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태현은 여성에게 시선을 뒀다. 170은 너끈히 넘을 것 같은 커다란 키에 웨이브 진 갈색 머리가 어깨 아래까지 떨어졌다. 옷은 딱 몸에 맞춘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칠 정도로 몸매를 드러내서 선정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옷도 아니었다.
“아닙니다.”
태현은 대충 고개를 흔들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찾는 여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태현은 미간을 모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제대로 된 작품을 쓰지 못할 텐데. 태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입에 담배를 물었다.
“아우 새 소설 주인공이 딱 떠올라야 하는데.”
“저기 선생님.”
“네?”
태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내 얼굴이 구겨졌다. 아차 싶었다. 그는 지금 딱 한 발, 딱 한 발 차이로 금연 거리에서 담배를 핀 셈이었다.
“이게 그러니까.”
“이곳이 금연 거리인 것은 아시죠?”
“네.”
태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한 벌이도 없는데 제대로 한 방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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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변태 새끼. 또 여자들 그렇게 살피냐?”
“변태라니.”
우석의 지적에 태현은 미간을 모았다. 그리고 살짝 몸을 뒤로 기대며 가만히 지나가는 여자들을 살폈다.
“새 소설을 써야 하잖아.”
“아니. 소설을 쓰면 그냥 쓰면 되는 거지. 꼭 그렇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다 살피고 그래야 하는 거냐?”
“딱. 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있어야 소설이 들어갈 수가 있으니까. 너는 백수라서 아무 것도 모르겠지만. 소설이라는 게 말이다. 그냥 막 쓴다고 써지는 것이 아니거든. 딱 어떤 느낌. 필. 뭐 그런 게 있어야지 사람이 글이 써지고 그러는 거라니까? 글도 더 사실적이고 말이야. 그게 당연한 거라고.”
“아우. 나는 모르겠다.”
우석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면서 미간을 모았다.
“나는 그냥 내 친구라는 녀석이 무지하게 변태라는 거. 그거 하나만 보이는 거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지나가는 여자들 엉덩이만 보고 저 여자일까? 저 여자일까? 이건 제대로 된 변태 아니냐?”
“네가 그렇게 말을 하니까 진짜로 변태 같다.”
태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요즘 글이 안 써지니까 나도 되게 힘들다. 막 몸이 아프고 그래. 안 그래도 이렇게 힘든데 너까지 나를 막 건드리고 그래야 겠냐?”
“그럼 나 말고 너를 건드릴 사람이 누가 있냐?”
“백수 새끼.”
“이 새끼가.”
“너 알바라도 해.”
“됐다.”
우혁은 입을 쭉 내밀고 고개를 저었다. 누가 봐도 멀끔하게 생긴 우혁은 백수였다. 서른넷이나 된 녀석이 백수라는 소리를 들으면 일이라도 구하려고 노력을 할 텐데 이 녀석은 그럴 생각도 없었다. 나름 집에 재산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눈치를 꽤나 주는 모양인데 별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우리 꼰대 나 말고 숨겨둔 자식도 없어요. 어차피 우리 꼰대 죽으면 그거 다 내 재산이다.”
“아무리 그래도 네 아버지도 너 그냥 두고 보시겠냐? 네 아버지 성격도 있는데. 너를 죽이면 열두 번도 더 죽이셨지.”
“뭐. 그렇겠지.”
우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살짝 몸을 앞으로 기대서 가볍게 머리를 쓸어넘기더니 입을 내밀었다.
“안 그래도 우리 어머니께서도 나보고 일 좀 하라고 그 난리시다. 그 동안은 일 안 해도 좋으니까 사고만 치지 말라고 하던 양반들이. 아들이 이제는 조금이나마 부끄럽기는 하신 모양이다. 그리 닦달을 하시는 것을 보니.”
“네 부모님도 네가 사고치지 말고 그냥 집에 있으라고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나이까지 그럴 줄 몰랐을 거다.”
“그러니 그냥 가게만 내달라니까.”
“가게 운영은 뭐 쉬운 줄 아냐?”
“사람을 쓰면 되는 거지.”
“미친.”
“아무튼. 나는 귀찮아 미치겠다. 그냥 집에서 노는 것도 한계가 있다니까? 아니 그냥 가게만 내주면 된다고 하는데 우리 집 꼰대가 그건 절대로 안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돈벌이 해오라는 것도 아니고 귀찮아.”
