손을 뻗는 방향을 따라온 사내는 시후를 본 것이 분명하면서도 가만 미소를 지을 뿐 손에 들어간 힘을 풀지 않았다. 시후 역시 그런 그를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가 축 늘어지고 나서야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툭툭 털고 시후를 향해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당신 도대체.”
“내가 뭘 하는지 궁금해?”
그렇게 사내는 천천히 시후에게 다가섰다. 시후는 그를 피하고 싶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는 그에게 다가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관심을 가지는 그 순간. 너 역시.”
사내가 가까이에 그에게 훅 끼치는 순간 시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사내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시후는 다시 눈을 떴다. 축 늘어져야 분명할 여자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시후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시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면서도 그냥 가만히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자신이 뭐라도 한다면 그녀가 죽지 않았을 텐데 시후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스스로가 너무나도 한심했다. 그 사실이 자신을 아프게 만들었다.
“형 얼굴이 더 파리해요.”
“그런가? 요즘 내가 나이 먹어서 그런가 보다. 어제도 그런 말을 다 듣고.”
“일이 너무 많으면 좀 줄여.”
오랜 시간 같이 일을 한 동기의 말에 시후는 그저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일이 고되어서 얼굴이 망가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어제 자신이 목격한 것에 대해서 그 어떤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 어떤 매체이서도 그의 동네에서 여자가 죽었다는 사실이 보도되지 않았으니까.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불쾌한 기분. 하지만 분명히 느낀 것이었고 그가 본 것이었다. 시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정신을 차리고자 노력했다. 잊어야 했다. 그런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느니 일단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신만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꿈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잔혹한 일에 대해서 오직 그만 기억을 할 리가 없었다.
“너는 뭔가 본 것 같은데 못 본 적 있어?”
“그냥 뭐 이상한 거라도 본 거예요? 형 보약이라도 한 재 지어야겠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실없는 소리 말고 일이나 합시다.”
“그래.”
시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없는 소리였다. 아니 그래야만 하는 거였다. 분명히 그가 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어디에도 그가 본 것의 흔적은 없었다. 그가 헛것을 보았다는 증거일 거였다. 시후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편의점 신선식품 코너에 선 시후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오늘따라 그가 늘 먹던 도시락이 보이지 않았다. 대충 물이나 한 병 챙겨들고 카운터에 섰는데 아르바이트생이 생긋 웃으며 도시락을 내밀었다.
“이거 찾으시는 거죠?”
“네?”
“매일 드시는데 오늘 이거 막 다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이 시간에 오셨다가 못 사실 것 같아서. 혹시나 하고 빼놓았어요. 다행이네요. 오늘은 안 오시는 줄 알았거든요.”
“아. 감사합니다.”
시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 보러 여기에 오시는 것 맞죠?”
“아니 그게.”
“아닌가? 아니면 완전 쪽 팔린 건데.”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어보이는 그녀를 따라 시후도 엷은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은 다 그가 잘못 본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가 죽임을 당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만일 제가 지금 그쪽이 하는 이야기처럼 일부러 이 편의점을 찾는 거라면 같이 영화라도 보러 가실 겁니까?”
“뭐, 어떤 영화인지에 따라 다르죠. 공포 빼고는 다 좋아요.”
“그럼 언제 시간이 괜찮은가요?”
시후는 그녀의 가슴께로 눈을 가져갔다.
“반율 씨가 정하세요.”
“아주 센스가 없지는 않으시네요. 그럼 내일 이 시간 어때요?”
반율의 시선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데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니 반율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후도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잠시 망설이다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그럼 여기에서 헤어져요.”
“제가 집 앞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아니요. 괜찮아요.”
반율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여기만 올라가면 되는 거고, 혹시나 시후 씨가 뭐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고 있을지 모르는 거잖아요?”
“아, 죄송합니다.”
“농담이거든요.”
시후가 사과하자 반율은 볼을 부풀리며 가볍게 그의 어깨를 밀었다.
