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12년이라는 시간
“너 그거 뭐야?”
“어?”
점심 시간이 끝이 나고 사무실로 들어오던 소망이 우리의 손에 들린 걸 가리켰다. 우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팀장님이 나 먹으라고 하더라고.”
“그거 때문이었어?”
“어?”
“아니 우리랑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시더니 엄청나게 빠르게 식사를 하시더라고. 그래서 우리는 뭔가 오후 회의 때문에 준비할 것이 있으신가 생각을 했었는데 너 그거 주려고 하신 거였어?”
“설마.”
우리는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식은 평소에 그 어떤 사원도 그런 식으로 챙긴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정식이 우리에게만 특별대우를 해줄 리는 절대로 없었다.
“그냥 자기가 일을 시킨 게 미안하고 그랬나 보지. 나 점심도 못 먹고 일을 했으니까. 미리 오늘 오전까지 다 끝을 내야 하는 일이라고 하지도 않았고. 오늘까지라고만 지시를 하셨으니까.”
“그렇다고 누구 하나 그렇게 신경을 쓴 적이 있어? 늘 까칠하게 화만 내고 그랬지. 지금 너만 특별대우 아니야?”
“뭐라는 거야?”
우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지갑을 들고 사무실을 나가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소망도 그녀를 따라 나섰다.
“아니 이상하다니까?”
“뭐가 이상한 건데?”
“너 요즘 조금 이상하다고 팀원들이 이야기를 하니까. 막 헤어진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그랬거든? 그랬는데 팀장이 괜히 지랄하더라. 사람 없는 데서 사람 이야기 막 하고 그러는 거 아니라고.”
“맞는 말이지. 뭐.”
우리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소망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우리에게 살갑게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저었다.
“사랑하는 동기야. 나는 아니거든?”
“알겠어. 나 밥 먹고 올게.”
“응. 야 그거 엄청 비싼 거잖아?”
“그러게. 그런데 사왔네. 미안하긴 한가 보다.”
“설마. 팀장이 너 좋아하나?”
“뭐?”
소망의 말에 우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정식이 자신을 좋아하다니. 정식이 들으면 아마 발끈해서 뭐라고 한 마디 하고 갈 그런 말이 분명했다.
“절대 아니다. 팀장이 뭐가 아쉬워서 나를 좋아하냐? 팀장처럼 잘난 사람이. 너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라. 팀장이 들으면 지랄할 거다.”
“하긴 그렇지?”
우리는 살짝 눈을 찡긋하고 휴게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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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뭐야? 왜 엄마한테 얘기해?”
“아 놀래라. 너 뭐야?”
선재에게 물어보기 위해서 카페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재필이 갑자기 나타나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이거 놔. 뭐 하자는 거야?”
“너야 말로 뭐 하자는 거야? 우리 두 사람 헤어진 거 도대체 왜 엄마한테 이야기한 거야? 왜 그런 거냐고?”
“뭐래? 나도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어머니 전화 받고 놀라서 여기에 온 거라고. 이미 헤어진 거 다 알고 계시더라.”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뭐라고?”
재필의 팔을 거칠게 뿌리친 우리는 미간을 모았다.
“내가 그런 거짓말을 해서 도대체 뭘 하려고? 그리고 도대체 왜 그게 거짓말이라는 생각을 하는 거야? 웃기지도 않아. 너 지금 장난하는 거니?”
“그럼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내가 말씀 드렸다.”
두 사람을 발견한 선재가 밖으로 나와서 말했다. 그런 선재의 대답에 재필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도대체 그런 걸 왜 이야기한 거야? 형이 그런 걸 엄마에게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럼 이모가 여쭙는데 그냥 모른 척 해? 네가 요즘 이상하다는데. 네 집에서 우리 흔적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뭐. 나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냥 그렇게 발뺌이나 하고 그러라는 거냐? 지금?”
선재의 말에 재필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선재는 한숨을 토해내며 이리저리 목을 풀고 두 사람을 응시했다.
“형은 도대체 왜.”
재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원망스러운 눈으로 선재를 바라보며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선재 역시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나도 너희 두 사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 너희 두 사람이 싸우는데 도대체 왜 나까지 거기에 끼어있어야 하는 거냐? 이모가 얼마나 많이 물으셨는지 알아?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내가 뭘 알아야 대답을 해드리지.”
“죄송해요.”
우리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영향을 미칠 거라는 생각을 크게 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선재부터 벌써 자신들의 이별에 대해 영향을 받는 중이었다.
“어차피 너희 여기에 왔으니 이야기 좀 해라.”
“무슨 이야기.”
“임재필. 이제 너 내 말 안 듣는 거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풀리지 않은 거잖아. 그래서 이런 거고. 제대로 뭔가 이야기를 해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선재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자 재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도 선재의 말에 조심스럽게 동의했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 풀어야 하는 문제가 아직 남아있는 거였다. 그래서 이런 문제도 생기는 거였다.
“그래. 우리 이야기 좀 해야 해. 오빠 말이 맞아. 우리 두 사람 그냥 그렇게 끝이었잖아.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우리 두 사람 다 너무 유치하게 행동하고 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제대로 이야기는 해야지.”
“그래. 두 사람 좀 제대로 얘기 좀 해라. 내가 중간에 끼어서 아주 복잡해. 나는 그럼 장사하러 간다.”
