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창고/지독한 연애[완]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14장]

권정선재 2016. 10. 23. 13:37

14

일을 그만 두면 할 일이 있나?”

찾아봐야 합니다.”

 

서운의 대답에 유 회장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나은의 부탁을 듣기는 했지만 그 역시 서운이 마음에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을 꽤나 잘 하는 편인데 단순히 나은의 질투로 밀어내기는 아쉬웠다.

 

그럼 내 비서를 하는 게 어떤가?”

?”

 

서운이 놀라서 유 회장을 바라봤다.

 

자네가 백 사장의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 정도의 능력이라면 꼭 백 사장이 아니어도 될 거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나는 자네의 능력이 필요해. 이런 늙은이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지금 바로 대답을 해드려야 합니까?”

아니.”

 

서운의 대답에 유 회장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서운은 그 누구에게도 쉽게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자네가 백 사장을 마음에 두고 있더라면 그것도 내 곁에 있는 게 더 나을 걸세. 자네가 혼자 있으면 나은이가 자네를 어떻게든 휘두르려고 노력을 하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인정을 하는군.”

 

유 회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한 가지 물어도 되는가?”

괜찮습니다.”

 

도대체 왜 자네와 백 사장은 서로를 좋아하는 거 같으면서도 그리 곁을 맴돌기만 하는 건가. 그런 것이 두 사람에게 아무런 득도 되지 못할 거라는 것은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네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저희는 가족입니다.”

가족.”

 

서운의 대답에 유 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낮게 신음을 흘린 후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자네가 그 곁에서 그런 식으로 머문다면 내 딸이 절대로 정신을 차리지는 못할 걸세.”

죄송합니다.”

아니야.”

 

서운의 사과에 유 회장은 손을 휘저었다. 어차피 서운의 잘못이 아니었다. 나은이 그 모양인 것은 그의 잘못도 컸다.

 

어릴 적부터 나는 그 아이에게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다고 알려줬지. 실제로는 가지지 못할 것도 많은데 말이야. 하지만 내가 뒤늦게 가진 아이라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네.”

 

유 회장의 시선이 나은의 어릴 적 사진으로 향했다.

 

그 시절의 나에게 유일한 낙이었어. 태화 녀석이 나의 두 번째 부인이 미워서 엇나가고 그랬었으니까. 그 상황에서 어리광을 부리던 그 아이를 내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는가?”

이해합니다.”

고맙군.”

 

유 회장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조금은 덤덤한 눈빛으로 서운을 응시했다. 서운은 침을 삼켰다. 그의 눈빛은 뭔가 서늘했다. 유 회장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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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사장?”

그래.”

 

나은의 대답에 태화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두 다 빼앗기는 거였다.

 

내가 도대체 왜 네 밑에 있어야 하는 건데? 그 회사 원래 내 거야. 아버지가 내게 준 거라고.”

그런데 그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건 오빠 아니었어? 오빠가 모든 것을 다 망쳐놓고 도대체 누구 탓을 하는 거야? 이미 망가진 거. 그거 KW에서 인수하게 한 거 바로 나야. 그런데 지금 누구한테 화를 내는 거야.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니? 내가 아니었으면. 백현. 그 사람 오빠의 회사 완전히 없어 버릴 생각이었어. 그런데도 지금 나에게만 화를 내고 있는 거야?”

그렇게 네가 손에 넣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면 나를 위해서 움직이게 해. 나는 네 식구니까.”

식구?”

 

태화의 말에 나은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단 한 번도 그녀는 태화를 식구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아버지만 같을 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면 부사장 직함을 받던가.”

 

태화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저거라도 받는 게 우선이었다. 나은의 말처럼 백현이 전면에 나섰더라면 이 정도도 가지지 못할 거였다. 하지만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절대로 나은의 밑에 갈 수는 없었다.

 

됐어. 그런 거 필요 없어.”

좋아.”

 

나은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선택한 거니까.”

너 죽일 거야.”

죽여.”

 

태화의 살벌한 협박도 나은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나은은 그저 여유로운 미소만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오빠가 무슨 생각을 하건. 그건 결국 오빠의 숨통을 조일 거야. 나는 내가 원하는 걸 하나 얻었으니 더 이상 백현 그 사람의 목을 조르지 않을 거거든.”

원하는 것?”

.”