“여기 언덕이에요. 내려가는 것 귀찮다고요. 어차피 바로니까. 여기에서 헤어져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반율 씨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시후는 반율이 어두운 골목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쯤이 되어서야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는 등 뒤로 어떠한 서늘함이 느껴졌다. 혹시? 라는 생각이 머리에 들 즘 그는 이미 골목으로 향했다. 그리고 멀리 어떠한 무언가가 느껴지고 시후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휴대전화 랜턴으로 앞을 확인했다. 전기톱을 든 채로 자신을 향해서 싸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에 시후는 뒤로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사내가 다시 반율에게 전기톱을 내리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사내와 부딪쳤다고 생각을 한 순간이 지나고서도 계속 움직이자 그제야 시후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 것도 없는 깨끗한 골목. 시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따라 오신 거예요?”
“네?”
반율은 입을 내밀면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긴 여기가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해요. 골목이 많이 어두워서 저도 막 이상한 생각이 들곤 하거든요.”
“아. 네.”
시후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율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런 시후의 뺨에 재빨리 입을 맞추고 집으로 들어갔다. 시후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잠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자신이 겪는 이 모든 일들. 이것이 그저 환상만은 아니라는 거였다.
“시간을 돌리고 그런 것 가능하다고 생각해?”
“타임 리와인드요?”
“어? 뭐 그런 거?”
“미래로 가는 것은 가능하지만 과거로 가는 것은 좀 어렵지 않을까요?”
후배와 말에 시후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자신도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분명히 그의 눈앞에서 반율이 살해당했고 곧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생활했다. 한 번이라면 우연히 무언가를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반복된다는 이야기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요즘 뭐 같은 상황을 보신 것 같아요?”
“어?”
“기시감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야.”
시후는 고개를 저었다. 어딘가에서 갔을 때 익숙한 곳이라는 느낌이 아니라 누군가 살해를 당하는 것을 명확히 보고난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이었으니까. 그건 엄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거 너무 피곤해서 그럴지도 몰라요. 선배 요즘 주말도 없이 일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좀 쉬지 그래요?”
“내가 알아서 한다.”
시후는 씩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이 이야기를 계속 나누어봐야 자신만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요즘 소설 하나 쓰고 있어서.”
“아. 나는 또 무슨 소리라고.”
후배는 씩 웃으면서 별 거 아니라는 듯 다시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시후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 누구에게도 제정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지금 그는 분명히 경험하는 중이었으니까.
“왜 그렇게 주위를 두리번거려요?”
“내가 그랬어요?”
“뭐 누가 쫓아오기라도 해요?”
“아니요.”
반율의 물음에 시후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누구도 믿지 않을 이야기를 그녀에게 말을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오히려 아무런 일도 없이 다시 돌아오는 그녀가 공포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 그런데 아무리 봐도 너무 어둡습니다.”
시후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반율은 해맑게 웃었다.
“그래도 기분 좋다. 나 누가 이렇게 걱정을 해주는 거 되게 오랜만이거든요.”
“그런 말 하지 말고. 이거 민원이라도 넣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뭐 다른 것을 해달라고 해도 아무도 해주지 않더라고요. 구청에서 가로등도 새로 해준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우리 집 앞 골목만 아무 것도 안 되는 거 있죠? 다른 곳은 전부 다 LED로 바꾸어주던데. 그래도 뭐 이제는 집까지 데려다줄 사람도 있으니 괜찮은 거 아닌가? 나 아직도 걱정해야 하는 거예요?”
“아니요. 이제 제가 집 앞까지 매일 데려다 줄 텐데 뭐 걱정을 할 것이 있습니까?”
“그러게요.”
