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위로가 되는 사람
“딸 무슨 일이야?”
“별 일 아니야.”
은화는 우리의 얼굴을 보고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재필과의 이야기를 해봤자 우리의 잘못이 될 거였다.
“옆집이 공사를 한다고 하더라고.”
“무슨 공사?”
“에어컨이라도 달려나 보지. 먼지 날리고 그래서 괜히 시끄럽잖아. 그리고 이것저것 차도 많더라고.”
“그래서 왔어? 짐도 이렇게 많이 챙기고?”
“뭐가 많아. 그리고 너무 재필이 집에 내 짐이 다 가있는 거 같아서 조금 챙겨왔어요. 아직 결혼도 전인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니야.”
우리는 애써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은화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부엌으로 갔다. 우리는 한숨을 토해내며 방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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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자식.”
그러고 나서 연락이 한 번 없었다. 먼저 연락을 해볼까 고민을 했지만 그건 뭔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우리는 한숨을 토해내고 창가에 섰다. 정식의 집은 어두웠다.
“팀장님 어디 가셨나.”
그래도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뭔가 마음이 편할 거 같았는데. 우리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여기에서 출근하려면 더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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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아침부터 뭐 이런 걸.”
“우리 아들이 그렇게 먹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생각이 난 김에 우리 서실 줄 거까지 다 했지.”
“조실 언니는 하여간. 언니. 기다려봐요. 내가 뭘 더 줘야 하는데.”
“나 지금 가야 해. 우리 아들 출근하잖아.”
“맞네. 언니. 내가 딸한테 들려 보낼게.”
뭐라는 거야? 아침부터.
우리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자기 전에는 그렇게 복잡하던 일들이 그래도 자고 나니 조금 가볍게 느껴졌다.
“누구야?”
“옆집. 아들이 호박전을 먹고 싶다고 해서 아침부터 부쳤다고 한데. 고소한 게 아주 맛있어. 우리도 먹으라고 줬어.”
“참 양심도 없다.”
“누가?”
“옆집 아들.”
우리는 입을 쭉 내밀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침부터 엄마 고생을 시키고 그러면 안 되는 거지? 안 그래? 내가 대충 보니 나이도 있어 보이던데.”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뭐래?”
우리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화장실로 들어가서 칫솔을 입에 물고 변기에 앉았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확인했지만 여전히 재필의 연락은 없었다.
“망할 자식.”
“딸 심부름 좀 해.”
“나 출근해야 해.”
“그래도 이거 얼른 가져다 주고 와.”
“엄마가 가면 되잖아.”
“네 아침 하고 있다. 아침. 옆집에 가서 그냥 아주머니께 전 감사합니다. 하고 반찬만 가져다 드리면 되는 거야.”
우리는 귀찮아서 됐다고 말을 하려다 포기했다. 어차피 밤에 불이 켜지지 않은 것을 보니 정식도 집에 없는 모양이었다.
“3만원.”
“알았어. 다녀오면 줄게.”
우리는 대충 머리를 빗어 넘기고 밖으로 나왔다. 아침은 그래도 약간 공기가 차가운 기분이었다. 우리는 살짝 몸을 떨고 옆집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는 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고 나온 것은 정식이었다.
“지금 뭡니까?”
“으왓. 팀장님.”
“쉿.”
우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정식은 다급히 우리의 입에 검지를 가져갔다. 우리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님이 여기에 왜 계신 거예요?”
“내가 내 집에 있는 게 무슨 문제입니까?”
“아니 그래도.”
“아들 누구야?”
“옆집.”
“옆집?”
정식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우리의 손에서 따끈따끈한 두부조림이 담겨 있는 접시를 가져갔다.
“옆집에서 두부조림을 가져왔더라고요.”
“어머. 서실 네도 안 그래도 되는데. 이렇게 꼭 받으면 내가 뭐 바라고 준 거 같잖아. 어머니께 잘 먹겠다고 전해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아침 되세요.”
우리는 그대로 도망이라도 치듯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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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옆집이 이걸 왜 가져다 주는 거예요?”
“아침에 너 먹고 싶다고 한 호박전. 그거 좀 가져다 줬더니 바로 이렇게 가지고 오네. 하여간 사람이 뭐 하나 그냥 고맙다고 받아먹을 줄을 몰라. 그래도 아침상은 조금 더 풍성하겠네. 그나저나 말만한 아가씨가 뭐 저러고 다니나 몰라. 좀 씻고 다니지. 눈곱이 떨어져서 발등을 다 깨겠더라.”
“그런가?”
정식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모친의 시선에 이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로 헛기침을 하고 먼저 식탁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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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뛰어 들어와?”
“옆집 아들 있잖아.”
“그래. 아들이 먹고 싶어서 호박전을 해줬다고 했잖아. 너는 엄마가 하는 말 하나도 안 듣는 거니?”
“그랬지.”
은화의 말이 맞았다. 옆집 아주머니가 아들이 먹고 싶어서 호박전을 했다는 이야기를 다 듣고 간 거였다. 심지어 정식의 욕ᄁᆞ지 하면서 간 거였는데 어떻게 그걸 완벽하게 잊을 수가 있는 건지.
“망했다.”
“왜? 누구 만났어? 아 옆집 아들?”
“아 망했어.”
우리는 은화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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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가는 길이면 같이 가죠.”
“아니요.”
정식의 제안에 우리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정식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감히 팀장님께 그런 폐를 끼칠 수 있겠어요?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갈 수 있습니다.”
“지금 그럼 버스 놓치는 거 아닙니까?”
“네?”
