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무슨 준비를 그렇게 하는 거야?”
“이제 취업 해야죠.”
열심히 토익 책을 들여다보는 상현을 보며 은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곁에 나란히 앉아서 상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공부가 되니?”
“그럼요. 백색소음 몰라? 백색소음? 원래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공부를 해야지 더 집중도 잘 되고 그러는 거라고요.”
“나는 이해가 안 된다. 네 시간 끝이 났으면 그냥 바로 가지. 뭘 여기에서 공부를 하고 그래? 괜히 여기에 있으면 이런 일. 저런 일. 생기면 네가 다 도와주고 그래야 하는 거잖아. 그냥 가.”
“누나는 나랑 있는 게 싫어요?”
“누가 그렇데?”
“그런 게 아니면 왜 그래요?”
“어차피 공부를 할 거라면 제대로 하기를 바라서 이러는 거야. 이런 식으로 한다면 너에게 도움 하나도 되지 않을 테니까. 집중도 안 되고. 이게 무슨 공부라고 여기에서 공부를 한다는 거야?”
“나는 누나 봐야 힘이 나.”
“당장 집에 가.”
“누나?”
상현의 투정에도 불구하고 은비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상현은 입을 꾹 내밀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치사해요.”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야.”
“아. 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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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왜 벌써 와?”
“공부하려고요.”
상현의 대답에 승현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복학하면 공부를 미친 듯해야 해서 공부는 하기 싫다고 하더니. 갑자기 생각이 왜 바뀐 거야?”
“엄마는 은비 누나한테 뭐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 은비 누나가 나를 다르게 한 거라고요. 은비 누나가 자기 기다리지 말고 집에 가서 제대로 하라고 하더라고요. 뭐. 어차피 일도 다 끝났고 그래서 집에 왔어요.”
“그래. 그 애 말이 맞지. 집에서 공부를 하는 것도 잘 안 되는 녀석이 카페에서 무슨 공부를 해.”
“엄마는 그냥 누나랑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마음이 놓이는 거면서. 엄마 속 완전 잘 보이거든요.”
“무슨 소리를?”
승현이 뜨끔하면서 눈을 흘기자 상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승현의 탓을 할 까닭은 없었다.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는 알아요. 나도 걱정이 되고. 누나도 걱정이 되고.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거예요. 저도 저 나름대로 잘 하고 있거든요.”
“누가 뭐래?”
“그럼 방에 있을게요.”
“뭐. 그래라.”
상현이 방에 들어가자 승현은 입을 쭉 내밀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쟤 잘 하고 있는 건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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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는요?”
“그렇게 부르지 말아주실래요?”
자신의 말에 은비가 살짝 입을 내밀자 류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은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걔 아직 대학도 졸업 못 했거든요. 적어도 대학이라도 졸업하려면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가라고 했어요. 안 그래도 취업하기 힘든 상황에 내가 붙들고 있는 거 되게 웃기잖아요.”
“이거 대단하네.”
“뭐가요?”
“막 사귀는 사이에 떨어져 있을 수도 있고.”
“막 사귀는 사이 아니거든요.”
은비의 대답에 류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이번 주말에 바쁩니까?”
“네?”
“너무 그렇게 놀라지 말고요.”
은비가 화들짝 놀라자 류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은비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시나요?”
“뭐.”
“그런 거 알 이유는 없고. 이번에 전시회 티켓이 생겼거든요. 그래서 조은비 씨가 좀 와줬으면 해서요.”
“아.”
“혼자서 오라는 거 아니고. 언니 분이랑 그 꼬맹이 티켓까지 다 넣어놨으니까 같이 오시면 되는 겁니다.”
“감사해요.”
은비가 손을 닦고 미안한 표정을 짓자 류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은비에게 무언가 주고 싶은 것일 뿐 그녀가 부채를 느끼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 동안 제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서 그다지 날 세우지 않고 받아주신 것만 하더라도 감사합니다.”
“류 팀장님이 도대체 뭘 하셨다고. 제가 뭐라고 할 이유는 없잖아요. 너무 감사해서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그냥 오면 되는 겁니다.”
“네.”
은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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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걸 덥석 받아?”
“그럼 어떻게 해?”
은희는 물끄러미 은비를 바라보며 미간을 모았다.
“너는 류 팀장님 싫다고 이야기를 하더니 막상 너 지금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에게 계속 미련을 주는 거야. 사람에게 미련을 주지 않아야지. 사람이 모질지 못하면 그게 나쁜 사람이야.”
“내가 뭘?”
