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장. 초라함
“안 돼.”
“엄마.”
“안 된다고.”
우리의 말에 은화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식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였다.
“너랑 그 사람 연애하고 있다며? 그런데 돈을 빌린다는 거. 너는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니?”
“그러면 지금 어떻게 해요? 일단은 당장 돈이 필요하잖아. 엄마. 우리 잘못하다가는 길거리에 나앉아.”
“길에 앉아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은화는 너무나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돈 거래는 절대로 하는 거 아니야. 그건 부모 자식 간에도 하면 안 되는 거고 부부 간에도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런데 너랑 조실 언니 아들이랑 아무리 사귄다고 해도 그렇게 큰 돈은 안 되는 거지.”
“그럼 어떻게 해?”
“그래도 안 돼.”
은화의 단호한 모습에 우리는 속상했다. 그녀 역시 은화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엄마 우리 일단 살아야 하잖아. 우리가 살아야 하는데 무조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건데? 엄마는 뭐 뾰족한 수라도 있어요? 없잖아. 팀장님이 빌려준다고 하니까.”
“그래도 싫어.”
은화는 진저리를 쳤다. 우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은화의 행동이 이해가 가면서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엄마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너는 자존심도 없어?”
“자존심”
“그래. 자존심.”
자존심이 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단 살아야 한다는 거였다.
“엄마야 말로 자존심도 없어?”
“뭐라고?”
“아빠한테 이혼 소송하면 재산 분할 될 거예요. 아마 아빠는 소송까지 가려고 하지도 않을 거야. 각서라도 쓰려고 하겠지. 그러니까 바로 팀장님 돈을 드리면 되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집이 필요해. 이 집을 우리가 손에 넣고 있어야 아버지도 엄마한테 그런 거 못 해.”
“나는 싫어.”
은화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리고 발을 세게 구르고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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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괜찮습니까?”
“아니요.”
우리의 대답에 정식은 미간을 모았다. 늘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는 우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당황스러웠다.
“어머니께서 싫어하십니까?”
“네.”
우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되게 싫거든요. 팀장님한테 그런 부탁을 하는 게. 그런데 일단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부탁을 하는 건데 엄마는 무조건 싫다는 이야기만 해요. 나도 좋은 게 아닌데. 나도 너무 싫은데요.”
“서우리 씨.”
“나 초라해요.”
우리의 대답에 정식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서 우리의 머리를 만졌다.
“전혀 초라하지 않아요.”
“나 미쳤나봐. 그냥 집 넘길래요.”
“서우리 씨.”
“어차피 이거 엄마랑 나 둘이서 살기에는 너무 커요. 그리고 출근을 하는 것도 너무 멀고. 이 집이 아니더라도 이것저것 하다 보면 서울에 집 한 칸 마련할 수는 있겠지. 뭐 방법이 없겠어요.”
“싫습니다.”
정식의 대답에 우리는 입을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팀장님이 왜 싫어요?”
“지금은 서우리 씨 옆집이지만 그렇게 되면 서우리 씨랑 같이 출퇴근을 못 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이게 설마 데이트는 아니죠?”
“데이트죠.”
정식의 대답에 우리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우리의 반응에 정식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뭡니까?”
“이건 데이트가 아니에요.”
우리가 검지를 들고 대답하자 정식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내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의 손을 잡았다.
“이제 좀 웃었죠?”
“네?”
그제야 우리는 정식이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웠다.
“고마워요.”
“좋아해요.”
우리는 가볍게 정식의 가슴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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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망 너 돈은 얼마나 모았어?”
“돈?”
파스타를 입에 넣던 소망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무슨 돈?”
“아니. 어제 갑자기 방송을 보는데. 직장인들이 모은 돈 이야기가 나오더라고. 그래서 너는 얼마나 모았나 해서.”
“천.”
“천?”
“어. 천.”
소망의 말을 들으니 우리는 뭔가 안도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3천만 원을 모은 것은 게으른 것이 아니었다.
“너는 얼마를 모았는데?”
“2천.”
뭔가 솔직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소망은 이 정도로도 놀랐다.
“너 완전 부자네.”
“부자는 무슨. 너랑 나랑 월급도 같은데. 나야 뭐 돈을 쓸 데가 없잖아. 뭐. 그러니까 모은 거지.”
