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마침표
“임재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뭐 벌써 짐을 찾으러 왔어?”
재필의 집에 도착한 우리는 그대로 멈춰섰다. 우리의 짐이 상자에 담겨서 차곡차곡 정리가 되는 중이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니?”
“우리 끝났잖아. 헤어지자고 하는데 뭐 너랑 나랑 더 감정 소모하고 그럴 필요가 있어? 그냥 끝을 내면 되는 거지.”
“우리가 어떻게 끝나?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헤어지냐고. 우리가 만난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데.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이대로 끝이 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우리 12년이야. 12년이라는 시간을 만났다고. 그런데 그냥 그 말 한 마디로 그냥 헤어지는 게 가능하다는 거야?”
“너도 알잖아.”
재필은 오히려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바라봤다.
“너도 조금씩 나에게 식어가고 있었던 거 아니야? 그래놓고서 지금 뭐라는 거야? 너 혼자서 착한 척 하는 거야?”
“다 버려.”
우리는 차가운 어조로 대답하며 재필을 노려봤다.
“이런 식으로 끝이 날 거라는 생각은 못 했네. 그냥 다 버려. 나는 하나도 필요 없으니까. 필요한 건 어제 다 챙겨갔어.”
“이걸 다 버리라고?”
“그래. 다 버리라고. 어차피 넝게 하나도 중요한 거 아니잖아. 그리고 이 물건들 나에게도 중요한 거 아니야.”
재필도 우리를 가만히 노려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머리를 뒤로 넘겼다.
“너 정말 이럴 줄 몰랐다.”
“나야 말로 네가 그럴 줄 몰랐어. 우리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냐? 네가 엄마를 그렇게 대하는데.”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그대로 계단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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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오늘 오후 출근이라며?”
“괜찮아.”
소망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식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뭔가 그를 보기에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 뭐 해야 해? 이거 서류 하면 되지?”
“아 그거 급한 건 내가 했고. 이거 좀 봐줘.”
“오케이. 내가 이거 확인할게.”
지금 해야 하는 건 일이었다. 일단 일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정신을 팔 게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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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정말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없어.”
소망은 입을 쭉 내밀고 우리의 눈치를 살폈다. 우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별 거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닌데 너 지금 무슨 일이 있는 거잖아. 치.”
우리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소망도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고 의자를 뒤로 기대서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나 헤어질까봐.”
“왜? 괜찮다며?”
“하나도 안 괜찮아. 어쩌면 그렇게 잔소리가 많은 줄 알아?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만나면 뭔가 의지를 할 수 있고 좋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세대 차이만 느껴지고 정말 너무 힘들더라. 나 우리 아빠랑 만나는 거 같아. 진짜 이럴 거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말 걸 그랬어. 감정 소모도 너무 심하고.”
“그래?”
우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섣불리 소망의 말에 맞장구를 칠 수 없었다. 자신은 그럴 자격이 하나 없으니까.
“너랑 재필이는 어때?”
“어? 뭐가?”
“둘은 뭐 달라지는 거 없어? 아니 정기연 청첩장도 가지고 갔는데 재필이는 너한테 청혼 같은 거 안 하는 거야?”
“청혼은 무슨.”
헤어졌다고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헤어졌다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뭔가 너무 부끄러운 일이었다. 부끄러울 게 하나 없는 일인데 그랬다. 그리고 아직 믿을 수 없었다.
“야 그런 이야기 하지 말자.”
“그래.”
소망은 우리의 눈치를 살짝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결혼식은 갈 거야?”
“가야지.”
우리는 눈을 반짝이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소망은 한숨을 토해내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우리는 그런 소망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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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도대체 뭐야?”
“오빠.”
선재는 가게 한 켠에 쌓인 상자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너희 두 사람이 싸우는데 도대체 내가 왜 이런 귀찮은 걸 당해야 하는 거야? 너희 도대체 무슨 일이야?”
“헤어졌어요.”
“아니 싸워. 어? 뭐라고?”
우리의 말에 선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헤어졌어요. 저희. 저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헤어진 거 같더라고요. 재필이가 저에게 헤어지자고 이야기를 했고. 이렇게 오빠 가게에 짐까지 다 가져다 놓은 걸 보면. 답이 나온 거 아니겠어요?”
“그게 말이 되냐?”
선재는 한숨을 토해내며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네가 그 자식보다 더 똑똑한 녀석인데 그 망할 자식 말에 다 맞장구를 쳐주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네가 그럴 때는 뭔가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니야? 그 녀석 말을 다 끌려가서 어떻게 하자는 거야?”
“맞더라고요.”
“뭐가 맞아?”
“재필이 말이요.”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리고 혀로 아랫입술을 살짝 훑고 가만히 손끝 거스러미를 뜯었다. 손끝에 핏 방울이 맺혔다.
“더 이상 설레지 않더라고요. 12년이라는 시간이 어떤 의미인가 했더니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 그런 말이더라고요. 이제 더 이상 설레지 않는 상황에서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더 이상 살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제가 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이제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고 하는 애 붙들고 싶지 않아요. 저 재필이 옆에서 너무 힘들었어요. 그 시간이 너무 버거웠어요.”
“그래도 이건 아니지.”