손님이 카페로 들어가자 선재는 카페로 들어가 버렸다. 재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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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지내는 거야?”
“본가에서 지내는 거지 뭐.”
재필은 가볍게 땅을 차고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때 재필이 하는 행동이었다.
“미안하다.”
“뭐가?”
“내가 너무 못나서.”
재필은 살짝 말끝을 흐렸다. 우리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자신이 힘든 것만 생각을 했지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하는 재필이 힘들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재필이 너무 쉽게 말을 꺼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 재필의 반응을 보니 아니었다. 아니 재필도 그럴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내가 너무 못나서 우리가 이렇게 된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우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 중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천천히 모든 게 흐른 거였다.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에게 더 이상 뜨겁지 않은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우리 12년 동안 시간이 없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너무 바쁘기만 했잖아.”
우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재필이 공익으로 발령이 나면서 두 사람이 떨어져 지낸 것은 오직 4주 훈련 그것 뿐이었다. 겨우 4주. 두 사람 사이는 그렇게 점점 식어간 거였다. 오직 두 사람만 몰랐던 거였다. 익숙하단 이유로 그것을 외면하고 있던 거였다.
“서로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는데 그냥 앞만 보고 달린 거야. 이러면 뭐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을 한 채로.”
“그러게.”
“일단 시간을 좀 내자. 우리.”
재필은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입술을 적시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기는 한데 우리 다시 한 번 시작을 하자. 그렇다고 해서 지금부터 다시 뭐 뜨겁자는 건 아니고. 그렇게 하자고 해도 달라질 것도 하나 없을 거고. 일단 시간을 갖자. 헤어지자는 말. 이런 말 되게 이상한 말이기는 한데 일단 취소할게. 시간을 갖는 걸로 바꿔서 말해도 될까?”
취소. 우리는 그 말에 재필의 눈을 바라봤다. 미련인 것보다 그와 함께한 12년이라는 시간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그 시간은 너무 길었다. 그 시간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그 말 하나도 반갑지 않은 거 알지?”
“알고 있어.”
“속상하다.”
우리는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단 한 순간도 재필과 헤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상황이 온 거였고 그걸 돌릴 기회가 왔는데 너무 복잡했다.
“시간을 가지면 달라질까?”
“지금하고는 달라지겠지.”
“아니.”
우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 두 사람 달라지지 않을 거야.”
“서우리.”
“이미 헤어지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달라질 게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건데? 다시 이전처럼 뜨겁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 거 아니야. 나는 그럴 수 없어. 우리 두 사람 관계 이미 한 번 끝이 난 거야.”
“그러니까.”
재필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큰 다음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우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너와 함께 하고 싶어.”
“나를 사랑하기는 하니?”
“응.”
“거짓말.”
재필의 대답에 우리는 바로 차갑게 대꾸했다.
“너 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며? 더 이상 나에게 설레지 않는다며? 그런데 어떻게 그래?”
“그럼 내가 뭐라고 해야 하는 건데?”
재필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답답한 듯 하늘을 바라보고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의 시간이 어디로 온 건지 모르겠어. 1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나면 우리의 시간이 조금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우리도 결국 다른 사람들하고 같네. 결국 다를 게 하나도 없네.”
“그게 무슨 말이야?”
재필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우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뺨이 떨리게 미소를 지었다.
“헤어지자는 거야.”
“서우리.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두 사람이 이렇게 미련을 갖고 있으면 우리 주변 사람들이 더 힘들다는 거 모르는 거야?”
“그게 그렇게 쉬워?”
“아니. 안 쉬워.”
“그런데 어떻게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해?”
“내가 먼저 한 거야?”
“그래서 취소한다고 했잖아.”
“취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소리가 나와서 놀랐다. 재필 역시 우리 못지 않게 놀란 모양이었다.
“그게 너는 그렇게 쉽게 취소가 되는 말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런 말 절대로 취소 안 되는 거야. 헤어지자는 말이 그래서 무서운 거야. 한 번 입 밖으로 내뱉으면 돌이킬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힘든 거라고. 그런데 너는 그 말을 한 거잖아. 그래놓고 다시 돌리자는 게 말이 되는 거니?”
“말이 안 될 건 뭐야? 너 나 없이 괜찮아?”
재필의 말은 그대로 우리의 가슴에 꽂혔다. 재필 없이 괜찮지 않았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아니 괜찮을 수 없었다.
“안 괜찮아.”
“그러니까.”
“그런데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좋아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정말이야.”
우리의 목소리는 힘이 있고 단호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였다.
“나 지난 12년의 시간이 너무 아까웠어. 고등학교 시절 너에게 설렌 그 시간. 모두 다 사랑하고 있어. 그런데 우리의 시간이 오래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시간이 정답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잖아.”
“그래서 이대로 끝이다.”
재필은 혀로 볼 안쪽을 훑었다. 우리는 한숨을 토해내며 하늘을 보고 침을 삼켰다. 목이 뭔가에 막힌 듯 답답했다.
“네가 말하고 생각해봤어.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나? 아니더라고. 나도 그냥 그 시간이 아까워서 너를 만나고 있었던 거더라고. 그 12년의 시간이라는 게. 그저 그렇게 쌓인 거더라고.”
“그래서 끝이다.”
“응. 끝. 끝이야.”
12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쉽게 끝이 날 수 있을지 몰랐다. 재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우리는 먼저 그를 두고 돌아섰다. 우리의 시간은 이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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