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흔들리는 촛불
“그래서 브런치를 혼자서 다 먹었어?”
갑자기 툭 던지는 재필의 말에 우리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묘한 기분이었다.
“어? 어. 선재 오빠 거 되게 맛있잖아.”
“그래도 너무하다.”
재필은 투정을 부리면서도 별다른 생각을 더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우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아 선재 형 보기 쪽팔려서 어떡해. 안 그래도 형은 나를 너무 애처럼만 보는데. 더 애로 볼 거 아니야.”
“너 애 맞아.”
“내가 무슨?”
“선재 오빠랑 너랑 나이 차이가 얼마나 많이 나는데? 9살이다. 9살. 네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선재 오빠는 눈도 깜빡 안 할 걸? 조금 있다가 시간이나 나면 전화나 넣어.”
“알았어.”
재필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다시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우리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러다가 또 싸울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나 컴퓨터 좀 한다.”
“응.”
딱히 할 것은 없었다. 그냥 이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 무료하게 이것저것 클릭하다가 페이스 북에 접속했다. 그리고 지인들의 페이스 북을 보다가 우연히 정식의 페이스 북에 들어갔다.
“팀장님도 이런 거 하셨나?”
스크롤을 내리다가 순간 손이 멈췄다.
‘네가 보고 싶어. 내 심장보다 사랑한 너.’
“이게 뭐야?”
다른 글에는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유난히 이 글만 그랬다. 우리는 그 글의 좋아요를 누른 사람의 페이스 북을 눌렀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굳었다.
“너 뭐하고 있어?”
“어? 아니.”
재필은 우리가 보는 화면을 보더니 미간을 모았다.
“이거 누구야?”
“어? 그냥 아는 사람 거 같아서 봤지.”
“죽은 사람 페이지는 왜 봐? 친한 사람이었어? 나는 모르는 사람인 거 같은데? 너 내가 모르는 아는 사람도 있어?”
“아니야. 그런 거.”
우리는 다급히 검색 기록을 지우고 창을 닫았다. 재필은 입을 내밀고 별 것 아니라는 듯 욕실로 들어갔다. 우리는 가만히 빈 바탕화면을 바라봤다.
설마 아니겠지? 연인이 죽고 그런 거. 너무 소설 같잖아. 그래서 아무도 안 만나고 그렇게 까칠하게만 행동하는 건가?
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사실 같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정식의 페이지는 그냥 가벼운 대화만 담겨 있었다. 그 이전은 비공개였고. 아마 이것은 잊은 모양이었다. 뭔가 판도라의 상자라도 연 기분이었다.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확인한 기분.
“서우리. 미치겠다.”
“왜 그래?”
“아니야.”
재필은 대충 머리를 털며 욕실서 나왔다. 우리는 한숨을 토해내고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목 뒤가 뻐근했다.
“어깨 아파?”
“아니. 괜찮아.”
우리는 여전히 목을 풀면서 심들어하게 대꾸했다.
“나 지금 나가봐야 하는데.”
“나가. 누가 뭐래?”
우리의 날카로운 대답에 재필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가볍게 어깨에 손을 얹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됐다니까.”
“가만히 있어.”
우리가 피하려고 하자 재필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재필은 천천히 우리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깨 완전 뭉쳤다. 내가 그 동안 너한테 신경을 너무 못 썼다. 우리 여보한테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건데.”
“늦었다며. 그냥 가.”
“괜찮아. 이 정도는.”
“뭐래? 앞 타임 사람한테 싫은 소리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가. 얼른. 나 정말로 괜찮아. 우리가 뭐 하루 이틀이야?”
우리는 부러 밝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필은 입을 내밀면서도 다소 안심한 표정이었다.
“진짜? 나중에 뭐라고 안 하는 거지?”
“어. 진짜.”
재필은 우리의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와서 주물러줄게. 간다.”
“응. 가.”
재필은 대충 옷을 주워 입고 우리의 뺨에 입을 맞추고 나갔다. 우리는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왜 저래? 무슨 일이 있었나?”
하지만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뭔가 신경을 써주는 기분. 우리는 컴퓨터를 끄고 바닥에 누웠다. 차가운 기운이 좋았다.
“서우리 뭐하냐?”
집에 가려고 해서 친구들과의 약속도 잡아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눈을 감고 있다가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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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왔어? 저녁 먹으려고?”
“일 하러 왔어요.”
선재의 물음에 우리는 소매를 걷고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선재는 그런 우리를 말렸다.
“뭐 하는 거야?”
“어차피 바쁘잖아요. 주말에 딱히 할 것도 없고. 오빠 가게나 도우려고 그래요.”
“그런 거면 영화라도 봐. 내가 표라도 끊어줄게.”
“오빠. 나도 일해요.”
“그래도. 내가 나이가 너보다 아홉 살이나 많아. 아홉 살이나.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우리가 말리기도 전에 선재는 합정역에 있는 극장표를 예매했다.
“너 내 생년월일이랑 번호 알지?”
“네. 알아요.”
“가서 봐라. 그 영화 좋더라. 너 그 음악 영화 안 봤지? 고등학생 애들이 밴드 하는 거.”
“네. 바빠서 못 봤어요.”
“그래. 다행이다. 물어보고 끊고 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가? 아무튼 나는 그 영화 보고 되게 좋더라고. 너랑 나랑 영화 보는 취향 대충 비슷하니까. 이거 너도 좋아할 거야.”
선재는 잠시 고민하다가 카운터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서 우리의 가방에 던지듯 넣었다.
“오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너도 알다시피 내가 사람 대하는 걸 잘 몰라서 너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 뭔지 모르겠다. 맛있는 거 먹고. 영화 보면서 뭐 좀 사먹고. 알았지?”