“상대방에게 미련이 없으면 딱 끊어야 하는 거라고. 그런 거 아니라면. 결국 네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셈이 되는 거야. 류 팀장님이 너에게 지금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지 모르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은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런 마음이 아니라는 것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류하는 이미 자신에 대한 마음을 깔끔하게 해결하고 그녀에게 티켓을 선물한 좋은 친구였다.
“우리 이제 친구야.”
“친구는 무슨.”
은희는 못 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다들 왜 이렇게 곰 같은 너를 보고 좋다고 하는 거라니? 내가 너보다 부족한 게 뭐라서?”
“내가 뭐?”
“됐다. 얼른 퇴근 준비나 해. 오늘 장사도 안 된다. 건너편에 새로 프랜차이즈 커피 집 들어오니 장사가 안 되네.”
“괜찮아?”
“네 걱정 안 해도 되니까 그런 표정을 지을 거 없고. 뭐 이 가게 그렇게 돈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이제 나름 이름도 알려서 괜찮아.”
은비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은희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과는 다르게 이미 카페의 매상은 너무 많이 줄어들어서 걱정이 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더 열심히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은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봐.”
“그래.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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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곧 접어야 할 것 같아.”
“어?”
은비의 말에 상현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언니 카페 건너편에 또 프랜차이즈 카페가 들어오더라고. 전에는 그다지 영향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생각보다 타격이 크더라고. 아무리 저렴해도 사람들은 작은 카페에 가기 보다는 프랜차이즈를 찾더라. 그게 더 편하니까. 아무래도 그런 거겠지만 마음이 무거운 건 사실이네.”
가만히 그네에 앉아서 발장난을 치는 은비를 보며 상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은희는 자신이 가장 힘든 지금 이 순간에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었는데 정작 자신은 은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 카페 그만 둘게.”
“어?”
“어차피. 은희 누나는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러 거 아니야.”
은비는 미소를 지으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네가 갑자기 일을 그만 두면 카페 일은 어떻게 하라고? 다른 곳에서 돈을 더 벌도록 노력을 해야지. 사람을 줄이는 것은 결코 옳은 방안이 아니야. 네가 우리 카페에는 꼭 필요해.”
“거짓말.”
“어?”
“거짓말인 거 알거든요.”
상현은 손을 내밀어서 은비의 손을 꼭 잡았다. 상현은 가볍게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누나가 많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가 들어가 전에는 두 사람이 일을 다 하던 거 아니었어?”
“그래도.”
“그러니까.”
상현은 은비의 말을 막고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나도 이제 복학 준비하고 그래야 하잖아. 하루라도 빠르게 그만 두면 그게 더 도움이 되는 거야. 그리고 정말로 일이 급하다면 내가 가서 도우면 되는 거고. 나쁜 거 아니고. 나에게 미안할 거 아니야.”
“그래도 미안하네.”
은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상현에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행동을 하고 지금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너보다 나이가 이렇게나 많은데 여태 뭐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언니에게 도움만 받는 사람이었어.”
“왜 그런 이야기를 해?”
“사실이니까.”
은비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만 혼자 자신을 어른이라고 착각을 하는 거였다. 여전히 아이였고.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는 바보였는데. 어른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였다.
“언니가 보기에 내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너보다도 일도 못하는 주제에 얼마나 미련하게 보였을까?”
“너무 그러지 마.”
상현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은비를 가만히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정수리에 떡을 얹고 은비를 품에 더욱 꽉 안았다.
“조은비 사랑해.”
“김상현.”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 없어.”
상현은 가만히 은비의 눈을 바라봤다. 은비가 엷은 미소를 짓고 상현은 허리를 숙여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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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그만 두고 싶다고?”
“네.”
은희가 은비를 바라봤지만 은비는 딴청을 피울 따름이었다. 그 순간이 되어서야 은희는 미간을 모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누나.”
“아니. 길 건너에 프랜차이즈 카페 하나 들어온다고 내가 망할 사람으로 보이는 거니? 너희 두 사람 다 왜 이렇게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 내가 이 카페 하나 제대로 운영 못할까봐?”
“지금이라도 팔자.”
은비는 은희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더 가다가는 매출 떨어지는 거 당연한 거잖아. 지금이라도 카페 접어. 언니는 다른 곳에서 일할 수도 있잖아.”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데?”
“언니.”
“나는 싫어.”
은희는 입을 꾹 다물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은비는 심호흡을 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나는 도망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야. 너희가 그만 두고 싶다고 말을 한다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는 하겠지만 너무 내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저는 진짜로 그만 두고 싶어요.”
