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때때로 다정한 사람
“쉬어도 된다니까.”
“아니요. 저 괜찮아요.”
우리는 일부러 팔을 움직여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식은 못 마땅한 표정을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의사한테 이미 다 들었습니다. 서우리 씨 지금 상태 하나도 괜찮지 않다고. 다행히 우리 회사가 몸을 쓰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대한 휴식을 하는 편이 좋다고 하던데요.”
“괜찮습니다.”
우리가 억지로 튼튼한 척 하다가 고통에 미간을 모으자 정식은 숨을 크게 내쉬면서 입을 살짝 내밀었다.
“왜 팀장님이 그러세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괜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정식은 초조한 듯 핸들을 검지로 툭툭 쳤다.
“왜 그래요?”
“뭐가 말입니까?”
“되게 화가 난 것처럼 보여서요. 저랑 같이 가는 게 싫으세요?”
“누가 그렇다고 했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성질이야?
“내가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팀장님이 왜요?”
“서우리 씨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걸 내가 전혀 모르지 않았습니까? 내가 정말 너무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말이 어디에 있어요.”
우리는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었다.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닌데 자신이 대신 화를 낸다는 건 이상한 느낌이었다. 정식은 여전히 화를 참지 못하겠는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미안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식은 회사에 가기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차에 있다가 우리는 정식이 회사 앞까지 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서 정식을 바라봤다.
“저기 저 안 내려주세요?”
“안 내려줄 겁니다.”
“팀장님.”
“지하철역에서 서우리 씨를 보고 다친 사람이니 태운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안 내려줄 겁니다. 그냥 포기해요.”
정식의 단호함에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뭔가 복잡한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정말 정식은 그녀를 내려줄 생각이 하나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혀로 입술을 살짝 적셨다. 정식이 유난히 다정해진 것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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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은 좀 괜찮아?”
“응.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우리는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통증이 와서 순간 미간을 찌푸리자 소망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계단에서 넘어지고 그래.”
“이제 운동 신경이 최악인가 보다.”
우리는 별 것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가볍게 자판을 두드리면서 미간을 모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정식은 혀를 차고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소망은 입을 내리고 팀장실을 노려봤다.
“팀장님 정말 너무한다.”
“어? 뭐가?”
“아니. 팀원이 다쳤는데 꼭 저렇게 옆에서 혀를 차고 가. 하여간 사람이 성격이 너무 삐뚤었단 말이야.”
“그래도 팀장님 너무 그러지 마라.”
“어? 너 뭐야?”
우리가 정식의 편을 들자 소망은 곧바로 묘한 표정을 지었다.
“팀장이랑 뭐 있지?”
“뭐가 있긴 뭐가 있어? 염소망 씨 일 하세요. 회사가 놀러 나오는 곳입니까?”
우리가 정식의 말투를 흉내 내자 소망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우리는 마음 한 편이 불안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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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저 때문에 고생하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팀장님께서도 약속 있으실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우리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정식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우리는 살짝 입을 내밀고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목도 아픕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정식은 차를 갓길에 세우더니 한숨을 토해냈다.
“성추행 아닙니다.”
“네?”
우리가 정식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정식은 우리의 목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우리가 뭐라도 하기도 전에 가볍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괜찮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정식의 손이 되게 편했다.
“괜찮죠?”
“저기 그러니까.”
“처음부터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식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처음부터 서우리 씨를 좋아했습니다. 신입으로 들어오셨을 때부터. 그런데 서우리 씨 옆에는 좋은 사람이 있었죠. 제가 낄 자리가 없었습니다. 지금 당장 그 자리로 가겠다는 게 아닙니다. 그냥 서우리 씨가 너무 놀라는 거 같아서. 갑자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정식의 목소리는 꽤나 진지했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정식이 자신을 좋아할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었다. 자신은 누군가가 사랑해줄 만큼 그런 멋진 여자가 아니었다.
“도대체 왜요?”
우리의 질문에 정식은 입을 내밀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엷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유도 없이 그러셨다고요?”
“이제 서우리 씨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는 아무런 이유도 필요 없다는 것을 말이죠.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어떤 이유가 생긴다면 반대로 그 이유로 인해서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있는 겁니다. 더 이상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죠. 그런 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유가 있어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거요. 그냥 좋아하는 겁니다. 그냥. 서우리 씨라는 이유로.”
“팀장님.”
정식은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물더니 핸들에 손을 올렸다.
“미안합니다.”
“뭐가요?”
“갑자기 내 감정을 모두 다 이야기해서요. 누군가의 감정을 듣는다는 거 쉬운 일 아니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우리 씨가 놀랄 수도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럼 출발하죠.”
