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장. 힘이 된다는 것
“둘이 뭐 다른 건 없어?”
“다른 거라니?”
“그런 거.”
은화는 기대가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젓가락을 물고 살짝 미간을 모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나랑 정식 씨랑 그런 거 아니야.”
“뭐? 정식 씨.”
은화가 밝은 표정을 짓자 우리는 아차 싶었다. 은화는 혼자서 머릿속에서 상상을 펼쳐 나갈 거였다.
“엄마 그런 거 아니에요. 팀장님이 팀장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도 뭐라고 해서 이런 말이 나온 거니까. 우리 두 사람 관계 뭐 달라진 거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말아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제 조실 언니 아들도 나이가 있고. 우리 너한테 결혼하자는 이야기 안 하니?”
“내가 싫어.”
“왜 싫어?”
은화의 놀란 표정에 우리는 대충 입에 밥을 넣고 우물거렸다. 하지만 은화는 심각한 모양이었다.
“너 자꾸 이럴래?”
“엄마. 이건 내 일이야. 엄마가 나 믿는다면서? 아니 딸을 믿는다고 하더니 또 이런 거 가지고 스트레스 주면 안 되는 거죠. 안 그래요? 엄마. 엄마 딸 이제 어린 애 아니니까 그냥 좀 봐주세요.”
“네가 그렇게 바고처럼 행동하니 그렇지.”
은화는 국을 대충 뜨며 못 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우리는 한숨을 토해내고 대충 밥을 입에 밀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너 조실 언니 아들 앞에서는 그러지 마.”
“안 그래요.”
우리는 손을 휘저으며 욕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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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 남자 뭐야?
우리와 출근을 하는 도중에서도 손에 서류를 놓지 않는 모습을 보니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팀장님.”
“네?”
정식은 우리에게 시선도 두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정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볼을 잔득 부풀린 채로 입을 꾹 다물고 운전했지만 정식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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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한 거 아니야?”
“남자는 원래 다 그래.”
“다 그렇다고?”
“그래.”
소망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내 애인은 나를 탐하지를 않는다. 그거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 내가 뭐 모르는 여자도 아니고. 알 거 다 아는데. 그 어린 게 내 눈 앞에서 막 어른거리는데 뭘 할 수가 없어요.”
“네가 먼저 하지. 왜?”
“미쳤냐?”
우리의 제안에 소망은 단호히 손가락을 흔들었다.
“아직은 조신한 여자친구 컨셉을 잡고 있단 말이야. 누나라고 하더라도 때로는 지켜주고 싶은 그런 여자? 그런데 뭐 어떻게 덤비냐? 아직 그 정도로 굶지는 않았어. 더 참을 수 있어. 그 어린 건 그 순진한 건 분명히 더 잘 할 거야.”
“뭐래?”
우리는 웃음을 참으며 음료수를 들이켰다. 그러다 한숨을 토해내고 창밖을 바라봤다. 소망은 미간을 모았다.
“왜?”
“팀장님.”
“팀장님이 왜?”
“나한테 너무 익숙해진 거 같아.”
“어?”
“말했지? 우리 옆집이라고.”
“응.”
소망은 포크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침에 내가 운전을 하는데 너무할 정도로 서류만 복 ㅗ오는 거 있지? 나는 보지도 않고 말이야.”
“그게 말이 돼?”
소망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흥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음료수를 한 모금 더 마시고 한숨을 토해냈다.
“그래 팀장님이 일이 많은 건 알겠어.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거잖아. 조금은 나를 신경을 써야 하는 거지.”
“그러니까.”
“저녁에 같이 들어가게 되면 내가 완전 열심히 떠든단 말이야. 혹시라도 내가 집중하지 않으면 화가 날까봐.”
“운전하는 입장에서 옆 사람이 잠을 잔다거나 하면 솔직히 좀 화가 나기는 하지. 내가 무슨 기사가 된 건 아닌가 하고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내가 무슨 기사가 된 거 같아. 뭐 내가 편하게 느껴진다는 게 좋은 거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좀 그렇다.”
“그렇겠네.”
소망은 파스타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시간을 확인한 후 남은 음료수를 모두 마셨다.
“이거 말해야 할까?”
“일단 더 지켜봐. 괜히 그러다 싸움이 되면 어떻게 하려고? 남자는 단순해서 그거 아마 모를 거다.”
“그렇겠지?”
우리는 입을 쭉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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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최원우?”
“조정식. 오랜만이다.”
우리는 고개를 들어 정식을 바라봤다. 정식이 누군가를 만나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키가 꽤나 훤칠한 사람이었다.
“서우리 씨. 아 서 대리 내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동창이요?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원우는 시원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디 가는 길이야?”