상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제 복학 준비를 해야 하고. 다른 애들처럼 간단한 토익 준비라도 좀 해보려고 하거든요.”
“그래. 아쉽네.”
“네. 그래도 종종 올게요.”
“매일 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네 커피는 무한으로 제공할게.”
“언니 미쳤어.”
은비가 살짝 팔을 붙들자 은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두 사람이 한 행동이 너무 고마웠다. 자신이 그 만큼 약해 보인다는 거였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나 이길 거야. 버틸 거야. 아무리 프랜차이즈 카페라고 하더라도 내가 이 골목의 선배니까. 이길 거라고.”
“누나는 이길 거예요.”
상현의 말에 은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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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네가 상현이 그만두라고 한 거야?”
“아니.”
“그러지 말지.”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은희는 낮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사람이 줄어도 사람을 그렇게 내보내면 안 되는 거야. 어차피 우리가 상현이가 제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도와주기로 한 거잖아. 그리고 지금 당장 매출이 주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올 거야. 지금보다 수익은 줄어들겠지만 그건 당연한 거야.”
“언니 일부러 괜찮은 척 하지 마.”
은비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저었다.
“언니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감당할 필요는 없는 거야. 언니가 힘들다면 그냥 힘들다고 이야기를 하면 되는 거고. 언니가 지친다면. 그냥 지친다고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거야. 언니 혼자서 그 모든 것을 다 아프다고.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말을 할 이유는 없는 거라고. 왜 언니 혼자서 다 감당하려고 하는 거야?”
“너는 내가 힘들어 보여?”
“어?”
은희의 말에 은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은비는 가만히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는 지금 내가 되게 힘들고 지쳐 보이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 않아.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고 기분 좋아.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으니까. 물론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 알고 있어. 내가 봐도 내가 되게 걱정스러운 일들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나는 정말 행복해. 은비. 네가 지금 당장은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내가 하자는 일을 하고 있어서 이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얼마나 기분 좋은 것인지 모를 거야. 하지만 언젠가 네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너는 행복할 거야. 네가 하는 그 일. 정말로 소중하고 기쁜 일이 될 테니까.”
“소중한 일?”
“응.”
은비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은희는 그저 어쩔 수 없이 카페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녀의 카페를 차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고 그 목표를 제대로 달성한 사람이었다.
“언니는 대단하네.”
“뭘.”
은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은희는 헛기침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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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선생님?”
“응.”
상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거 돈은 얼마 안 되고 힘든 일이잖아. 나는 누나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너무 힘들 거야.”
“힘들 거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다른 걸 하는 거 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누나.”
“나 원래 아이들 가르치는 거 정말 재미있어 했거든. 애들이 좋아. 그런데 내가 교사가 될 수는 없으니까. 어떤 것이 가장 가까운 것일까. 이런 생각을 했더니 강사라는 직업이 있더라고.”
“아무리 그래도.”
은비는 상현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저었다.
“누구나 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는 거잖아. 지금 나는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야.”
“알았어.”
은비의 말에 상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은비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하는데 자신이 뭐라고 할 것은 없었다.
“너는 날 응원할 거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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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팀장님.”
“네?”
은비가 자신을 먼저 부르자 류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요?”
“아니 조은비 씨가 지금 나를 불러서.”
“아. 나 이제 카페 그만 둬요.”
“네?”
은비의 말에 류하는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은비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류 팀장님이 뭐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이제야 생겼네요.”
“그거 다행이네요.”
“네?”
“나는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을 못 찾았거든요.”
“거짓말. 그 좋은 회사에 다니시는 분이요?”
“그게 제 꿈은 아니거든요.”
류하의 덤덤한 고백에 은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류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전시회는 오실 거죠?”
“네. 당연히 가야죠.”
은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날 우리 저녁도 먹죠.”
“네?”
“제가 대접할게요. 조은비 씨가 정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 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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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를 왜 가?”
“네?”
상현의 반응에 은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상현이 류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언성을 높이면서 예민한 반응을 보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뭐 그 사람하고 뭘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전시회를 한다고 해서 티켓을 받은 게 전부야.”
“그래도 나는 싫어.”
상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거기를 도대체 왜 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우리랑 무슨 연고가 있는 사람이라고 거기를 가려는 거야”
“너무 그러지 마. 카페 단골손님이야.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나랑 그 어떤 사이도 아니야. 네가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고 예민하게 굴 일이 아니라고. 그런데 왜 그렇게 날을 세우는 거야.”
“그 사람 남자야.”
“누가 몰라?”
“아니 왜 남자를 만나러 가?”
“뭐?”
