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일을 그만 두면 할 일이 있나?”
“찾아봐야 합니다.”
서운의 대답에 유 회장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나은의 부탁을 듣기는 했지만 그 역시 서운이 마음에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을 꽤나 잘 하는 편인데 단순히 나은의 질투로 밀어내기는 아쉬웠다.
“그럼 내 비서를 하는 게 어떤가?”
“네?”
서운이 놀라서 유 회장을 바라봤다.
“자네가 백 사장의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 정도의 능력이라면 꼭 백 사장이 아니어도 될 거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나는 자네의 능력이 필요해. 이런 늙은이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지금 바로 대답을 해드려야 합니까?”
“아니.”
서운의 대답에 유 회장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서운은 그 누구에게도 쉽게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자네가 백 사장을 마음에 두고 있더라면 그것도 내 곁에 있는 게 더 나을 걸세. 자네가 혼자 있으면 나은이가 자네를 어떻게든 휘두르려고 노력을 하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인정을 하는군.”
유 회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한 가지 물어도 되는가?”
“괜찮습니다.”
“도대체 왜 자네와 백 사장은 서로를 좋아하는 거 같으면서도 그리 곁을 맴돌기만 하는 건가. 그런 것이 두 사람에게 아무런 득도 되지 못할 거라는 것은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네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저희는 가족입니다.”
“가족.”
서운의 대답에 유 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낮게 신음을 흘린 후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자네가 그 곁에서 그런 식으로 머문다면 내 딸이 절대로 정신을 차리지는 못할 걸세.”
“죄송합니다.”
“아니야.”
서운의 사과에 유 회장은 손을 휘저었다. 어차피 서운의 잘못이 아니었다. 나은이 그 모양인 것은 그의 잘못도 컸다.
“어릴 적부터 나는 그 아이에게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다고 알려줬지. 실제로는 가지지 못할 것도 많은데 말이야. 하지만 내가 뒤늦게 가진 아이라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네.”
유 회장의 시선이 나은의 어릴 적 사진으로 향했다.
“그 시절의 나에게 유일한 낙이었어. 태화 녀석이 나의 두 번째 부인이 미워서 엇나가고 그랬었으니까. 그 상황에서 어리광을 부리던 그 아이를 내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는가?”
“이해합니다.”
“고맙군.”
유 회장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조금은 덤덤한 눈빛으로 서운을 응시했다. 서운은 침을 삼켰다. 그의 눈빛은 뭔가 서늘했다. 유 회장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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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부사장?”
“그래.”
나은의 대답에 태화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두 다 빼앗기는 거였다.
“내가 도대체 왜 네 밑에 있어야 하는 건데? 그 회사 원래 내 거야. 아버지가 내게 준 거라고.”
“그런데 그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건 오빠 아니었어? 오빠가 모든 것을 다 망쳐놓고 도대체 누구 탓을 하는 거야? 이미 망가진 거. 그거 KW에서 인수하게 한 거 바로 나야. 그런데 지금 누구한테 화를 내는 거야.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니? 내가 아니었으면. 백현. 그 사람 오빠의 회사 완전히 없어 버릴 생각이었어. 그런데도 지금 나에게만 화를 내고 있는 거야?”
“그렇게 네가 손에 넣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면 나를 위해서 움직이게 해. 나는 네 식구니까.”
“식구?”
태화의 말에 나은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단 한 번도 그녀는 태화를 식구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아버지만 같을 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면 부사장 직함을 받던가.”
태화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저거라도 받는 게 우선이었다. 나은의 말처럼 백현이 전면에 나섰더라면 이 정도도 가지지 못할 거였다. 하지만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절대로 나은의 밑에 갈 수는 없었다.
“됐어. 그런 거 필요 없어.”
“좋아.”
나은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선택한 거니까.”
“너 죽일 거야.”
“죽여.”
태화의 살벌한 협박도 나은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나은은 그저 여유로운 미소만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오빠가 무슨 생각을 하건. 그건 결국 오빠의 숨통을 조일 거야. 나는 내가 원하는 걸 하나 얻었으니 더 이상 백현 그 사람의 목을 조르지 않을 거거든.”
“원하는 것?”
“응.”
나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태화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가 여기에서 더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좋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자꾸만 이렇게 나온다면 내가 모든 것을 다 망가뜨릴 거야.”
