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장
“내가 이미 말했을 텐데. 내게 있는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강 비서 나의 사람이야. 건드리지 마.”
“업무적인 시간에 부른 것도 아니고. 나랑 그 사람이 연애를 하는데 당신 허락이 필요한 건가?”
“연애?”
백현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은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채로 여유로운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백현. 아니지. 백 사장. 당신이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거 같아요. 나는 그 사람을 업무적으로 불러서 당신의 비밀 같은 것을 캐낼 생각이 없어. 나는 그 사람을 남자로 내게 부른 거야. 알아?”
“남자.”
백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나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괜히 불쾌하고 욕지거리가 치밀었다.
“내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식의 일들을 하는 건가?”
“나는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나은의 말에 백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당신이 나를 보러 왔을 때 나는 있었으니까. 영재. 그 사람하고 같이 있었어. 그런데 당신이 문을 두드려도 열지 않았어요. 이제 더 이상 당신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해요.”
“거짓말.”
백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절대로 나은은 자신을 떠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떠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당신이 어떻게 나에게 그러지?”
“왜 안 된다는 거죠?”
나은의 입 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이제야 내가 갖고 싶니?”
“아니.”
백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나은을 갖고 싶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따. 그저 자신의 것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분노. 뭐 그런 거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괴로움. 그런 거였다. 다른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강 비서를 건드리지 말라는 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 흔들지 말라고 하는 거라고. 내가 하는 말 알아 들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거냐고.”
“아니.”
나은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운 눈으로 백현을 응시했다.
“내가 가여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내가 아니라 당신이 너무나도 가여운 사람이네.”
백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가여운 사람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불쾌하게 들리고 낯설게 다가왔다.
“내가 그 동안 당신만 사랑하니까. 그걸 보지 못했네. 백현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가여운 사람인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지. 그런 것을 내가 전혀 보지 못하고 있었네.”
백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나은을 응시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신 미쳤어.”
“그래 나 미쳤어.”
나은은 입을 내밀고 순진하게 웃었다.
“그런데 내가 미쳤으면 당신은 뭐니? 당신은 지금 도대체 거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라니? 도대체?”
“뭐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그렇게 멍청하게 살고 있으면서. 바보처럼 그저 다른 사람들이 그려준 그림 그대로 살고 있으면서. 도대체 너 누구의 탓을 하는 거야? 내 탓을 하는 거야? 당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백현. 당신은 내가 사랑했었던 사람이었던 것만 같네.”
나은의 말은 꽤 잔인하게 들렸다. 백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사랑했었던 사람이라는 것은 슬펐다.
“그럼 지금은 뭐라는 거지?”
“아무 것도 아닌 사람.”
나은은 백현을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이제 조금은 기뻐해도 좋아.”
“기뻐해도 좋다고?”
백현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도대체 그게 무슨?”
“더 이상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 더 이상 내가 당신에게 아무런 사랑도 느끼지 않는다는 거. 당신이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이라는 거.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는 거잖아. 그래서 불안한 거잖아. 내가 당신을 버릴 거니까. 떠나니까.”
“당신이 나를 버린다고?”
백현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거였다. 나은은 자신을 먼저 떠날 수 없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해.”
“사랑했어.”
“사랑한다고.”
“아니.”
나은은 단호히 고개를 흔든 후 머리를 뒤로 넘겼다.
“더 이상 이러지 마. 이제 내가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겁이 나요? 이제야 내가 없다는 게 느껴져?”
“마음대로 해.”
백현은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에 하나하나 흔들리거나 그럴 이유는 없었다.
“당신이 뭐라고 하건 나는 당신이 없으면 편하니까. 그 동안 나를 괴롭히던 게 바로 당신이니까.”
“그래요.”
나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은 나은을 한 번 노려본 후 그대로 그녀의 방을 나섰다. 나은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이제야 질투라는 걸 해주는 거야?”
나은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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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괜찮으십니까?”
“나보다 강 비서가 진정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차를 둔 채로 마주한 서운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영재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좋네요.”
“거짓말.”
영재의 대답에 서운은 미소를 지었다.
