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나에게 자격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
나은의 목소리는 나른했다. 태화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나은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게 화가 났다.
“너는 왜 그렇게 여유롭지?”
“뭐가?”
“네가 생각한 상황과 다르잖아.”
태화의 질문에 나은의 표정에 묘한 균열이 갔다.
“네가 생각한 것처럼 백현은 너를 보지 않고 있어. 그런데 도대체 왜 너는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거야? 나는 지금 회사를 잃을까봐. 그게 너무 무서워. 그런데 너는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백현은 절대로 나를 떠날 수 없으니까.”
나은의 밝은 미소. 태화는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한 태화와 다르게 나은은 여전히 여유롭게 보였다.
“내 말이 틀려?”
“틀려.”
“아니.”
태화의 대답에 나은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오빠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 거구나. 하긴 그러니까 그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것을 잃은 거겠지.”
나은의 솔직한 말에 태화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은은 이리저리 목을 풀며 가볍게 한숨을 토해냈다.
“백현 그 사람을 나를 떠나지 못해.”
“다행이야.”
“뭐가 다행이야?”
“내가 너의 오빠라는 거.”
뼈가 있는 태화의 말에 나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튼 나는 한서운 못 내줘.”
“아버지 명령이야.”
태화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 나은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결국 유 회장은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서라도 그녀의 뜻을 어기겠다는 이야기였다. 나은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나 아버지도 안 통해.”
“유나은.”
“알잖아?”
나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태화는 그런 나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의 모습을 보이는 그녀였다.
“아버지는 그래도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야. 지금 그런 분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게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
“유나은.”
“그대로야.”
나은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
“못 가.”
“돌아가.”
나은의 단호함에 태화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이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답답했다. 나은은 태화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오빠는 가만히 있는 게 나아.”
“나라고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가만이 있어.”
나은은 힘을 주어 말했다.
“그게 오빠를 그래도 살리는 이유니까.”
태화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태화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하지 않고 그녀의 방을 나왔다.
“젠장.”
나은의 방을 나오자 마주친 것은 백현이었다.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유 사장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 사장. 태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백현만이 오직 나은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조심하는 게 좋아.”
태화의 말에 백현은 미간을 모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야.”
태화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뭐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 충고를 별로 들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일단은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둬. 유나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니까. 당신의 목이라도 조를 수 있는 사람이야.”
백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나은의 방으로 들어갔다. 태화는 한숨을 토해냈다.
“젠장.”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
“아니 이게 도대체 누구야?”
나은이 자신을 보고 밝은 표정을 짓자 백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자는 거야?”
“뭐가?”
“왜 자꾸 내 사람들에게 손을 대는 거지? 도대체 강 기사에게 무슨 말을 지껄이고 다니는 거야.”
“아.”
백현이 왜 화를 내는 것인지 알게 된 나은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을 살짝 내밀었다.
“정말 친구구나.”
“뭐라고?”
“아니. 그 어린 꼬맹이가 자기의 친구라고 말을 할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을 했거든. 그런데 내가 그 녀석을 건드리니까 당신이 여기에 오니. 그 녀석 당신 친구가 맞는 거네.”
백현은 침을 삼켰다. 잘못했다가는 영재가 정말 나은에게 어떤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바라는 거야?”
“당신.”
“미친.”
“당신을 바라.”
나은은 싱긋 웃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백현은 한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흔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절대로 그럴 일이 없어.”
“위장 이혼. 다 밝혀?”
“밝혀.”
나은의 얼굴에 묘한 균열이 갔다. 백현은 침을 꿀꺽 삼킨 채로 물끄러미 나은의 눈을 바라봤다.
“애초에 당신을 받아주면 안 되는 거였어. 당신이 나보다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으니까. 내가 구해줘야 하는 가련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당신은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자격.”
나은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원망스러운 눈으로 백현을 응시했다.
“당신만 중요하니?”
“그래.”
백현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은은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한서운은 당신 옆에 못 돌려줘.”
“유나은.”
“그래고 강영재도 내가 가지고 올 거야.”
백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은은 그런 백현을 보면서 더욱 유쾌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 이제 화가 나니?”
“그래.”
“내가 그 정도로 당신을 갖고 싶어. 당신의 옆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내가 가지고 오면. 결국 자기도 나를 봐주지 않겠니? 백현. 당신이 이제 나에게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야.”
“그런 일은 없어.”
백현이 힘을 주어 대답하자 나은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백현은 그런 나은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불쌍해.”
“누가 누구한테 불쌍하다는 거야?”
“내가 너에게.”
백현은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제발 정신 차려.”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야.”
나은은 이 상황에서도 여유로운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백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는 이렇게 말로만 하지 않을 거야.”
“다음에도 당신은 이럴 거야.”
나은의 확신에 찬 어조.
“당신도 이제 내가 익숙해진 거니까.”
나은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나은을 노려본 후 밖으로 나왔다.
“하여간 웃기다니까.”
나은은 밝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가에 서 밖을 내다보았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백현은 내 손에서 벗어나지 못해.”
나은은 그렇게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미소를 지은 채 있었다.
==================
“이야기 좀 해.”
“아니.”
퇴근하려던 서운은 백현을 마주하고 고개를 저었다.
“할 이야기 없습니다.”
“한서운.”
백현이 다급히 불렀지만 서운은 그대로 그를 두고 달아나듯 멀어졌다. 백현은 한숨을 토해냈다.
“젠장.”
“괜찮으십니까?”
“그래.”
영재의 물음에 백현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네?”
백현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영재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백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강 기사를 친구라고 말을 한 것 때문에 유나은이 당신을 괴롭히는 거잖아. 알고 있어.”
“아닙니다.”
영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저 유 사장님도 불쌍한 사람 같았습니다.”
“불쌍?”
백현의 목소리가 묘하게 변했다. 영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시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위로를 해드리고 싶은 분입니다.”
“그렇지.”
백현도 순순히 동의했다.
“물론 그래서 동정을 했다가는 곧바로 강 기사를 잡아 삼킬 여자라는 게 다르지만 말이야. 무서운 사람이지.”
“그렇습니까?”
“그래.”
반쯤 장난으로 물은 질문에 백현이 진지하게 대답하자 영재는 침을 삼켰다. 백현은 한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흔들었다.
“늘 가던 바로 가지.”
“네.”
==================
“아니 이게 누구야.”
서운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백현을 피해서 이제 겨우 나왔다고 생각을 했는데 밖으로 나오니 태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얘기 좀 하지.”
“드릴 말씀 없습니다.”
“그럼 들어.”
서운은 침을 꿀꺽 삼켰다. 태화의 차가운 눈빛.
“아버지 비서잖아.”
“근무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할 이유가 없다?”
“네.”
서운의 간단한 대답. 태화는 혀로 아랫입술을 적시다가 손을 비비고 고개를 끄덕이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가.”
“그럼.”
서운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 비켜났다. 태화의 눈이 순간 빛났다.
“그런데 백현을 그대로 둘 건가?”
서운의 발이 멈췄다.
“사표. 수리 되면?”
“무슨 말씀이 하시고 싶으신 거죠?”
“그러니 들으라고.”
서운이 미끼를 물었다. 태화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서운도 아차 싶었지만 이미 방법은 없었다.
'☆ 소설 창고 > 지독한 연애[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25장] (0) | 2016.11.07 |
---|---|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24장] (0) | 2016.11.04 |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22장] (0) | 2016.11.02 |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21장] (0) | 2016.11.01 |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20장] (0) | 2016.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