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조금씩 편해지는 사람
“으왓.”
뭔가 굉장히 오래 잔 느낌이 들어서 후다닥 일어난 우리는 시계를 확인했다. 8시 18분. 지각이었다.
“엄마. 왜 안 깨웠어!”
밖으로 나가니 집은 조용했다. 식탁을 보니 아빠는 일찍 출근했고 엄마는 친구들과 산에 간다는 메모가 있었다.
“이게 뭐야?”
우리는 재빨리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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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어.”
우리는 놀라서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다 비명을 지르며 우뚝 섰다. 정식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왜 이제 나오는 겁니까?”
“티, 팀장님.”
저 자식이 도대체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정식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차에 기대서 가만히 우리를 바라봤다. 우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섰다.
“여기에서 뭐 하세요?”
“보면 모릅니까? 지금 서우리 씨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닙니까? 딱 보면 뭐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데요.”
“저를 왜요?”
“그러게 말입니다.”
정식은 한숨을 토하고 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런 정식을 잠시 바라보다가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사이코야?”
우리는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이대로 가면 지각인데.
“서우리 씨.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네? 저요?”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정식에 우리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 시간에 내가 도대체 뭐 하겠어? 딱 보면 모르는 건가?
“저 지금 출근하는 건데요?”
“그렇게 가면 지각인 거 모르는 겁니까? 내가 도대체 왜 기다린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까? 차에 타요.”
“그게.”
정식은 우리의 옆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식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서우리 씨 지각해도 괜찮은 겁니까?”
정말 타도 되는 거야?
정식의 눈빛은 너무나도 뜨거웠다. 결국 우리는 조심스럽게 그의 차에 올랐다.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우리가 차에 올라탔지만 정식은 전혀 출발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그의 낯을 살피자 갑자기 정식이 그녀에게 몸을 숙였다. 도대체 뭐 하는 거지? 하는 순간 정식이 그녀의 안전벨트를 매줬다.
“차에 타면 안전벨트부터 해야 하는 거 모르는 겁니까?”
“아, 죄송합니다.”
우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정식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도로에 들어서자 엄청나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거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손잡이를 잡는 우리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정식은 덤덤했다.
“이렇게 가지 않으면 지각합니다.”
“아니, 지각할 수는 있는데.”
“아뇨. 지각은 할 수 없습니다. 지각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8시 31분. 29분 안에 카드를 찍는 것은 절대로 무리였다. 평소에도 한 시간 정도는 걸리는 거리였다. 그 거리를 이 시간 안에 갈 수 있는 것은 절대 무리였다. 더군다나 지금은 출근 시간이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른 거 같은데요.”
“지각은 절대로 안 됩니다.”
정식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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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세요.”
사원증을 찍고 엘리베이터에 오른 시간이 56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숨을 몰아쉬는 것과 다르게 정식은 덤덤했다.
“내일부터는 더 일찍 나와야 할 겁니다.”
“네? 그게 무슨?”
“같이 와야 할 거 아닙니까?”
“네? 같이요?”
우리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지금 정식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정식은 더 이상 설명을 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식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사무실로 들어갔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보통 사람이 친절하게 대해주면 그냥 친절하게 대해주는 거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정식은 아니었다. 뭔가 불안했다.
“이상하단 말이야.”
우리는 입을 쭉 내밀고 미간을 한 번 모은 후 사무실로 향했다. 정식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무실에 들어가 일을 하는 중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 보였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뭐가?”
“어? 아니야.”
소망이 옆에서 관심을 보이자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소망이 들으면 괜히 오해할 일이었다. 오해할 문제 자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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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전화.”
“어? 어.”
일에 몰두하던 우리는 소망의 말에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그리고 재필이 어머니라는 글자에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니.”
‘너 재필이랑 무슨 일이니?’
“아. 어머니 그게.”
우리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빠르게 사무실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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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어쩐 일이세요?”
‘너 재필이랑 헤어졌니?’
“네?”
도대체 어떻게 아신 거지?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녀에게서 별다른 대답이 없자 순정은 한숨을 토해냈다.
‘우리야 그러지 마라. 재필이한테 너 밖에 없는 거 알잖니? 걔가 바람을 피우거나 그런 애가 아니잖아. 애가 지금 제대로 된 일을 하지 못하는 게 어디 재필이만 그런 것도 아니고. 요즘 워낙 다들 그렇잖아.’
“네. 그래서 그런 게 아니에요.”
우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워낙 그녀에게 잘 대해주는 편이었다. 평소에 반찬을 해다주시기도 하고 밥도 자주 사주셨다. 재필과 오래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순정 덕분이었다.
“죄송해요.”
