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장
“한 비서가 뭐라고 하지?”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래.”
그래도 서운이 뭔가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재를 비서로 세운 것은 큰 문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걱정이 되시거나 그러면 직접 한 비서님께 여줘보시면 되는 게 아닙니까? 그게 더 쉬워 보이는데.”
“아니.”
영재의 충고에 백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문제였다.
“이건 나와 한서운 사이의 문제니까.”
“죄송합니다.”
“아니야.”
영재가 곧바로 사과하자 백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영재가 사과를 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나도 언젠가 끝을 내야 할 텐데.”
“끝이요?”
“응. 끝.”
백현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한숨을 토해냈다.
“그 지독한 악연의 끝. 지독한 연애. 그딴 거 하고 싶은데 말이야. 지독한 연애는커녕 지독한 인연이라니. 그런데 어떤 미친 새끼는 그 연애라는 것을 하고 있다고 하고. 정말 내가 미치겠군.”
“지독한 연애요?”
“아니야.”
영재가 다시금 질문하자 백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한 후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지.”
“하지만 회의가.”
“오늘 오후 일정은 모두 캔슬.”
“네?”
영재가 놀란 표정을 짓자 백현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면서 가볍게 그런 영재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차피 내가 있건 말건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거야. 그저 자신들 마음대로 뭔가를 조종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을 테니까. 내가 없는 게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을 테지.”
“그렇습니까?”
“그렇지. 뭐 먹으러 갈까? 좀 멀리 가도 될 거 같은데.”
백현은 먼저 외투를 집으며 입을 내밀었다. 그리고 멍하니 있는 영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강 비서는 같이 가지 않나?”
“하지만 저는.”
“사장이 가는데 비서가 안 가나?”
“알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영재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은 잘 보이지 않는 미소까지 보이며 걸음을 옮겼다.
===================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 같아?”
“저에게 오실 거니까요.”
서운의 대답에 나은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나은이 한 발 앞으로 나서자 서운은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서 이러시면 안 될 건데요.”
“뭐라고?”
“여기 로비입니다.”
그제야 나은의 눈에도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여기에서 사고를 쳤다가는 바로 뉴스가 될 거였다.
“건방져.”
“저는 원래 유 사장님께 건방진 사람이죠.”
서운의 여유로운 표정. 나은은 침을 삼켰다. 서운은 그녀가 절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뭘 하기 바라지?”
“저는 바라는 게 없습니다. 다만 유 사장님은 저에게 바라시는 게 아주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운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주위 사람들이 많아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자 나은은 오히려 점점 더 초조해지고, 그런 기색을 전혀 숨기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다 서운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너는 도대체 왜 그렇게 나에 대해서 잘 아니?”
“그러게요. 저도 잘 아는 그 모습을. 도대체 왜 유 사장님께서는 스스로 알지 못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뭐라고?”
나은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하지만 나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저를 그리 경계하시고 밀어내려고 하시는 거겠죠.”
“너는 뭘 가지고 있기라도 하니?”
“백현의 마음.”
서운의 대답에 나은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서운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뭐라고?”
“그래야 이 회사를 가지죠.”
서운의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에 나은은 손을 들었다. 하지만 서운은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너는 이 회사를 가질 수 없어.”
“하지만 이미 백현은 가졌죠.”
서운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주회사. 결국 그녀가 무엇을 하더라도 일단은 백현 손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가지고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결국 이 회사를 손에 쥐고 있는 건 우리 아버지야. 아버지가 아니라면 백현. 그 사람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 사실은 너도 이미 잘 알고 있을 텐데.”
“유 회장님 곁에는 제가 있죠.”
나은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서운은 그녀를 뒤로 밀어냈다. 서운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런 간단한 것도 모른 채로 나를 백현에게서 가지고 온 것은 아니겠죠? 고작 옆에 있다는 게 싫다는 이유 하나로. 그런 멍청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건방져.”
“네.”
서운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신은 나를 건방지다고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인 것 치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군요.”
나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서운은 심호흡을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침을 한 번 삼킨 후 나은을 노려봤다.
“백현 괴롭히지 마.”
“너야 말로 똑바로 행동해.”
나은의 입가가 삐뚤어졌다.