“나는 모르겠다.”
태현은 속으로 트림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나는 이번에 대박 안 나면 끝이다.”
“왜? 잘 나가는 작가님이?”
“잘 나가기는. 지난 번 책 연속으로 죽 쑨 거 알잖아. 이제는 선인세도 못 땡겨준단다. 정태현 인생 왜 이렇게 된 거냐?”
태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도 별로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석에 비해서는 노력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우석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내일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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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태현은 입에 담배를 물고 한숨을 토해냈다. 분명히 슬럼프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나날이 줄어가는 잔고도 걱정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도 걱정이 안 되는 것이 너무 묘했다.
“저기요. 담배 좀 꺼주시면 안 되요?”
“네?”
“여기 금연 구역이거든요?”
키가 160은 될까? 새까만 눈동자를 한 여자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태현이 멍하니 있자 여자는 한숨을 토해내며 허리에 손을 척 하니 올렸다.
“이봐요. 담배 좀 끄라고요. 여기 금연 구역이라니까요?”
“아. 죄송합니다.”
태현은 황급히 꽁초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비볐다. 여자는 한숨을 토해내고 다가오는 버스로 향했다. 태현은 그런 그녀의 팔을 잡았다.
“뭐예요?”
“저기 저랑 커피라도 안 하실래요?”
“네?”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이 아저씨가 왜 이래?”
여자는 태현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미간을 모았다.
“내가 지금 담배 끄라고 해서 그것 때문에 억하심정이 생겨서 그런 거예요? 아무튼 나는 정당한 요구를 한 거니까 괜히 따질 생각을 하지 말라고요.”
“하지만.”
“아. 탈 거예요? 안 탈 거예요?”
“탈 거예요.”
여자는 태현을 두고 그대로 버스에 올랐다. 태현은 멍하니 지나가는 버스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여자야. 저 여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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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라.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해.”
나라는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다가 별 미친 놈한테 시달려서. 아니 버스 정류장에서 담배를 피길래 끄라고 했더니 막 팔을 잡는 거 있지?”
“내가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했지?”
우리는 머리를 위로 묶으면서 입을 쭉 내밀었다.
“너 그렇게 혼자서 의협심 넘치게 행동했다가 제대로 한 방 먹는다. 세상에 착한 사람만 있는 거 아니야.”
“나도 알고 있어. 아니 그래도 최소한은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 흡연 구역에 가서 피거나 그러면 되는 거지. 다들 버스 기다리고 있는 정류장에서 담배 피고. 그거 솔직히 좀 그렇지 않니?”
“몰라. 시재 점검은 끝났고. 너랑 나랑 이게 무슨 고생이라니? 엄마랑 아빠랑 그 다 늙은 나이에 여행은 무슨.”
“언니 너무 그러지 마라.”
“뭐가?”
“엄마랑 아빠가 이혼 안 하고 사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데. 나는 두 분 그렇게 여행 다니고 그러시는 거 완전 좋아. 남들 보기에 나쁜 것도 아니고. 그런 거 은근히 자랑스러운 거기도 하고.”
“그래 나만 나쁜 년이지.”
우리는 입을 내밀고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알았어. 들어가.”
우리가 멀어지고 나라는 기지개를 켜며 유니폼을 걸쳤다. 부모님이 전 재산을 털어서 차린 편의점은 겨우 인건비만 나오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것도 엄마랑 아빠, 그리고 우리랑 자신이 있어야 가능한 거였지만. 네 사람이 먹고 사는데 딱히 지장이 없다는 건 좋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은 두 분의 사이가 너무 좋아서 여행을 가버렸다는 거다. 우리랑 나라의 상황은 신경도 쓰지 못한 채로.
“모르겠다. 이나라. 힘내자. 힘.”
나라는 이리저리 목을 풀며 카운터에 섰다. 열두 시간의 맞교대.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름 할만 했다. 진짜로 내 가게였으니까.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물론 당장 토익 시험 준비도 해야 하고 졸업을 위해서 논문을 쓸 준비도 해야 하지만 그래도 그다지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아까 그 미친놈만 아니었더라면 오늘 기분도 이 정도로 나쁘고 불쾌하지는 않을 거였다.
“아니 금연 구역에서 담배 끄라는 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이야?”
나라는 입을 내밀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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