‘네가 왜 죄송하니?’
“재필이와의 관계 그냥 이렇게 끝을 내게 된 것 같아서요. 어머니가 저에게도 많이 신경을 써주셨는데요.”
‘도대체 왜 그런 거라니?’
“그건.”
‘아우. 나도 참 속상하다. 너 만한 애가 어디에 있어? 네가 재필이에게 얼마나 잘 해주는지 내가 다 알고 있는데. 너는 재필이 무시도 안 하고. 걔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그렇게 지켜봐준 거잖니?’
“네.”
그게 너무 힘들었다. 그 시간들을 지금 순정의 입에서 들으니 뭔가 묘한 기분이었다. 칭찬이었지만 칭찬이 아닌 기분. 하지만 그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 시간을 선택한 것은 자신이었다.
‘내가 너를 좀 보고 싶은데?’
“그런데 저 지금 일하는 중이라서요.”
‘어머, 그렇지.’
“죄송해요.”
‘아니다. 내가 주책이지. 이 시간에 너한테 전화나 하고. 나중에 다시 전화하자. 응? 알았지? 부탁이다.’
“네. 들어가세요.”
우리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토해냈다. 순간 사무실로 들어가는 정식의 뒷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 나와 있었던 거지?”
우리는 입을 내밀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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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우리 씨. 내가 어제 부탁한 서류 다 해놓았습니까?”
“아, 그거 오후까지 하려고.”
“내가 그거 오후 회의에 쓰는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정식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자 사무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정식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서우리 씨. 정신 똑바로 안 차립니까? 개인의 일은 개인의 일 아닙니까? 요즘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회사 일에 너무 집중 못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일을 하면 안 되는 거죠.”
“죄송합니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그게.”
우리는 재빨리 컴퓨터를 확인했다. 30분 정도만 더 손을 보면 가능할 분량이었다. 이것부터 하면 될 거였다.
“30분 정도면.”
“그럼 점심시간까지 끝을 내시죠.”
“네? 네. 알겠습니다.”
정식은 늘 그가 보여주었던 차가운 모습 그대로 그의 사무실로 가버렸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한숨을 토해냈다.
“괜찮아?”
“어? 어. 괜찮아.”
우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으니까.
“가서 밥 먹고 와.”
“뭐 사다 줄까?”
“아니야. 오후에 간단히 뭐 먹으면 될 거야.”
우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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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뭐 일하는 기계야?”
혼자서 일을 하다 보니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일부러 일을 안 한 것도 아니고. 오후에 회의가 있다고 미리 말을 해준 것도 아니면서 갑자기 오후까지 회의이니 점심도 먹지 말라는 건 너무한 처사였다.
“아 배고파.”
아침에 늦잠을 자느라 밥도 먹지 못해서 속이 쓰릴 저오로 배가 고팠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슨 사람이 그렇게 이기적이야?”
우리는 입을 쭉 내밀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것저것 신경을 쓰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도대체 어머니는 어떻게 아신 거지?”
휴대전화를 봤지만 재필에게는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나오니 우리도 먼저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서우리 네가 자존심이 없냐? 뭐가 없냐? 내가 뭐가 아쉬워서 먼저 연락을 해? 말도 안 되는 거지. 절대로 안 될 일이지.”
“뭐 하는 겁니까?”
“아, 팀장님.”
정식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보는 중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던 거야?
“일은 다 한 겁니까?”
“네? 거의 다요.”
“거의 다요? 내가 점심 시간까지 다 끝을 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후에 회의가 있다고요.”
“알겠습니다.”
“빨리 하세요.”
정식은 이 말만 남기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우리는 입을 쭉 내밀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그러니까 사무실에서 친구가 없지. 밥도 혼자 먹고 들어오는 거 봐. 완전 마음에 안 든다니까.”
우리는 한숨을 토해내고 다시 자판에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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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했네요.”
“고맙습니다.”
우리가 파일을 갖고 가자 정식은 천천히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책상 위의 종이 가방을 우리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점심입니다.”
“네?”
“뭐, 내가 제대로 지시하지 못한 것도 있고 미안합니다. 서우리 씨 이거 먹어요. 나는 그럼 회의에 가보겠습니다.”
“저 팀장님.”
뭐야 저 자식? 왜 이렇게 갑자기 나를 신경을 써주는 척 하는 거야?
우리는 정식이 준 종이 가방을 열어보았다. 꽤나 비싼 한정식집의 도시락이 얌전히 담겨져 있었다.
“나를 위해서 일부러 사온 거야?”
이런 생각이 들자 우리는 코웃음을 치며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설마하니 정식이 자신을 위해서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것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는 볼을 잔뜩 부풀렸다.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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