 

나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태화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가 여기에서 더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좋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자꾸만 이렇게 나온다면 내가 모든 것을 다 망가뜨릴 거야.”

그러던지. 하지만 오빠가 내 것을 망가뜨리려고 한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할 거야. 나는 오빠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당하고만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오빠가 내 것을 건드린다면. 나는 더 많은 것을 망가뜨릴 거야.”

 

나은의 장난스러운 미소에 태화는 침을 삼켰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유 회장을 더 많이 닮은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나은이었다. 저 여유로운 표정. 자신이 나은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유 회장이 나은의 뒤에서 그녀를 지켜주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은이 유 회장, 아버지와 너무 닮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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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이 뭐라고 하지?”

자신의 비서를 맡아달라고 하셨습니다.”

비서?”

 

서운의 대답에 백현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서운은 그저 덤덤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한다고 했지?”

일단 더 고민한다고 했습니다.”

갈 건가?”

.”

 

서운의 대답에 백현은 크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마를 짚은 채로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몸을 뒤로 젖혔다.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유 회장과의 무언가를 이길 수 있는 힘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유 회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지?”

그걸 알려드려야 합니까?”

뭐라고?”

백 사장님은 저를 지켜주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유 회장님은 저를 지켜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거기로 가겠다는 건가?”

.”

 

백현은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속에서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지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서 서운을 만지려고 했지만 서운은 그의 손을 뿌리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손대지 마.”

한서운.”

내게 손 대지 말라고.”

 

서운의 차가운 말에 백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더 이상 나는 네 비서가 아니니까. 이제 더 이상 너를 존중하지도 않을 거야. 그럴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내가 너에게 뭘 하거 너는 이제 나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마. 나는 더 이상 너에게 뭔가를 바라지 않으니까. 그냥 너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실망이라도 한 건가?”

그래.”

 

서운은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은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에는 미련이 남아있었다.

 

너 때문이야.”

?”

그래. 이 모든 걸 만든 건 너였으니까.”

 

백현의 대답에 서운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네가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거니까.”

너를 위해서였어.”

나를 위해서?”

 

백현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렸다. 백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원망스러운 눈으로 서운을 응시했다.

 

한서운. 너는 나를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한 게 아니야. 결국 너를 위한 거였지. 그래놓고 다시 나를 망가뜨리려고 하는 거고.”

백현.”

 

서운이 손을 내밀었지만 백현은 뒤로 물러났다. 백현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불쌍하게 버려진 강아지가 아니었다. 서운은 그제야 그것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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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결혼이라니?”

.”

 

서운의 대답에 백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서운을 응시했다. 서운은 그저 덤덤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후회하지 않아?”

후회하지 않아.”

 

서운은 힘을 주어 답했다.

 

어차피 너는 지금 그 여자랑 결혼하는 게 가장 좋은 거야. 네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행복.”

 

서운의 말을 따라하면서 백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서운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물다 입을 열었다.

 

너는 후회하지 않겠어?”

내가 왜 후회를 해?”

그러게.”

 

서운의 대답에 백현은 더욱 어색하게 웃었다.

 

네가 왜 후회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너를 지켜준다고 했어. 너를 주워온 그 순간부터. 그리고 나는 너를 지킬 거야. 내가 너를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은 네가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거겠지. 그 여자는 너에게 정답이야.”

나는 그런 거 바라지 않아.”

그러면 나를 위해서 해.”

뭐라고?”

 

서운의 대답에 백현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서운은 그런 백현과 다르게 덤덤함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더 많은 것을 바라. 우리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봐야 더 높은 곳에는 오를 수 없는 거잖아. 안 그래?”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와의 결혼을 통해서 그것을 얻어낼 수도 없어. 그건 다른 누군가를 속이는 거니까.”

그 여자도 네가 필요한 거 아니야?”

필요?”

 

백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나은 역시 그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거였다. 그리고 거기에 어울리는 사람은 자신이었고. 다른 이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너는 그냥 그 필요가 되어주면 되는 거야. 그러면 그 여자는 너에게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을 테니까.”

필요라.”

 

백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서운의 말이 모두 옳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내가 정말로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

네가 아니라면?”

우린 가족이야.”

 

서운은 애써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 두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마. 우리 두 사람은 한집에서 같이 자라난 사이인데. 뭔가 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거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

 

서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혀로 이를 훑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몇 번 혀로 건드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래.”

 

서운의 미소. 백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운이 원하는 거라면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