“너 재필이한테. 아 미안.”
“아니야.”
소망이 입을 가리고 놀란 표정을 짓자 우리는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문득문득 재필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대단하다. 돈을 그 만큼이나 모았다는 게. 나도 뭔가 더 열심히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뭐래.”
우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은 가슴에 답답한 것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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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전화를 끊고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다행히 지광은 우리가 집을 사려고 하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꽤나 급한 모양이었다. 주변 시세보다 낮은 거였는데 더 낮추다니. 3천만 원이 낮아진 금액. 2억 7천. 여전히 엄청난 금이었지만 일단 2억을 빌린다고 하면 그래도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뭐가 다행이야?”
“아니야.”
우리는 음료수를 마시러 온 소망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녀가 갖고 있는 것들을 다 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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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해약하시면 손해가 큰데. 대출을 하시는 건 어때요?”
“대출요?”
“그런 대출은 아니니 걱정은 하지 마식요.”
창구 직원은 우리의 보험금을 담보로 잡아서 대출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일단 적금은 모두 해지하고 보험금도 담보로 잡았다. 그랬더니 그녀가 생각을 했던 것보다 금액이 조금 더 컸다.
“그런데 갑자기 돈이 필요하신가 봐요?”
“아니요. 아니에요.”
“신용 대출도 가능하신데.”
“신용이요?”
“네.”
우리는 침을 삼켰다. 일단 정식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 것이 목적이었다. 지금 그녀의 손에 있는 것은 4천만 원. 일단 알아보는 게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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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원.”
신용대출이라고 해봐야 뭐 큰 금액은 아니었다. 여기에 카드론을 받고 하면 돈은 조금 더 생기겠지만 복잡했다.
“어떻게 하나.”
정식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옳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은화가 그렇게 나오는 것도 이해가 가는 그녀였다.
“괜히 안 좋게 보일 수도 있는데.”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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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은행에 다녀온 거예요?”
“네.”
운전대를 잡은 정식은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서우리 씨는 나를 별로 믿지 않는 거 같습니다.”
“제가 뭘요?”
“제가 다 알아서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서우리 씨는 그냥 제 말을 들으면 되는 겁니다. 괜히 그러지 말고.”
“그래도 미안하잖아요.”
우리의 대답에 정식은 미간을 모았다. 그리고 차를 갓길에 세우고 가만히 우리를 바라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우리 씨. 나는 내 인생에서 마지막 여자가 서우리 씨가 되었으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여자요?”
이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정식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뭔데요?”
“그러니까.”
정식은 심호흡을 하고 무슨 말을 하려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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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
“어.”
우리의 대답에 은화는 한숨을 토해냈다. 자신의 손에 그 정도 돈도 없다는 것이 너무 답답했다.
“내가 이렇게 무능력했니?”
“엄마가 왜요?”
“정말 창피해.”
은화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가 울기 시작하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화에게 가서 어깨를 두드렸다.
“엄마 왜 그래?”
“이 나이를 먹도록 내가 가진 돈이 하나 없다는 게 너무 서럽고 너한테 미안해서 그래. 딸한테 이렇게 폐만 기치는 엄마가 어디에 있어?”
“폐라니.”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아니면 나 지금처럼 자랄 수 없었어. 엄마가 있었으니까 엄마 딸이 지금 이 만큼이나 큰 거지. 그러니까 엄마 이상한 생각하지 마요. 엄마처럼 잘 하는 엄마도 없어. 엄마는 완벽해.”
“정말?”
“정말로요.”
우리의 대답에 은화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런 은화의 등을 가만히 두드리며 한숨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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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아닙니다.”
정식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바로 우리의 계좌로 돈을 보냈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저 한심하죠?”
“왜요?”
“이런 거 하나 혼자서 수습 못 하고요.”
“그런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정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금 오히려 기분이 좋습니다.”
“네?”
“서우리 씨가 나에게 그런 것을 의논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제 조금은 더 나를 믿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해준다는 이야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뭐.”
우리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대답하자 정식은 아랫입술을 물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우리에게 얼굴을 불쑥 들이댔다. 우리는 그런 정식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다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정식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그런 우리에게 뜨겁게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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