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장. 어른이 된다는 것
“저도 제가 참 바보 같아요.”
“아닙니다.”
우리의 말에 정식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혀를 살짝 내밀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망할 새끼인 것도 모르고. 내 시간을 그렇게나 많이 썼다는 게. 너무 억울하잖아요. 내 청춘인데.”
“대신 저처럼 멋진 남자를 만난 거 아닙니까?”
“뭐라고요?”
“좋아해요.”
정식은 우리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짧게 한숨을 토해내고 아랫입술을 문 채 고개를 들어서 정식을 바라보고 혀를 살짝 내밀었다.
“나도 좋아해요. 당신을.”
정식은 허리를 숙이고 두 사람은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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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망 씨. 기획안 수정한 거 아직 안 됐습니까?”
“그거. 다 했었는데.”
소망은 열심히 책상을 뒤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필요한 서류가 보이지 않았다. 정식은 한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오후 회의에 가져가야 하는 거 알죠?”
“네. 알고 있습니다.”
“준비 좀 해줘요.”
“네.”
소망은 아랫입술을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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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가서 밥 먹어.”
“네가 못 가는데 내가 어떻게 가?”
소망의 말에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소망은 그런 우리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너 왜 그러냐?”
“뭐가?”
“내가 너한테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데. 너 이렇게 도와주면 나만 완전 나쁜 년인 거 같잖아.”
“너 나쁜 년 맞아.”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서도 바쁘게 움직이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너는 일단 그 삭제 파일부터 복구할 생각이나 해. 야. 너는 기획 수정안을 그걸 날리는 사람이 어딨냐? 그걸 덮어쓰면 어떻게 해? 다른 이름으로 저장을 해야지. 하여간 염소망. 은근히 덤벙대.”
“그러게. 미치겠네.”
소망은 머리를 마구 헝클며 모니터를 노려봤다. 하지만 모니터를 노려본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
“다시 해야 하나 봐.”
“너 그거 할 수 있어?”
“아니. 한 번 하기는 한 건데.”
“일단 해.”
“어?”
“일단 해야 할 거 아니야.”
소망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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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하게 세이프입니다.”
“네.”
정식은 소망을 보고 한 번 웃어 보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의 어깨를 한 번 쥔 후 사무실을 나섰다. 소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서우리.”
“너 나중에 이 은혜 갚아라.”
“오케이.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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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우리 씨 그렇게 자꾸 염 대리 도와주면 안 됩니다.”
“소망이도 저 많이 도와줘요.”
우리의 대답에 정식은 입을 내밀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모습 본 적 없는 걸요?”
“팀장님만 못 보신 거예요.”
우리의 대답에 정식은 웃음을 터드렸다. 우리는 그런 정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제 걱정하는 거 맞죠?”
“당연하죠.”
정식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뭐야 그게.”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짧게 심호흡을 한 후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 정말 일 잘 해요?”
“당연하죠.”
정식은 이번에도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신호에 걸리자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봤다.
“왜 그런 걸 묻습니까?”
“아니 그냥요.”
우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우리의 반응에 정식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학생이 좋았어요.”
우리는 혀를 내밀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는 뭔가를 하면 딱 너 잘 한다. 못 한다. 뭐 못 한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성적이라는 게 나오니까.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서는 내가 정말 잘 하는 건가. 이게 바른 건가. 그런 고민이 들어요. 일 같은 것도 그렇죠. 누가 잘해준다고 하더라도 그건 뭔가 눈에 보이는 지표가 없으니까요.”
“연봉.”
뜬금없는 정식의 말에 잠시 멍하던 우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볍게 그를 때렸다.
“그게 뭐예요?”
“그게 직장인들의 지표 아닙니까?”
정식은 입을 내밀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 대리. 일을 못 했으면 아무리 제가 좋아하는 여자라고 하더라도 위에 올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 말 믿어도 되는 거죠.”
“당연하죠. 나를 못 믿어요?”
“아니요.”
우리는 혀를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정식이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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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내놓으라고?”
“그래.”
은화의 말에 우리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은화가 내뱉은 말은 너무 힘든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여자가 생겼단다.”
은화는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여자랑 살 집이 필요하대.”
“그게 무슨?”
“내놨단다.”
“엄마.”