정식의 말에 우리는 버스가 오는 방향을 쳐다봤다. 한 시간에 한 대 오는 버스가 지금 막 정류장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이 망할 자식. 일부러 지금 나 붙잡은 거야. 나 안 잡았으면 저 버스 탈 수 있었다고.
우리는 정식에게 고개를 숙이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서 뛰었다.
“아저씨! 저도요. 저도 좀 데리고 가세요! 아저씨!”
하지만 버스는 우리의 애달픈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우리가 길을 건너기가 무섭게 출발해버렸다.
“아니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사람이 왔으면. 뛰어오는 게 보이면 차를 서야지. 사람이 오는 걸 보고 어떻게 그냥 가?”
“서우리 씨만 기다리라고 하는 것도 되게 이기적인 거 아닙니까? 저 버스에 누가 타고 있을 줄 알고요?”
“그건.”
정식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우리의 곁에 섰다. 그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그냥 나랑 같이 출근하죠.”
“그러니까 그건.”
“나도 서우리 씨랑 내가 무슨 사이라는 소문이 도는 게 싫으니까 회사 가기 전에 미리 내려줄 겁니다.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은 하지 말고 그냥 선의를 받아들여요. 무슨 사람이 그렇게 자기 생각만 하는 겁니까?”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지각을 하는 것 보다는 그 편이 훨씬 더 나을 것 같았다. 우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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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전화를 하면 안 되는 겁니까?”
“네? 그게 무슨?”
“지금 전화기만 보고 있잖아요.”
정식의 말에 우리는 다급히 가방에 휴대전화를 넣었다. 정식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리며 혀를 찼다.
“아니 그냥 먼저 연락을 하면 안 되는 겁니까? 도대체 왜 여자들은 자기가 호감을 갖고 있으면서 남자에게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겁니까?”
“헤어졌거든요.”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자신도 놀랐다. 하지만 자신이 멈출 겨를도 없이 말이 자꾸만 이어져 나왔다.
“12년을 만났어요. 그런데 헤어지자고 말을 한 마디 하고 아무런 연락이 없다라고요. 그런데 전화를 할 수가 없어요. 전화를 하면 되는 건데. 팀장님 말씀처럼 그냥 먼저 연락을 하면 되는 건데 받지 않을까 봐요. 지금은 그냥 꿈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그 일이 꿈이 아니라고 할까봐 연락을 할 수가 없어요. 안 받고 그러면 어떻게 해요? 그러면 나 정말로 헤어지는 거잖아요.”
“미안합니다.”
우리는 정식을 바라봤다. 정식은 정면만 본 채로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우리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런 이야기라도 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에요.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거든요.”
“왜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까? 염소망 씨랑 친하게 지내지 않습니까? 거기에 이야기를 한다거나.”
“12년이나 사귀었잖아요. 그런데 하루 아침에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누구에게 할 수가 있겠어요?”
“12년.”
정식은 우리의 말을 따라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의 입에서 나온 시간을 들으니 더욱 크게 그 무게가 느껴졌다. 12년이라는 시간. 아무나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시간. 부부나 다름이 없는 그런 사이였다. 그런데 그 사이가 말 한 마디로 끝이 날 수 있는 사이였던 거였다. 심지어 그렇게 끝을 내고 서로에게 연락도 하지 않는, 연락도 할 수 없는 그런 사이인 거였다.
“죄송해요.”
자신도 모르게 툭 하고 떨어진 눈물에 우리는 다급히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런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이거 뭐지?”
“울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그럴 때는 우는 게 당연한 겁니다. 12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애인이 서우리 씨 마음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는 거니까요.”
“그건 아닌데.”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눈 어딘가에 눈물이 가득 담겨 있는 그릇이 쏟아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울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꾸만 더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럽지도 않았다. 그냥 너무 이상하게 눈물이 흘렀다. 계속해서 구슬처럼 눈에서 눈물이 자꾸만 샘솟았다.
“아 창피해.”
“울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우는 건데 도대체 뭐가 창피한 겁니까? 그럴 때는 오히려 울어야 합니다. 사람이 울고 싶을 때 울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더 마음에 남아서 더 아프고 더 슬프고 그럽니다. 내가 경험해봐서 알아요. 그냥 울고 싶을 때는 울면 되는 겁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는 주먹을 세게 쥐고 고개를 숙였다. 참으려고 하면 할수록 눈물은 점점 더 많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지난 시간들이 보였다. 그 오랜 시간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어쩌면 우리 혼자서 붙들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뭔가로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혼자서 붙잡고 있었다.
“그 녀석은 이미 식고 있었어요.”
“익숙해진 거겠죠.”
“그게 식은 거잖아요!”
우리가 소리를 지르자 정식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흔들고 조심스럽게 우리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서우리 씨 그런 사랑 해본 사람 서우리 씨만 있는 거 아닙니다. 나도 그런 사랑을 해봤습니다.”
“저처럼 12년만에 차이지는 않았잖아요.”
“그렇죠. 대신 나는 이런 말을 하면 나를 도대체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랑 싸우고 나서 죽었어요.”
“네?”
우리는 눈물이 쏙 들어가서 정식을 바라봤다. 놀란 우리와 다르게 정식은 별 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거 보다는 서우리 씨가 낫지 않습니까? 적어도 어떤 이유인지 이야기를 할 기회도 되돌릴 수도 있으니까. 회사에 늦게 출근해도 됩니다. 합정역 근처에 내려드리면 되는 거죠? 지난번에도 거기에 내렸으니 말입니다.”
“그, 그건.”
정식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우리를 합정역에 내려주었다. 우리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정식의 차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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