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
“미안해.”
“아닙니다.”
백현의 사과에 영재는 고개를 저었다. 백현은 허탈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도 내가 멍청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 다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 멍청한 새끼가 할 수 있는 게 너무나도 많다는 거지.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고 지켜보는 거고 말이야.”
“멍청하지 않으십니다.”
“고맙군.”
영재의 칭찬에 백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 상황에서 술을 한 잔 기울일 이가 하나도 없었다.
“오래 전에 헤어진 친구에게 연락을 해도 될까?”
“네.”
“쉽군.”
백현의 쓸쓸한 목소리에 영재는 그를 가만히 살폈다. 백현은 한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안하군.”
“아닙니다.”
“내가 원래 멍청해.”
백현은 힘없이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왜 그 동안 내 사람을 만들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나는 한서운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을 했어.”
“그런데 왜 잡지 않으셨습니까?”
“그러게.”
백현은 손끝 거스르미를 뜯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하게도 내가 혼자서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행복하게 해주면 한서운도 나를 봐줄 거라고 생각을 했으니까.”
“봐달라고 하시죠.”
“아니.”
백현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고 다시 술을 따라 들이켰다. 영재의 눈에 걱정이 살짝 어렸지만 백현은 눈치 채지 못했다.
“한서운은 이미 알고 있어. 내가 자신의 곁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나는 가족이라는 것을.”
“가족이요?”
“나를 길러젔으니까.”
영재의 의문이 가득 담긴 표정에 백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술을 따르자 영재가 그 잔을 가져갔다.
“뭐 하는 거지?”
“많이 하셨습니다.”
“건방지군.”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백현의 목소리에 묘한 안도의 목소리가 묻어났다. 백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였다.
“도대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도대체 왜 유 사장님은 아니신 겁니까?”
“내 숨통을 조이니까.”
백현의 말에 영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그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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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
“기다렸니?”
“당연하지.”
동우가 다가오자 서운은 그 자리에 멈췄다. 이런 서운의 반응에 동우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한서운.”
“네가 있으면 안 돼.”
서운의 단호한 대답에 동우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서운은 허탈한 미소를 지은 채로 아랫입술을 물었다.
“나도 내가 되게 한심한 건 알고 있어. 내가 되게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러하고 해서 내가 그런 짓을 그만 해야 한다는 건 아니잖아. 나는 계속해서 멍청한 짓을 할 거야.”
“도대체 왜?”
동우의 물음에 서운은 숨을 참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는 질문에 대해서 할 말은 하나도 없었다.
“당신의 그런 행동이 당신을 괴롭히는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건가? 그로 인해서 당신이 괴로울 거라는 것은 모르는 건가?”
동우의 살짝 낯선 어조. 서운은 어색하게 웃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동우는 그런 그녀를 따라가지 않았다.
“한서운.”
동우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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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
“아. 한 비서님.”
서운은 재빨리 백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영재와 함께 백현을 부축했다.
“도대체 무슨 술을?”
“조금 무리하셨습니다.”
영재의 입에서도 술냄새가 났다. 서운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영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운전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백 사장님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래요.”
서운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이제 제가 모시죠.”
“같이 가시죠. 혼자서 모시기에는 버거우실 겁니다.”
“아니요.”
서운의 단호한 목소리에 영재는 살짝 멈칫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서운에게 백현을 건넸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서운은 혼자서 버겁게 백현을 데리고 사라졌다. 영재는 한숨을 토해내고 아랫입술을 물다가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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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 나에게 온 이유가 뭐지?”
“하겠습니다.”
나은은 물끄러미 영재를 바라봤다. 그리고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내밀고 고개를 갸웃했다.
“뭘 한다는 거지?”
“가짜 애인요.”
“가짜 애인.”
나은은 천장을 보고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그리고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영재의 가슴을 검지로 찔렀다.
“나는 가짜라고 한 적이 없는데?”
“네? 그게 무슨?”
“애인 해라.”
영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은은 한숨을 토해내고 입을 쭉 내밀었다. 그리고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 아니니?”
“아닙니다.”
정중한 자세를 취하고 뒤로 물러서는 영재를 보며 나은은 미간을 모았다. 이런 그의 태도가 기분이 나빴다.