선재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 우리의 표정을 보고 혀로 볼 안쪽을 훑었다. 그리고 카운터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내가 일단 이야기를 해볼게.”
“아니요.”
“너 왜 그래?”
“저도 지쳤어요.”
“우리야.”
“오빠 미안해요. 하지만 저 더 이상 재필이의 곁에서 희망을 주고 그런 걸 못 하겠어요. 제가 희망을 주면 뭐 해요? 제가 자꾸만 희망을 주려고 하지만 재필이가 그 희망이 필요 없다고 하는 거잖아요. 제가 주는 희망을 다 피하기만 하는데. 저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재필이 옆에 있으면 저까지 힘이 다 빠지는 거 같아요. 이제 더 이상 그런 거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
선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알고 있을 거였다. 그 밝던 재필이 요즘 들어서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었다는 걸.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거였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우리와 재필처럼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었다.
“알고 있어.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되게 이기적인 거라는 거. 그래도 나 너한테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 게. 그래도 두 사람 그 시간이 있잖아. 12년이야. 12년. 그 시간 다른 사람들은 쉽게 보낼 수 없는 시간이야. 너희 지금 그 시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보내겠다는 건 아니지?”
“그러게요. 벌써 12년이네요.”
허탈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허무하게 흘러갈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렇게 오랜 시간 사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연애 기간이 길어가면서 뭔가 새로운 것을 꿈꾼 것도 사실이었다. 언젠가는 결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고 뭔가 달라질 거라 믿었다. 헤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도 그저 평범한 연인일 따름이었다. 12년이라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빠 앞에서 너무 창피하다.”
“내가 더 화가 나고 창피하다.”
선재는 짧게 한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라도 생각을 다르게 해야 할 거 아니야. 너희 12년이야. 12년. 그게 얼마나 긴 시간인지 알아? 그 시간 동안 같이 하던 사람하고 하루만에 딱 끊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절대로 안 될 거다. 너도 다시 생각 하는 게 어때? 걔가 좀 멍청해서 그래. 그래서 실수한 거라고.”
“오빠 나도 되게 멍청해요.”
“우리야.”
“죄송해요.”
우리는 애써 미소를 지은 채로 선재의 얼굴을 바라봤다. 선재는 침을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부모님께는 말씀 안 드렸지?”
“네. 옆집이 공사 중이라서 그렇다고만 말씀 드렸어요.”
“그래. 일단 짐은 여기에 두자.”
“그냥 버리셔도 돼요.”
“서우리!”
우리의 대답에 선재는 짐짓 엄한 어조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가져갈게요.”
“그래. 조심해서 가.”
“네. 오빠 저 가볼게요.”
허무했다. 그리고 갈 곳이 없다는 게 너무 우스웠다. 당연히 있을 거라는 사람이 없다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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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집에 오는 겁니까?”
“아, 안녕하세요.”
어디 다녀오는 모양인지 편한 차림의 정식의 우리를 보며 알은 채 했다. 우리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오늘도 공사 중이래?”
“네. 아빠는?”
“회식.”
“아. 저 좀 쉴게요.”
“그래.”
은화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우리에게 물어봐야 대답을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은화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태도를 봐서는 그리 가벼운 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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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아가씨 헤어졌나 보더라.”
“네? 그게 무슨 말이래.”
모친의 말에 정식은 그녀를 바라봤다. 정식의 모친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며 살짝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남자랑 아주 오래 살았는데 아주 헤어진 거 같다고. 서실네가 그리 걱정을 하더라고. 둘이 죽고 못 사는 사이인데. 세상이 안 좋아서 그렇다고. 남자 애가 취직도 못 하고 그랬단다. 하고 싶은 일 한다고.”
“엄마도 남의 말 그렇게 옮기지 말아. 요즘에 늙은이들이 그러면 다들 싫어해.”
“내가 어디 남한테 그래? 아들한테나 그러지. 하여간 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게 까칠해서. 알았어. 엄마 교양 있을게.”
정식은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집이 있는 방향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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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정말 이럴 거야?’
우리가 보낸 메시지 옆의 1은 없어지지 않고 있었다. 확인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다시 자판을 두드렸다.
‘임재필 무슨 말이라도 해야지. 우리가 그냥 이렇게 끝이 나야 하는 사이는 아니잖아. 우리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우리는 조심스럽게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재필의 전화는 꺼져있었다.
“망할 자식.”
우리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대체 어디부터 꼬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머니 만나러 가기 전에 미리 나한테 물어봐달라는 게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야? 그렇게 화를 낼 일이냐고.”
자신의 머리로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우리에게 미리 물어봐주면 되는 거였다. 별 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그렇게 화를 내거나 예민하게 굴 일도 아니었는데 재필은 유난하게 굴었다.
“마음에 안 들어. 정말.”
그리고 자신도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았으면서 여전히 미련이 남았다.
“12년.”
너무 긴 시간이었다. 그 긴 시간을 함께 한 사람이 그냥 그렇게 사라지는 거였다. 그리고 한 사람이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한 사람과 함께 한 시간도 사라지는 거였다. 우리의 12년. 우리의 시간이 모두 다 사라지는 거였다.
“정말 싫다.”
우리는 휴대전화를 엎어두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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