“너처럼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도 못한 주제에 그 사람을 탐내니까. 그 사람이 그렇게 힘들어 하는 거잖아. 너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주제에. 그 사람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주제에 도대체 왜 그 사람 곁에 있는 거야? 네가 거기에 있으면 그 사람이 힘들어할 거라는 생각을 못하는 거니?”
“하고 있어.”
“그런데 왜 그래!”
“좋아하니까.”
서운의 고백. 나은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나은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절대로 백현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
“좋아한다고?”
“그래.”
“그런데 왜 밀어내니?”
“가족이니까.”
결국 또 같은 이야기. 같은 이유. 한 집에서 자라났다는 이유. 나은이 절대로 이해를 할 수 없는 그런 이유였다.
“너는 비겁해.”
“그래.”
나은의 지적에 서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녀가 조금만 더 앞으로 온다면 백현은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아무런 불안도 없이 그 손을 잡을 거였다. 하지만 서운은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여전히 용기를 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혼란을 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그 사람의 곁에 그렇게 다가가지 마.”
“아니.”
나은은 힘을 주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그러면 나는 더 다가갈 거야.”
“유나은.”
“그 사람에게 여자는 오직 나 하나니까.”
나은의 여유로운 미소에 서운은 침을 꿀꺽 삼켰다.
=====================
“일든 좀 할만 한가?”
“네? 네.”
영재의 얼떨떨한 표정에 백현은 미소를 지었다. 영재는 그런 백현을 보며 따라 웃었다. 백현은 곧바로 웃음을 지웠다.
“왜 웃는 거야?”
“사장님께서 웃으시니까요.”
“미친.”
백현의 낮은 욕설에도 영재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리고 이리저리 목을 풀고 하품을 하고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이 푸르네요.”
“그렇군.”
“사장님께서 정리를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백현은 다시 영재를 돌아봤다. 영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별 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결국 모든 분들이 백 사장님을 보고 계신 거니까요. 백 사장님이 제대로 해주셔야 하는 거죠.”
“너나 유 사장하고 잘해봐.”
“네?”
“좋은 사람이야.”
백현의 말에 영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그런 사람이라서 그런 거지. 나도 조금만 더 그 사람이 정상적으로 사랑을 했더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 여자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니까.”
“사랑을 받는 사람이요?”
“그래.”
영재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면 도대체 백현은 왜 밀어내는가?
“그런 거라면.”
“나는 한서운을 사랑해.”
백현의 고백에 영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만히 백현을 보면서 미소를 지어보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
“어머니.”
화자는 백현을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세요?”
“우리 아들.”
“괜찮으시구나.”
백현은 가만히 화자의 손을 잡았다. 그토록 자신을 구박하던 손.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손. 그토록 자신을 죽이고 싶었던 손이었다.
“저 서운이 좋아해요.”
화자는 고개를 들어 백현을 바라봤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어머니.”
“네가 누구를 좋아해?”
예전 모습 그대로의 화자.
“네까짓 것이 어떻게 감히! 감히!”
“어머니.”
“꺼져!”
화자의 고함에 간호사들이 달려왔다. 화자는 얼굴이 붉어져서 그대로 백현에게 이것저것 집어 던졌다.
“네가 감히. 네가 감히 누구를 노려! 네가 감히 누구를! 어떻게 감히 내 딸을 조하할 수가 있어!”
“어머니.”
“너는 버려진 애야! 너는 거지라고! 너는 쓰레기야! 너는 인간도 아니라고! 그런데 누구를 노리는 거야!”
“엄마.”
어느새 와있던 서운이 화자에게 다가갔다. 화자는 서운의 얼굴을 부여잡고 서럽게 울면서 품에 안겼다.
“네가 왜 저런 거지를 만나냐?”
“엄마. 그러지 마.”
“네가 왜!”
화자는 악다구니를 쓰기 시작했다. 서운은 그런 화자를 품에 안고 그녀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엄마. 진정해. 엄마. 엄마. 괜찮아. 엄마.”
“저거 치워! 저거 치워!”
백현은 그런 화자를 보고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숙이고 뒤로 돌아섰다.
'☆ 소설 창고 > 지독한 연애[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28장] (0) | 2016.11.10 |
---|---|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27장] (0) | 2016.11.09 |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25장] (0) | 2016.11.07 |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24장] (0) | 2016.11.04 |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23장] (0) | 2016.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