반율은 자신이 먼저 시후에 팔짱을 꼈다. 그녀의 온기에 시후는 짧은 한숨을 토해내며 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다는 그 말. 아닐 거라고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을 해보아도 계속해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헤어져야 하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도 모를 대화들이 오고간 뒤 겨우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반율을 들여보내고 몸을 돌리는 순간 다시 그의 귀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반율의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엄청난 불길이 일었다. 주민들도 밖으로 나오고 소방관들까지 나타나서 겨우 불을 껐지만 그 안에 남겨진 것은 반율이 아니라 새까만 사람의 형체일 따름이었다.
“보호자 되십니까?”
“아니 그게.”
시후가 멍하니 반율만 바라보자 경찰이 시후를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혹시나 방화라도 저지른 사람이 아닐까 하는 그 표정이 불쾌했지만 그 자리를 그냥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이입니다.”
“그럼 잠시 같이 서로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기는 한 걸까? 경찰차의 문을 여는 순간 시후는 다시 골목의 초입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오늘 밤 같이 보낼래요?”
일단 집에 들여보내면 안 된다는 간절함. 반율은 잠시 머뭇거리면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뜨겁게 입을 맞추고 거칠게 서로의 몸을 탐하면서도 시후의 마음 한 구석은 차갑게 얼어갔다. 분명히 반율은 죽었다. 새까만 시체가 되었다. 허나 지금 그와 몸을 섞고 있는 여인도 바로 반율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멍하니 해요?”
반율은 고개를 갸웃하며 시후를 빤히 바라봤다. 시후는 잠시 그런 그녀를 내려다 보다 짧게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집에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제 집에는 무슨 일로 들어오시려는 거죠?”
“그게. 지금은 당장 설명을 하기가 그렇지만. 일단 좀 들어갈 일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죠?”
반율은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시후를 응시했다. 그녀의 표정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었다. 그녀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해서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살짝 망설이는 반율을 두고 시후는 성큼성큼 그녀의 집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방화를 일으킬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서야 겨우 그녀의 집을 나올 수 있었다. 반율은 여전히 대문 앞에서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반율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지금 도대체 뭘 한 거죠?”
“미안합니다.”
“아니 그냥 미안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남의 집에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들어가는 거. 그거 되게 이상한 일이 아닌가요?”
“미안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요.”
시후의 무덤덤한 대답에 반율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시후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집으로 들어갔다. 시후는 그녀를 잡으려다 이내 고개를 흔들고는 입에 담배를 물고 한 갑 가득하던 담뱃갑이 가벼워지고 나서야 어두운 골목을 벗어났다.
“이제 여기에 오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부탁이에요.”
물건을 계산을 하고 나서 봉투에 담으면서 차갑게 말하는 반율의 말에 시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니요. 다른 변명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저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니에요. 그쪽이 괜찮은 사람처럼 보여서 같이 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집에 들이거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요.”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제 여기도 오지 마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시후의 대답에 반율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 없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입니다.”
“경찰 부를 거예요.”
“도대체 무슨 경찰이요?”
“지금 시후 씨가 하는 행동 그거 스토커라고요. 스토커. 상대가 싫다고 하는데 그렇게 강요하는 거. 되게 우스운 일 아니에요? 이상한 거라고요. 그거. 그러니까 당장 가요. 경찰 부르기 전에 그냥 가라고요.”
“그러니까 나는 지금. 반율 씨를. 그러니까.”
“도대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반율 시를 지키려고. 그래서 반율 씨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그저 맴맴 돌뿐 하나의 문장이 되어서 흘러나올 수 없었다. 당신이 죽는 모습을 봤다. 그래서 당신을 그리 둘 수 없었다. 허나 당신은 죽지 않았다. 시간이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반율은 그 무엇보다도 역겨운 것이라도 보는 눈빛으로 시후를 노려봤다.
“당장 나가요.”
“반율 씨가 위험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시후 씨 무슨 무당이에요?”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 무당이라 하더라도 그럴 이유 하나 없는 거죠.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건 내가 스스로 감당을 할 일이에요. 시후 씨가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요. 되게 이상한 행동이에요.”
“당신이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
결국 지르고 말았다. 아차, 하는데 반율은 그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따름이었다.