“퇴근.”
“퇴근?”
정식의 대답에 원우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아차 싶었다. 퇴근을 부하 직원하고 같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는 그러니까.”
아직 정식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어색한 인사를 하려는 순간 정식은 우리의 손을 꼭 잡았다.
“내 애인이야.”
“애인?”
“팀장님.”
우리는 놀라서 정식을 바라봤다. 정식은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었다. 우리는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니까.”
“서우리 씨 그러지 마요. 이 녀석도 자기 회사 여직원을 유혹한 놈이라고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우리는 미소를 지은 채 가볍게 정식의 옆구리를 찔렀다.
“저는 먼저 가볼게요. 두 분 이야기 하세요.”
“아닙니다. 저는 지금 일이 있어서요. 정식아. 다음에 연락할게. 여기 내 명함.”
“오케이. 나도 여기.”
정식과 원우는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멀어졌다. 우리는 그런 정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입을 내밀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네?”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누가요?”
우리의 말에 정식은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에이.”
정식은 우리의 앞에 선 채로 입을 내밀었다.
“서우리 씨. 그렇게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면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도대체 무슨 이야기에요?”
“정말 몰라요?”
“정말 몰라요.”
“아침에요.”
“아침요?”
우리의 말에 정식은 미간을 모았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나는 아무 일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좀 말을 해줄래요?”
우리는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어차피 이야기가 나온 거 하는 편이 더 나을 게 분명했다.
“아침에 제가 운전을 할 때 팀장님 너무 일만 하잖아요. 내가 뭐 물어봐도 대답도 하지 않고요.”
“그건 서우리 씨가 양해를 해줬으면 합니다.”
정식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침 시간에까지 일을 하지 않으면 서우리 씨랑 같이 퇴근을 할 수는 없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나랑 같이 퇴근을 하자고 서우리 씨에게 일을 폭탄처럼 주는 것도 안 되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그래도 물어보면 대답은 좀 잘 해주면 안 되나요?”
“알겠습니다.”
우리의 투정에 정식은 미소를 참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의 우리의 투정이 괜히 반가운 그였다.
“서우리 씨가 이러는 건 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죠?”
“당연하죠.”
우리는 정식에게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나도 좋아합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정식에게 몸을 기댔다. 이제 나란히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는 사이라는 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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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재미있는 거 없나?”
우리는 하품을 하며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다. 그러다가 뉴스 채널에서 손이 멈췄다.
“비행기 사고?”
괜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도 아닌데 괜히 이상한 기분. 우리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으로 갔다.
“팀장님.”
정식의 얼굴이 보였다. 당황한 얼굴. 맞았다. 우리는 곧바로 창문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정식에게 다가갔다. 정식의 얼굴은 붉었다.
“팀장님.”
“그 녀석이 탄 비행기가 맞답니다.”
정식이 말한 유일한 친구.
“그러니까. 그 녀석이 갑자기 나를 찾아온 게. 그 녀석도 뭔가를 알고 있었더 겁니다. 뭔가를. 정말 뭔가를 알고 있었던 겁니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우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저었다. 정식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정식이 우는 건데 자신의 마음이 불편했다. 우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창틀을 잡고 올라갔다. 꽤 높아 보이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팀장님.”
우리는 가만히 정식의 머리를 안았다. 정식이 아이처럼 울었다.
“더 좋게 이야기를 해줘도 되는 거였는데. 그게 마지막이라면 더 잘 말해도 되는 거였는데요.”
“아니요.”
우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 아무런 일도 아닐 거였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믿어야 했다.
“저도 뉴스 보고 왔어요. 그냥 실종이래요. 실종.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세요. 살아있을 수도 있어요.”
“그 정도 사고는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아니요.”
우리는 힘을 주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정식의 얼굴을 보며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팀장님 강한 사람이잖아요. 팀장님이라도 믿어줘야죠. 친구 분이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어야죠.”
“서우리 씨.”
“그게 오직 그 친구 분을 위한 답이 될 거예요. 팀장님까지 믿지 않으면 정말 아무도 믿지 않는 거잖아요. 아무도 믿지 않는데 뭐가 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믿어요. 그냥 실종이잖아요. 실종. 실종이라는 거 죽었다는 거 아니에요. 언젠가 돌아올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거라고요.”
“그렇겠죠?”
정식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는 깊은 숨을 내쉬면서 그런 정식의 머리를 꼭 안고 가만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팀장님 믿어요. 나도 믿을게요.”
“돌아오겠죠? 돌아오겠죠?”
“네. 돌아올 거예요.”
정식은 우리의 품에서 한참이나 서럽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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