“뭐 하는 거지?”
“저는 유 사장님이 좋아서 여기에 온 게 아닙니다.”
“뭐라고?”
영재의 말에 나은은 뭔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영재는 심호흡을 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저 백 사장님을 위해서 여기에 온 겁니다.”
“백현?”
“네.”
“그 사람이 왜?”
나은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그리고 나은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영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너 뭐니?”
“친구입니다.”
“친구.”
나은은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리저리 목을 풀더니 어색하게 웃다가 그대로 손을 들어서 영재의 뺨을 때렸다. 커다란 소리. 그리고 곧바로 붉어진 얼굴. 나은은 어깨를 들썩였다.
“너 뭐니?”
“강영재입니다.”
“도대체 네가 뭐니?”
나은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네가 뭔데 나를 이렇게 자존심을 상하게 해? 도대체 네가 뭔데? 도대체 네가 뭐라서 내 자존심을 이렇게 뭉개는 건데? 도대체 왜!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러는 건데? 도대체 네가 뭔데? 뭐라서 이러는 건데?”
“강영재입니다.”
영재의 덤덤한 대답. 나은은 다시 손을 들었다. 영재는 이번에도 그녀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더 붉어진 뺨.
“왜 나를 비참하게 하니?”
“비참하신 분이니까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대답. 나은은 아랫입술을 곡 물었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영재를 바라보는 원망스러운 나은의 눈에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나은은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네가 뭔데? 너 같은 게 도대체 감히 나랑 말이나 섞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니?”
“울지 마십시오.”
영재는 그대로 한 발 다가와서 나은을 안았다. 나은은 그를 밀어내려고 모질게도 때렸지만 영재는 그대로 버텼다.
“유 사장님이 울면 백 사장님이 힘들어 하십니다.”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네.”
너무나도 간단한 대답.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아픔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니까요. 백 사장님은 진심으로 유 사장님을 아끼고 계십니다. 하지만 유 사장님을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그건 아시지 않습니까?”
“알지.”
나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랫입술을 섹 ㅔ물었따. 그리고 영재를 뒤로 밀어낸 후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래서 재밌니?”
“아닙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있니?”
“가여우십니다.”
나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가엽다. 자신이 가엽다는 이 아이의 말에 문득 자신이 가엽게 느껴지는 그녀였다.
“네가 도대체 뭘 가지고 있다고 나를 동정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니? 너는 나를 동정할 자격이 없어.”
“그러게 말입니다.”
영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나은을 놀리는 것 같은. 그러나 걱정이 듬뿍 단긴 목소리.
“그러시지 마십시오.”
“뭘 하지 말라는 거지?”
“백 사장님을 기다리는 척 괴롭히는 거 말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괴롭히니?”
“네.”
영재는 단 한 번도 나은의 질문에 대해서 대충 대답하거나 애둘러서 넘기는 법이 없었다. 그는 늘 진지했다.
“너 참 대단하구나.”
“고맙습니다.”
“그래서 애인을 한다?”
“네.”
“백현을 위해서?”
“네. 그렇습니다.”
나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자신에게는 이런 사람이 없는 걸까? 그저 그녀를 위해서 나설 수 있는 사람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한 걸까? 도대체 왜 모든 사람이 다 백현의 편을 드는 것일까?
“내가 뭘 하기를 바라니?”
“저를 괴롭히세요.”
“견딜 수 있겠니?”
“네.”
나은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영재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대, 다섯 대, 여섯 대, 일곱 대. 나은은 어깨를 거칠게 들썩였다. 영재는 붉어진 볼을 만지지도 않은 채 그런 나은을 바라봤다.
“이제 좀 괜찮습니까?”
“안 괜찮아.”
나은은 이를 악 물고 대답했다. 그리고 한숨을 토해내고 다시 영재의 가슴을 때리기 시작했다.
“개자식. 개새끼. 망할 자식. 네가 뭔데 나랑 백현 사이를 결정해? 네가 감히 뭐라고 우리 둘 사이를 결정해!”
“죄송합니다.”
영재는 가만히 나은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나은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영재의 가슴을 때리다가 점점 힘이 풀렸다.
“백현은 왜 나를 사랑하지 않니?”
영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독하고 사나운 여자가 안쓰럽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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