“미쳤어요?”
“네?”
“됐어요. 나가주세요.”
“나갈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밖에 경찰차가 보이자 반율은 재빨리 시후를 제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경찰차에 손을 흔들던 사이 그대로 트럭에 치여 하늘로 날아올랐다.
“반율 씨!”
시후도 재빨리 밖으로 뛰쳐나갔다. 반율은 바닥에 풀썩 떨어졌다. 그리고 그 위로 그녀를 치었던 차가 도로 후진해서 깔아뭉갰다. 시후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차는 다시 전진하고 반율의 모습은 그녀임을 알 수도 없을 정도였다.
“마, 말도 안 돼.”
“모든 것을 기억하는 건가?”
시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차에서 내린 사내는 지난 번 그가 본 사내였다.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사람. 그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미친 듯 떨리기 시작했다. 시후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사내는 싸늘한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내가 두렵나?”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시후는 침을 꿀꺽 삼키고 사내를 노려봤다. 사내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이리저리 목을 풀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나?”
사내는 자신을 가리키며 낮게 웃었다.
“내가 그쪽에 내 정체에 대해서 말을 할 이유가 있나? 그나저나 이 아가씨 주위에서 자주 보이는군?”
“바, 반율 씨를 어떻게 한 거야!”
“뭐 걱정하지 마.”
사내는 이리저리 목을 풀더니 반율의 사체로 다가와서 가볍게 발로 툭툭 찼다. 그녀의 토막 난 손이 시후의 발치에 떨어졌다. 시후는 그런 반율의 사체를 잠시 바라보더니 그대로 토악질을 시작했다. 한참 쏟아내고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사내와 트럭은 사라졌다. 그리고 반율의 사체 역시 사라졌다. 고개를 돌려 편의점을 보니 경찰과 이야기를 하는 반율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시후는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재빨리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목시후 씨 되십니까?”
시후가 고개를 드니 경찰 두 사람이 그이 앞을 막아선 채였다. 별다른 것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니 곧바로 그를 제압하고 수갑이 채워졌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영장도 보여주지 않고 지금 무슨?”
“피해자가 지금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도 있다고 하니 일단 서까지 같이 가주시죠.”
“일단 이것부터 풀라고요!”
“도주의 우려가 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시후가 제대로 따지기도 전에 그는 강제로 경찰차에 태워졌다. 지금 그가 이곳을 떠난다면 반율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시후에게 이 모든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능력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그 여자가 죽는 것을 목격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입니다.”
“나 참.”
담당 형사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시후를 바라보더니 책상을 큰 소리가 나게 내려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당신이 스토커 짓을 한 거라고. 스토커 짓. 그래서 그 여자가 지금 당신을 신고를 한 건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응? 지금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되는 거야?”
“몇 번을 저에게 물으셔도 저는 같은 말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게 전부이니 말입니다.”
“나 참.”
담당 형사는 그렇게 혼자 열을 내다가 어딘가로 가버렸다. 시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누구도 그에게 신경을 쓰는 이가 없었다. 반율을 지켜야만 했다. 시후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그 어떤 경찰도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을 확신하고 나서 시후는 마치 민원인인 것처럼 태연하게 그 장소를 빠져나왔다.
“반율 씨.”
“여기에는 또 어떻게 온 거예요?”
편의점에 들어서는 시후를 보며 반율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시후는 그런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반율 씨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거예요? 경찰, 경찰을 부를 거예요. 그러니까 당장 여기에서 나가라고요.”
“경찰을 부른다고 해도 내가 여기에서 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당신 정말.”
“당신을 구하고자 하는 겁니다.”
반율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테이블 아래를 더듬거렸다. 비상벨에 손에 가는 순간 시후가 황급히 카운터로 넘어왔다. 그리고 반율의 입을 막고 그녀를 조리 공간으로 밀어 넣고는 그녀의 손목을 청 테이프로 둘둘 감았다. 그 다음 입에 테이프를 붙이고 편의점 문을 잠근 후 모든 불도 꺼버렸다.