우리는 정식의 진지한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그 정도로 진지하게 정식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극장에서 가슴 한 번 떨린 것을 가지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너무나도 우스운 일이었다. 집으로 오는 동안 두 사람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기다리는 은화를 보고 당황해서 정식을 쳐다봤다.
“엄마한테 뭐라고 해요?”
“같은 직장 동료라고 하죠.”
“아니 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엄마가 뭐라고 할 텐데요.”
하지만 우리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정식은 집에 차를 세우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우리의 문도 열어줬다. 은화가 놀라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 아는 사이니?”
“오는 길에 버스를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타라고 말했습니다. 혹시 잘 모르는 사람이랑 와서 놀라신 건가요?”
“아니.”
정식의 깍듯한 태도에 은화는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 조실 언니네 아들이면 더 믿음이 가지. 고마워서 그래. 고마워서. 우리 딸 챙겨줘서 너무 고마워서 그래. 고마워요. 내가 다음에 맛있는 식사 대접할게.”
“네. 들어가세요.”
은화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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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하기로 했다.”
“어?”
집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은화가 내뱉은 말에 우리가 놀라서 그녀를 바라봤다. 은화는 차분했다.
“내가 그 동안 등신이었어. 왜 그러고 산 건지. 그러고 살 필요가 하나 없었던 건데 말이야.”
“엄마.”
“괜찮아.”
우리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은화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우리의 어깨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뭐가 미안해?”
“진작 이 거지같은 생활 다 그만 뒀어야 하는 건데. 너 크면 갈라서야지. 그렇게 하던 게 지금까지 왔다. 그래도 너 시집을 가야 하는데 그게 흠일까봐. 엄마 하나인 거 그게 흠일까 그랬어.”
“그게 무슨 흠이야? 옆집도 엄마만 있는 거 아니야? 그리고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걸 가지고 뭐라고 해요.”
우리는 은화를 안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은화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내가 너무 부족해서 우리 딸을 너무 힘들게 하는 거 같아. 우리 딸이 이런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닌데. 우리 딸이 이런 일 당하지 않고 더 행복하고 그래야 하는데. 이 팔 어떻게 해야 해. 흉 남을 거 아니야.”
“팔 좀 부러졌어. 그리고 흉 좀 생기면 어때? 나 민소매도 잘 안 입는데.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맞았어야 했어.”
“엄마!”
은화의 말에 우리는 비명을 지르듯 크게 말했다. 은화는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으로 가.”
“저기.”
우리는 심호흡을 하고 은화를 바라봤다. 그리고 뭔가 결심한 듯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나 헤어졌어.”
“알고 있어.”
“어?”
우리가 놀란 표정을 짓자 은화는 가볍게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안방으로 향했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리고 엷은 미소를 지은 채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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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이 왜 그래?”
“그러게요.”
선재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우리는 별 것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오빠 미안한데 짐 좀 전부 집으로 보내줄 수 있어요?”
“집으로? 말씀 드린 거야?”
“네. 이미 알고 계셨다고 하더라고요.”
“당연하지.”
선재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에게 음료수를 건넨 후 우리의 앞에 앉아 살짝 아랫입술을 물다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뭘요?”
“재필이랑.”
“끝이에요.”
우리의 단호한 대답에 선재는 별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다. 그러다 미소를 지은 채로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빠. 저 이제 스물아홉이거든요.”
“내가 너 열일곱에 봤다.”
선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람 좋아 보이더라.”
“누구요?”
“팀장.”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런 사이 하라고.”
“네?”
선재의 말에 우리는 머리가 멍해졌다. 선재는 이리저리 목을 풀고 이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너 12년이다. 한 사람 만난 거. 이제 곧 그 빈자리가 엄청나게 춥게. 그리고 크게 느껴질 거야.”
“이미 헤어진 지 시간 흘렀어요.”
“아직은 적응 기간이고.”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음료수를 마셨다. 선재는 그런 그녀를 잠시 더 보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빈자리.”
있었다.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누군가와 함께 했는데 구멍이 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구멍에 뭔가 집착하거나 매몰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 나름대로 잘 견딜 수 있을 거였다. 선재의 카페를 찾는 것도 어쩌면 재필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괴롭지는 않았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였다.
“저 이제 사무실 가볼게요.”
“그래. 택배는 내일 들어갈 거야.”
“네. 그럼 갈게요.”
선재는 카페 앞까지 마중 나왔다. 우리는 미소를 지은 채로 짧게 고개를 숙이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선재는 그런 우리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토해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턱을 어루만지다 이내 체념한 듯 작게 웃어 보이더니 다시 카페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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