은비는 어이가 없어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리고 혀로 입술을 축이며 한숨을 토해냈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데. 김상현. 너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게 좋을 거야.”
“뭘?”
“류 팀장님. 남자 아니야. 그냥 나에게는 고마운 사람이야. 내가 어떤 일을 하건 괜찮을 거라고 말을 해주는 그런 고마운 사람. 너는 그런 사람을 그냥 남자라고만 말을 하니? 도대체 성별이 뭐가 중요한 거니? 사람하고 사람 사이에 성별이라는 것이 그렇게 큰 자리를 차지하는 거야?”
“그럼 누나가 보기에 성별이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어?”
“김상현.”
“혹시 그 사람 좋아해?”
상현의 말에 은비는 있는 힘을 다해서 상현의 뺨을 때렸다. 상현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은비를 바라봤다.
“누나.”
“너 그 말 사과해.”
“뭘 사과해?”
“내가 류 팀장을 남자로 본다는 그 아니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너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거잖아. 도대체 네가 어떻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거라니? 네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아니 아니면 아닌 거지. 도대체 왜 나를 때리는 건데? 누나도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에 괜히 걸리는 게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면 도대체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 건데?”
“김상현.”
“누나 지금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 그 사람에게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는 거야.”
“너는 하나 달라진 게 없다.”
은비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저었다. 상현이 아주 조금이라도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상현은 전혀 어른이 되지 않았다. 상현은 그대로. 여전히 아이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나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나는 류 팀장을 밀어내고 너를 선택한 사람이야.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나를 이런 식으로 의심하면 안 되는 거잖아.”
“내가 무슨 의심을 안 하게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그 남자의 전시회에 가겠다는 누나한테 뭐라고 해야 하는 건데?”
“그냥 같이 가자고.”
은비의 눈에 투명한 눈물이 고였다.
“그냥 같이 가자고 하면 되는 거잖아.”
“나는 못 해.”
“그러게. 나도 괜히 너에게 말을 한 모양이다.”
은비는 억지로 울음을 삼키며 상현의 어깨를 툭 하고 치고 멀어졌다. 상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뒤를 돌아서 은비의 팔을 붙들었다. 은비는 그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상현은 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고 은비를 결국 돌려세웠다. 은비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상현을 바라봤다.
“뭐 하자는 거야?”
“누나 이대로 가면 안 돼.”
“안 되면?”
“누나가 이런 식으로 그냥 가면 우리 싸우는 게 되는 거야. 우리 그냥 이대로 싸우고 만 거라고.”
“아니니?”
“미안해.”
상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미안해.”
“그러지 마.”
은비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없으면서 도대체 왜 나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건데?”
“나는 아직도 누나가 왜 그 사람이 준비한 전시회에 가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어. 나는 아직도 속상하고 답답해.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누나가 그걸 바란다면 나는 누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을 거라는 거야. 이건 누나가 결정한 거야. 내가 뭐라고 해도 달라질 수 없다는 거라고.”
“만일 내가 아직도 류 팀장하고 내가 무슨 사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더라면 너에게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
상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비가 자신에게 같이 가자고 이야기를 한 것. 그것만 보더라도 은비가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상현은 심호흡을 하고 은비를 품에 꼭 안았다.
“미안해.”
“하지 마.”
“정말 미안해.”
“사과하고. 그냥 이런 식으로 넘어가고. 나는 그런 걸 바라지 않아. 네가 정말로 나에게 미안하다면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그래.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은비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상현을 바라봤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
“어?”
“나는 우리가 뭐가 달라진 사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 네가 조금이라도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을 했어. 하지만 너는 아니었네. 나는 지금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고 있었던 거였어.”
“갑자기 왜 그래?”
상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은비는 그저 덤덤한 미소를 지으면서 가만히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난 널 잊지 못할 건가봐.”
“누나.”
“그래도. 우리 여기까지가 맞았나봐. 우리가 괜한 미련으로. 끊어진 인연을 다시 이은 건가 봐. 우리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미 끊어진 인연이 다시 이어지지는 않는 건데. 그럴 수는 없는 건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누나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야. 내가 실수한 거라고. 내가 괜한 욕심에 누나한테 이상한 소리를 한 거라고. 그런 건데. 도대체 왜 그런 거에 누나가 반응을 하고 그러는 거야? 그냥 내가 잘못한 거야. 전부 다 내 잘못인데. 그런 건데 왜 그러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은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혀로 입술을 축이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김상현. 난 널 사랑해. 그래서 우리는 안 되는 거야.”
상현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은비는 상현의 목을 끌어 당겨서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대로 상현을 남겨두고 놀이터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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