“그러던지. 하지만 오빠가 내 것을 망가뜨리려고 한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할 거야. 나는 오빠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당하고만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오빠가 내 것을 건드린다면. 나는 더 많은 것을 망가뜨릴 거야.”
나은의 장난스러운 미소에 태화는 침을 삼켰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유 회장을 더 많이 닮은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나은이었다. 저 여유로운 표정. 자신이 나은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유 회장이 나은의 뒤에서 그녀를 지켜주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은이 유 회장, 아버지와 너무 닮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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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이 뭐라고 하지?”
“자신의 비서를 맡아달라고 하셨습니다.”
“비서?”
서운의 대답에 백현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서운은 그저 덤덤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한다고 했지?”
“일단 더 고민한다고 했습니다.”
“갈 건가?”
“네.”
서운의 대답에 백현은 크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마를 짚은 채로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몸을 뒤로 젖혔다.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유 회장과의 무언가를 이길 수 있는 힘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유 회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지?”
“그걸 알려드려야 합니까?”
“뭐라고?”
“백 사장님은 저를 지켜주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유 회장님은 저를 지켜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거기로 가겠다는 건가?”
“네.”
백현은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속에서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지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서 서운을 만지려고 했지만 서운은 그의 손을 뿌리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손대지 마.”
“한서운.”
“내게 손 대지 말라고.”
서운의 차가운 말에 백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더 이상 나는 네 비서가 아니니까. 이제 더 이상 너를 존중하지도 않을 거야. 그럴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내가 너에게 뭘 하거 ㄴ너는 이제 나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마. 나는 더 이상 너에게 뭔가를 바라지 않으니까. 그냥 너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실망이라도 한 건가?”
“그래.”
서운은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은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에는 미련이 남아있었다.
“너 때문이야.”
“나?”
“그래. 이 모든 걸 만든 건 너였으니까.”
백현의 대답에 서운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네가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거니까.”
“너를 위해서였어.”
“나를 위해서?”
백현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렸다. 백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원망스러운 눈으로 서운을 응시했다.
“한서운. 너는 나를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한 게 아니야. 결국 너를 위한 거였지. 그래놓고 다시 나를 망가뜨리려고 하는 거고.”
“백현.”
서운이 손을 내밀었지만 백현은 뒤로 물러났다. 백현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불쌍하게 버려진 강아지가 아니었다. 서운은 그제야 그것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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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결혼이라니?”
“해.”
서운의 대답에 백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서운을 응시했다. 서운은 그저 덤덤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후회하지 않아?”
“후회하지 않아.”
서운은 힘을 주어 답했다.
“어차피 너는 지금 그 여자랑 결혼하는 게 가장 좋은 거야. 네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행복.”
서운의 말을 따라하면서 백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서운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물다 입을 열었다.
“너는 후회하지 않겠어?”
“내가 왜 후회를 해?”
“그러게.”
서운의 대답에 백현은 더욱 어색하게 웃었다.
“네가 왜 후회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너를 지켜준다고 했어. 너를 주워온 그 순간부터. 그리고 나는 너를 지킬 거야. 내가 너를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은 네가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거겠지. 그 여자는 너에게 정답이야.”
“나는 그런 거 바라지 않아.”
“그러면 나를 위해서 해.”
“뭐라고?”
서운의 대답에 백현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서운은 그런 백현과 다르게 덤덤함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더 많은 것을 바라. 우리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봐야 더 높은 곳에는 오를 수 없는 거잖아. 안 그래?”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와의 결혼을 통해서 그것을 얻어낼 수도 없어. 그건 다른 누군가를 속이는 거니까.”
“그 여자도 네가 필요한 거 아니야?”
“필요?”
백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나은 역시 그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거였다. 그리고 거기에 어울리는 사람은 자신이었고. 다른 이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너는 그냥 그 필요가 되어주면 되는 거야. 그러면 그 여자는 너에게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을 테니까.”
“필요라.”
백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서운의 말이 모두 옳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내가 정말로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뭐?”
“네가 아니라면?”
“우린 가족이야.”
서운은 애써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 두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마. 우리 두 사람은 한집에서 같이 자라난 사이인데. 뭔가 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거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서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혀로 이를 훑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몇 번 혀로 건드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래.”
서운의 미소. 백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운이 원하는 거라면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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