“오빠. 저도 돈 번다니까요. 오빠가 안 이래도 괜찮아. 도대체 왜 이래요? 오빠. 밀지 마요.”
선재는 그대로 우리를 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문을 닫아버렸다. 우리는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선재에게 짧게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니었는데.
“서우리 뭐하냐?”
우리는 한숨을 토해내고 걸음을 옮겼다. 선재가 고마웠다. 별 것 아닌 것까지 다 신경을 써주는 마음에 재필에 대한 서운함까지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극장에 도착하니 영화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출출한 거 같은데 뭐라도 먹을까?”
매점 줄에 서서 이것저것 살피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어깨를 두드렸다.
“서우리 씨 여기에서 뭐 합니까?”
“어 팀장님. 여기에서 뭐 하세요?”
“퇴근하고 나서 그냥 집에 들어가기는 좀 그래서. 영화라도 한 편 볼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서우리 씨는 무슨 영화 봅니까?”
“저 그 노래하는 영화요.”
“나도 그거 보는데?”
정식의 말에 우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식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우리의 곁에 섰다.
“30분 후에 시작하는 거죠?”
“네? 팀장님도 그거 보세요?”
“네. 같은 거 보게 됐네요. 자리는?”
“아. 여기인데.”
“잠시 만요.”
정식은 우리의 표를 가지고 가더니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우리를 한 번 보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란히 앉아서 봐도 괜찮죠?”
나란히? 지금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는 거야?
“싫습니까?”
“아니요. 싫기는요.”
너라면 너보다 상사인 사람이 하는 말에 싫다고 할 수가 있겠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우리는 애써 미소를 지은 채로 어색하게 웃었다. 정식은 매대 앞에 서더니 우리를 바라봤다.
“뭐 먹을 겁니까?”
“아. 저요? 저는 달콤한 맛 팝콘 작은 거랑, 사이다 큰 거 한 잔이요.”
“달콤한 맛 팝콘 작은 거 하나, 콘소메 맛 팝콘 큰 거 하나, 사이드 큰 거 하나, 콜라 제로 칼로리로 큰 거 하나요.”
“제가 살게요. 저도 돈 있어요.”
“아닙니다. 이렇게 만났는데 제가 사야죠.”
우리가 카드를 내기도 전에 정식이 현금을 내버렸다. 직원은 자신과 정식을 보더니 그대로 계산을 하고 영수증을 건넸다.
“왜 이러세요? 팀장님께서 이러시면 제가 불편하잖아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서우리 씨 도움을 좀 받으려고 한다고요. 그리고 우리 같이 일하는 사람 아닙니까? 너무 경계하는 거 아닙니까? 서우리 씨가 이러면 내가 민망해지려고 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도대체 왜 이렇게 친한 척 하는 거냐고요?
우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직원이 주는 음료와 팝콘을 받았다. 정식은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이 영화 기대를 많이 했거든요. 감독의 전작들을 좋아합니다. 아일랜드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도 너무 좋았고, 뉴욕에서의 이야기도 좋았거든요. 이번에는 또 어떨지 구금합니다.”
“영화 좋아하세요?”
“네. 아주 좋아합니다.”
우리의 물음에 정식은 살짝 미간을 모았다.
“서우리 씨는 아직도 나를 이상하게 보는 모양입니다? 내가 영화도 안 좋아하고 문화생활도 하나도 즐기지 않을 사람처럼 보이는 거죠?”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괜찮습니다.”
정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보는지는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니까요. 내가 그렇게 여유가 있어 보이지 않으니, 서우리 씨나 다른 사람들 모두 그런 눈으로 본 거겠죠.”
“죄송해요.”
“아닙니다.”
정식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정식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안 다녀와도 괜찮겠어요? 제가 들고 있을게요.”
“아니요. 괜찮아요.”
아무리 근무 시간이 아니라도 직장 상사랑 같이 있는데 화장실을 갈 수 있는 간 큰 사람은 없을 거였다. 우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정식과 나란히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앉아요.”
“제가 바깥인데.”
“안쪽이 더 잘 보일 겁니다.”
우리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옆에 정식이 있다는 사실에 팝콘이 어디로 들어가는 건지 그냥 열심히 먹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정식의 웃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식은 영화 속의 소년처럼 해맑게 웃으며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뭐야? 이 남자. 이런 모습도 있었어?
정식이 시선을 돌리자 우리는 황급히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정식은 아무렇지도 않게 음료수를 마셨다. 그리고 쿵쾅. 우리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서우리. 너 지금 왜 이래? 너 지금 심장 뛰는 거야? 미친 거 아니야? 도대체 나 왜 이러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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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재밌네요.”
“그러게요.”
우리의 심드렁한 대답에 정식은 갑자기 고개를 숙여서 우리의 얼굴을 바라봤다. 우리는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뭐 하시는 거예요?”
“지금 상사랑 영화 본 게 되게 싫었다고 시위하는 겁니까?”
“그게 무슨?”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반응을 보일 수 없는 거죠.”
“재미있었어요.”
우리의 심드렁한 대답에 정식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짧은 심호흡을 하고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다행입니다.”
“뭐가요?”
“재미있었다니까요. 그렇게 미워하는 상사라 영화를 보면 재미있기가 되게 힘든 일인데 말이죠.”
“제가 언제 팀장님을 되게 미워한다고 했나요?”
“술 취해서 나에게 한 말 아직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식은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우리는 살짝 입을 내밀고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닙니다. 오늘 같이 영화 봐줘서 고마워요. 다음엔 내가 밥 사죠.”
우리는 어색하게 정식에게 인사를 했다. 뭔가 나쁜 일을 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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