“당신을 헤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율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시후를 쳐다봤다.
“나는 분명히 반율 씨 당신이 죽는 것을 봤습니다. 내 앞에서.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여러 번 죽는 것을 봤습니다. 나는 당신을 죽일 수 없습니다. 당신을 무조건 살려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반율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려 하자 시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반율 씨가 여기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겁니다. 여기에서 나가면 결국 당신은 죽게 될 테니까요.”
시후는 냉장고로 향해 캔 콜라 하나를 가져와서 한 번에 모두 들이켰다. 대충 소매로 입가를 닦고는 반율의 앞에 앉아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반율의 두려움에 시후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까? 나는 지금 반율 씨.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계십니까?”
시후는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경찰관 두 명이 편의점 안을 이리저리 살피는 중이었다. 시후는 조심스럽게 카운터 아래로 몸을 낮추었다.
“강제로 들어갈까요?”
“일단 여기 편의점 사장하고 연결해야 할 것 같은데?”
“잠시만요.”
시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반율도 지키지 못하고 자신에게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당신은 오늘 죽어.”
반율의 눈이 커다래졌다. 시후는 다급했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 뭐든 해야만 했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였다. 오랜 시간 마음에 담은 그녀인 만큼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다시는 그 놈이 당신을 못 죽이게 할 거야.”
“거기 안에 사람 있어요?”
경찰은 유리창에 얼굴이 가까이 가져가서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시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경찰들도 지금 믿을 수 없었다. 그 사내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만큼 저 중 누군가가 반율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당장 어딘가로 가야만 해요.”
시후는 억지로 반율을 일으켰다.
“여기에 있으면 당신은 죽을 거야.”
반율은 시후를 세게 발로 차고 출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경찰이 문을 열고 그녀를 구하러 들어오는 순간 시후가 뒤에서 그녀를 덮쳤다. 반율은 그대로 바닥에 세게 머리를 부딪치고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반율 씨!”
“저 새끼 잡아!”
“저거 뭐야?”
시후는 저 멀리서 사내를 발견했다. 그는 씩 웃으면서 반율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저 자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반율은 계속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거였다. 그녀를 구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하나였다.
“반율 씨를 살리기 위한 거예요.”
시후가 반율의 목을 세게 졸랐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경찰이 그를 덮쳐도 그는 모든 힘을 손에 집중했다. 이내 반율의 몸이 축 늘어지고 나서야 시후는 밝은 표정으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당장 그 사람 내려놔! 안 그럼 발포한다!”
“반율 씨. 내가 당신을 살렸습니다.”
“당장 그만 두라고.”
축 늘어진 반율을 보며 밝게 웃는 시후의 얼굴은 너무나도 기이했다. 총성이 울리고 그제야 시후는 반율을 놓친 후 그녀의 위에 무너져 내렸다.
“피해자. 피해자부터 확보해!”
“당장 구급차를 불러!”
“이번에는 안 살리는 거야?”
“응.”
반율은 다리를 꼰 채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사람들의 걸음은 마치 개미가 바쁘게 먹이라도 옮기는 모양새였다. 반율은 기지개를 켜고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이번에는 꽤나 오래 갔지?”
“뭐. 네가 몇 번이나 죽었으니까.”
“잔인했어.”
“그럴지도.”
사내는 낮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자기는 취미도 참 이상해.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기분이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나는 이해가 안 되는데.”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내가 이해를 시킬 수 있는 일은 아니지. 나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이 내가 아니니까.”
“뭐 이해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
반율은 커피를 내려놓고 턱을 괴고 몸을 살짝 앞으로 기댔다. 사내는 그런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몸을 뒤로 기댔다.
“이제 다시 시작을 해야 할 거야.”
“그래.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 돼. 시후 씨.”
시후는 싸늘하게 미소를 지으며 반율의 목에 날카로운 칼을 꽂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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