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헤어졌지만 헤어지지 않은 것
“너 뭐 하자는 거야?”
“너야 말로 뭐 하자는 거야?”
재필이 화를 내자 우리가 그를 노려봤다.
“팀장님이야. 우리 팀 팀장님. 선재 오빠 카페 유명한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내가 창가 자리 있으니까 오셨어. 그래서 아는 사람이 왔는데 따로 앉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니? 너 그렇게 생각 안 하니?”
“나랑 가던 가게요. 그런 가게를 너는 지금 어떤 남자랑 아무렇지도 않게 갈 수가 있다는 거야?”
“그러는 너는?”
“내가 뭐?”
“그 여자애 누구니?”
“그냥 아는 동생이야.”
“그래?”
우리가 말꼬리를 올리자 재필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는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다. 우리가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우리 헤어진 거 아니야? 이미 헤어진 사이에서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데? 우리 두 사람 왜 이래야 하는 거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거잖아.”
“아니.”
재필의 말에 우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헤어졌어.”
“서우리.”
“내가 도대체 너한테 무슨 미련이 더 남아서 그걸 그냥 시간을 갖자는 말에 그래. 라고 대답을 하겠어? 나는 아니야.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너를 너무 사랑했던 만큼 지쳤어. 나 너무 힘들다고. 제발 그만해.”
우리의 말에 재필은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숨을 토해냈다. 우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너 때문에 내가 부끄러워서 못 살겠어.”
“내가 뭐?”
“됐어. 우리 이제 이런 이야기로 더 왈가왈부하지 말자. 우리 끝이잖아. 네가 헤어지자고 해놓고서 왜 이러는 건데?”
“그래. 끝이야. 끝이라고.”
재필은 혼자 열을 냈지만 우리는 오히려 덤덤해졌다. 우리는 그런 재필을 물끄러미 보고는 돌아섰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재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바닥을 한 번 세게 찼다.
=======================
“오빠 죄송해요.”
“아니야.”
우리의 사과에 선재는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은 채 우리를 바라봤다.
“그 녀석은 도대체 너에게 왜 그러는 거냐? 좀 놀라지 않았어? 너한테 뭐라고 하지 않아? 함부로 한다거나.”
“아니요.”
우리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재필이가 욱 하는 게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냥 여기에서 저를 볼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 많이 놀란 모양이에요. 저도 많이 놀랐으니까. 다른 건 아무 문제 없어요.”
“그래.”
“그런데 팀장님은?”
“그 아가씨랑 갔는데?”
“네?”
뭐야? 내가 궁금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또 어린 여자가 나타나니까 그 여자랑 같이 가버린 건가.
“오빠 음식 값은.”
“팀장이라는 사람이 다 내고 가더라. 그리고 네가 먹을 거 괜찮다고 해도 부득부득 자기가 내고 포장 맡겨놓고 갔어.”
“그래요?”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차가운 것 같으면 또 다정하고, 다정해서 묘한 기분이 들면 또 거리를 두고. 멀어졌다.
“그 남자 괜찮아 보이더라.”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요. 설마 오빠 지금 저 오해하고 있는 거 아니죠? 제가 바람 피워서 저희 헤어진 거 아니에요.”
“그런 오해 안 해.”
우리의 말에 선재는 가만히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 물끄러미 우리를 보고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한숨을 한 번 내쉰 후 입을 열었다.
“내 욕심 같아서는 너랑 재필이가 무조건 같이 연인이 되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잖아. 그리고 재필이 자식이 너한테 어떻게 하는지도 다 본 거고. 혹시나 좋은 사람이 운이 좋게 나타났는데 재필이 때문에 만나지 못하는 거라면 그러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선재의 말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편안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그의 말이 옳았다.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만일 재필과의 일이 없었더라면 만나는 것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다. 성격이 조금 까칠한 것을 제외하고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 재필에 대한 미련이 완벽하게 정리가 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곳을 볼 여유는 없었다.
“오빠 혹시나 재필이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 아니죠? 걔 괜히 오해하고 또 저한테 화를 낼 거예요. 그리고 오빠한테도 뭐라고 할 거고요.”
“이미 나랑은 제대로 원수가 된 거 같아.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내가 괜히 못 막아줘서 너한테 폐를 끼친 것 같다.”
“폐는요. 그럼 저는 가볼게요.”
“그래 조심히 가. 멀리는 안 나가.”
“네. 안녕히 계세요.”
우리는 밝게 미소를 지은 채로 카페를 나왔다. 그리고 카페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얼굴에서 모든 표정을 지웠다. 너무나도 지쳤다. 웃을 힘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은 아무 잘못을 한 것도 없는데 무슨 잘못을 한 것 같았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일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힘들다. 너무 힘들다.”
“뭐가 그렇게 힘들어요?”
“팀장님!”
정식은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은 채로 선재의 카페 맞은 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185는 훌쩍 넘는 늘씬한 정식이 정장 차림에 손에 콘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모습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식은 살짝 미간을 모으더니 이내 밝게 웃었다.
“내가 서우리 씨 웃게 한 겁니다.”
“누가 이 날씨에 아이스크림을 먹어요. 그리고 팀장님처럼 그렇게 정장 입고 먹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알고 있습니까? 서우리 씨 기다리느라 소설 책을 두 권이나 읽었습니다.”
“아니 누가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리고 거짓말.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책을 두 권이나 읽어요?”
“내가 그런 거짓말을 왜 합니까?”
우리의 말에 정식은 여유롭게 대꾸하며 우리를 향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살짝 문 채로 고개를 저었다. 괜히 더 오해하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의 감정 소모는 싫었다.
“됐어요. 그냥 가시지 그랬어요.”
“어차피 같이 가는 건데 기다린 거죠.”