“놀랐죠?”
“네.”
영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았다는 게 더욱 우스운 거였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두 분은?”
“뭐가요?”
“여전히 좋아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요.”
서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차가 담긴 컵을 양 손으로 쥐고 가만히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냥 그 사람은 나에게 잡히지 않았던 사람이었어요. 내가 잡고 싶었던 사람이고. 그게 전부에요.”
“하지만 그런 거라고 생각을 하기에는 이미 두 분은 많이 좋아하시고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그건.”
영재는 물끄러미 서운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나서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한 비서님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사장님은 자주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장님을 유일하게 편안하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한 비서님이십니다. 한 비서님만 계시면 사장님이 편해지세요.”
“그래요?”
“기회를 주세요.”
“무슨 기회요?”
“용서를 할 기회.”
서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로 그것을 사장님에게 미안해하고 계시다면. 그렇다면 사장님에게 사실대로 말씀을 해주세요.”
“백현이 부럽다.”
“네?”
“이 상황에서도 강 비서는 내 걱정이 아니라 백현 그 사람을 걱정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 거잖아. 도대체 왜 그렇게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지는 나는 이해가 안 가지만.”
“하지만.”
“알아요.”
영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서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숨을 뱉었다. 뭔가 답답한 기분이었다.
“말을 할 수 없어.”
“왜 말을 하실 수 없는 거죠?”
“내가 말을 하면 백현의 세상 하나가 무너지는 거니까. 그 사람은 나를 구원자라고 생각을 하는데. 내가 구원자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니까. 내가 그 사람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니까요.”
“하지만.”
“강 비서가 보기에 백현이 흔들려도 괜찮아요?”
영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서운의 말이 옳았다. 만일 그 모든 것을 알게 되면 백현이 많이 아플 거였다.
“하지만 지금 아시는 게 더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나중에 알게 되시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네?”
“백현은 모를 거야.”
“네? 그게 무슨?”
“내가 말을 하지 않을 거야.”
서운은 마치 노래라도 하는 것처럼 답하고 차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영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서운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힘을 주어 저었다.
“그럼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뭐?”
영재의 말에 서운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게 무슨 말이지?”
“사장님께서 그걸 알고 힘들어 하시는 것 보다 그것을 모르시는 게 더 슬프고 아프게 느껴집니다.”
“강 비서. 지금.”
“저는 사장님의 사람입니다.”
서운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자신이 백현을 떠나게 되면 그 누구도 그의 편이 아닐 거였다. 하지만 이렇게 그의 곁에 남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안심이 되는 거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미움을 받는 거지? 유 사장. 도대체 유 사장을 왜 만나는 거예요? 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그 사람이 백현. 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 다 알고 있잖아요. 안 그래요?”
“가여운 분입니다.”
“누가요? 유나은?”
“네.”
영재의 덤덤한 대답에 서운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사람을 잘 못 보고 있네.”
“저는 지금 한 비서님도 가엽습니다.”
서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영재는 짧은 한숨을 뱉어나고는 차를 마신 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물론 저는 세 분에 비해서 너무나도 작은 사람입니다. 나이도 적고. 그래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거. 그냥 그것을 잡고 싶습니다.”
“틀릴 거야.”
“아니요.”
영재는 다시 서운의 눈을 바라보고 쓴 웃음을 지었다.
“한 비서님께서는 마치 유 사장님이 나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정말 나쁜 사람이기를.”
“그게 무슨?”
“좋은 분입니다.”
영재의 대답에 서운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혀로 입술을 적신 후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여서 턱을 괴었다.
“그걸 확신할 수 있어요?”
“네.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네.”
“말도 안 돼.”
서운은 다시 몸을 뒤로 젖히고 고개를 저었다. 영재는 그런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서운은 한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가 낄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마음대로 해. 대신 백현 그 사람이 아픈 거. 이제는 내 잚소이 아니라 당신의 잘못이 되는 거야.”
“네.”
영재는 차를 마신 후 남은 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그래요.”
서운은 멀어지는 영재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사람이네.”
서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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