우리는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니까 이혼을 하고 이 집은 은화가 받은 거였다.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이거 합의 이혼을 한 이유가 이 집 하나잖아. 그런데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 말이 안 되잖아요.”
“서류가 없어.”
“뭐라고요?”
“그냥 헤어지자고 한 거니까. 집은 내가 갖는다고 하고 그렇게 헤어진 거니까. 네 아버지가 그렇게 당당한 것이 다 이유가 있었던 거지. 아무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너무 힘들어.”
“말도 안 돼.”
머리가 왕왕 울렸다. 그러니까 아버지라는 인간이 이런 짓까지 하면서 그들을 괴롭히는 거였다.
“아버지 내가 연락해 볼게.”
“전화번호도 바꿨어.”
“뭐라고요?”
“나도 부동산에서 연락이 와서 알았어. 부동산 언니가 하는 말이 나보고 집을 내놨느냐는 거야. 그것도 그렇게 헐값에. 그런 적이 없다고 하니까 언니가 너무 놀라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이 상황에서도 뭐 하나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럼 우리가 사요.”
“우리가 돈이 어디에 있어?”
“하지만.”
돈이 없었다. 은화는 이제야 처음으로 경제생활을 하는 것이었고 자신도 집을 살 돈은 없었다. 헐값이라고 하더라도 이제 겨우 6년에 접어드는 직장인이 그런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이게 뭐야. 도대체.”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너무 속상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언제까지 결정이 나는 건데?”
“일단 집이 나가면 바로지.”
“알았어요. 알았어.”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뭐라도 해봐야 했다. 일단 뭐라도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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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억이요?”
“그래 너무 헐값이라 놀랐다니까.”
우리에게 커피를 건네주는 부동산 아주머니의 말에 우리는 당황스러웠다. 그게 헐값이라니 말도 안 되는 거였다.
“이 근처 집들 다 4억, 5억씩은 해. 그리고 아가씨 집은 단독이잖아. 요즘 다들 다세대 만들고 그러는데 거기도 건물 올리면 돈이 될 거 아니야. 그런데 그런 집을 그렇게 팔아 버린다니까.”
“안 팔아요.”
“응?”
“그러니까 그거 제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제가 돈은 없는데요. 그러니까 모아놓은 돈은 없는데.”
우리의 말에 부동산 아주머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헛기침을 했다.
“아가씨도 집값의 70%까지 대출이 되는 건 알지?”
“대출이요?”
“그래요. 일단 나도 자기 엄마한테 말을 했어. 아직 4주 안 되었으니까. 이제라도 합의 이혼 파기하고 소송 가라고. 나도 애 아빠랑 그렇게 했으니까. 그러면 일단 돈은 나중에라도 충당이 될 거야.”
“네.”
그런 수도 있었다. 부동산 아주머니는 심호흡을 하고 우리를 바라봤다.
“70%까지 빌려요. 하지만 그것도 2억까지만 해줘. 나머지는 가지고 있어야 해. 1억. 그거 가지고 있어? 내가 보기에 자기는 없어.”
“네. 없어요.”
우리가 순순히 대답하자 부동산 아주머니는 더욱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자기 아버지한테 거짓말을 해서 집값을 조금이라도 내려 볼게. 그러면 자기가 부담해야 하는 돈도 줄어 들 거야. 그래서 얼마나 가지고 있어?”
“4천요.”
자신이 생각해도 초라했다. 겨우 4천. 말도 안 되는 돈이었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숙였다.
“일단 내일까지 알려드릴게요.”
“그래요. 나도 더 내릴 수 있나 물어볼게. 저쪽이 돈이 급한 거 같으니까 아마 더 내리려고 할 거야.”
“네.”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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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해.”
1억. 어릴 적에는 누구나 갖고 있는 돈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른들의 세상은 자신과 달랐다.
“미치겠다.”
“어디 다녀와요?”
“팀장님.”
정식이었다. 그리고 정식을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버렸다.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울음이 터져버렸다.
“무슨 일이에요?”
정식은 곧바로 우리에게 달려와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절대로 그에게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초라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을 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자신은 정식에게 안 좋은 모습을 너무 많이 보였었다. 실망을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여기 밖에 없었다.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괜찮아요.”
정식의 말에 우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 괜찮으니 말해요.”
“팀장님.”
우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 겨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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