“아니요.”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정식을 응시했다. 우리의 태도가 변화하자 정식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내 태도가 서우리 씨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되는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고 계신 분이 이러세요? 저는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팀장님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고요.”
“서우리 씨.”
“그렇게 부르지도 말아주세요.”
정식은 뭔가에 상처를 입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우리는 움찔했지만 여기에서 물러날 수 없었다. 자신 역시 정식의 말에 묘한 감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선을 그어야만 했다.
“저는 가볼게요. 죄송합니다.”
우리는 마치 도망이라도 치는 사람처럼 멀어졌다.
=====================
“너 여기 앉아봐라.”
집에 도착하니 또 다른 복병이 있었다. 요 며칠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던 아버지 지광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앉아보래도.”
“아우 그만 해요.”
은화가 애써 중재를 해보려고 했지만 지광은 단호했다. 우리는 결국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자리에 앉았다.
“헤어졌냐?”
“여보!”
지광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은화는 그를 쳐다봤지만 지광은 덤덤했다. 우리도 덤덤하게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헤어진 건 아니고 시간을 좀 갖기로 했어요. 저희 두 사람 모두를 위해서 그게 필요할 거 같아서요.”
“헤어져라.”
“아빠.”
“헤어지래도.”
지광의 말에 우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헤어진 거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광의 이런 말은 괜히 서운했다.
“그런 못난 놈을 도대체 네가 왜 만나는 건지 모르겠다. 자기가 뭐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는 놈을 도대체 왜 만나? 그 녀석 만나면 네가 행복할 거 같아? 아니다. 그냥 너는 회사나 다니다가 네 엄마가 소개를 해주는 자리에 나가서 결혼하면 되는 거야. 뭘 안다고 그렇게 혼자서 설쳐.”
“됐어요.”
우리는 고개를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지광이 컵을 던져서 그대로 우리의 머리에 던졌다. 우리가 비명을 겨를 겨를도 없이 우리의 이마에 부딪친 컵은 바닥에 떨어져 파편이 되었다. 은화는 입을 가린 채 멍한 표정을 지었고 지광만이 덤덤한 채로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고얀 것. 어디 지 아비 말이 끝이 나지도 않았는데 일어나는 게야! 이게 다 당신이 모자라서 그렇지!”
그리고 지광이 은화에게 손을 뻗고 은화가 몸을 웅크리는 순간 우리는 지광을 막아섰다. 지광의 눈에 불이 켜졌다.
“이 망할 년이.”
“그만 좀 해. 지겹지도 않아요?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그렇게 엄마에게 함부로 하고 부끄럽지도 않아요?”
“이 미친 년이!”
지광은 다시 손을 들었지만 우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은화는 벌벌 떨며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엄마 뭐 해? 얼른 경찰에 신고해.”
“뭐?”
“얼른 경찰에 신고하시라고요.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맞고 살 건데. 엄마 얼른 경찰에 신고해. 이건 여기에서 끝을 내야 하는 거라고.”
“이런 건방진 년!”
지광은 있는 힘을 다 해서 우리를 떠밀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
“이제 정신이 좀 들어요?”
“팀장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어깨에 꽤나 통증이 강했다. 정식은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토해냈다.
“좀 괜찮습니까?”
“팀장님이 여기에 왜?”
“어머니가 저희 집으로 뛰어 오셨습니다. 아버님 좀 말려달라고. 지금 딸이 다 죽어간다고. 아버님은 지금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계십니다. 뭐 초범이라 바로 나오시기는 하겠지만 일단 뭔가 배우시기는 할 겁니다. 아내랑 딸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시겠죠.”
“되게 창피하다.”
“뭐가요?”
“전부 다요.”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문 채로 고개를 숙였다. 자꾸만 정식에게 초라한 모습만을 보이는 것 같았다. 정식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을 할지 너무나도 무서웠다. 이제 그녀에게 아무런 호기심도 남지 않을 거였다.
“초라해.”
“도대체 뭐가 초라합니까?”
“초라하죠. 12년 사귄 애인이랑 헤어지고, 싸우고. 또 여기에 아빠는 가정 폭력이고. 되게 우습지 않아요?”
“하나도 그렇지 않습니다.”
정식은 우리의 머리를 넘겨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 정말 어떻게 해요? 한 순간 다 잃은 거 같아. 나 정말 이런 모습 보이기 싫거든요. 너무 싫거든요. 그래서 재필이와의 관계를 더 붙들고 있었던 거 같아요. 적어도 걔는 아빠 같은 남자는 아니었거든요. 다정하고 배려심이 깊고. 헤어지자는 이야기 전까지는 다 나에게 져주고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래요.”
정식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우리를 품에 안았다. 정식의 품에서 우리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엄마가 나를 미워하지 않겠죠? 우리 가족이 망가지지 않겠죠?”
“이제 스물아홉이에요. 더 이상 어머니 아버지 일에 신경 쓰지 말아요. 서우리 씨 일에 조금 더 집중해요.”
정식의 말은 부드럽게 우리에게 울렸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이나 정식의 품에서 서럽게 울었다.
'☆ 소설 창고 > 우리의 시간[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맨스 소설] 우리의 시간 [19장. 12년짜리 구멍] (0) | 2016.09.20 |
---|---|
[로맨스 소설] 우리의 시간 [18장. 때때로 다정한 사람] (0) | 2016.09.19 |
[로맨스 소설] 우리의 시간 [16장. 어색한 만남] (0) | 2016.09.12 |
[로맨스 소설] 우리의 시간 [15장. 이별 후에 여자가 겪어야 하는 일들] (0) | 2016.09.09 |
[로맨스 소설] 우리의 시간 [14장. 다르게 보이는 사람] (0) | 2016.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