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장
“그래서 백현의 편을 들고 싶다?”
“그래.”
동우는 한숨을 토해내며 서운에게 차를 건넸다. 서운은 엷은 미소를 지은 채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았다.
“못 자서 어떻게 해?”
“내가 뭐 자려고 하는 사람인가?”
“보통 남자들은 그렇지?”
“그거 남성 차별 발언입니다.”
동우의 유쾌한 대답에 서운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무릎을 안아 몸을 동그랗게 말고 가만히 차를 들여다봤다.
“좋다.”
“차를 마시고 좋다고 하지?”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마셔도 잘 수 있는 차야.”
서운은 고개를 들어 동우를 바라봤다.
“차를 왜 안 마시나 했더니 잠을 못 자서 그런 거였더라고. 내가 그걸 몰라서 너무 미안해. 부끄럽네.”
“뭐야? 지금.”
도대체 이 기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유쾌한 기분이 아니라는 거였다.
“나 배려하지 마.”
“왜?”
“그러면 나는 너를 또 지배하려고 들 테니까.”
서운의 차가운 말에 동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은 채로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서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씩 웃었다.
“좋아해.”
“뭐야. 그게.”
서운은 가만히 차를 들고 바라보다 한 모금 마셨다. 온 몸에 따뜻한 기운이 퍼지는 기분이었다.
“좋다.”
“허브야. 내가 좋아하는 향. 그다지 나쁘지는 않을 거야. 나는 자기 전에 그 녀석을 마시면 오히려 잠도 잘 오더라고.”
“그러게.”
서운도 뭔가 나른해지는 기운을 느꼈다. 그렇게 그 기분에 취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서운은 놀라서 동우를 바라봤다. 동우의 집이 아니라 서운, 자신의 집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한서운 나와!”
백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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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운 나오라고!”
더 이상 이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은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너무나도 우스운 일이었고 너무 한심한 거였으니까.
“내게 적어도 제대로 말은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렇게 백현이 고함을 지르는데 동우의 집 문이 열렸다.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아니라고 따지려고 하는데 서운이 나왔다.
“한서운.”
“시끄러워.”
서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나가서 얘기해.”
“너 왜 거기에서 나오는 거야?”
“나가서 이야기 하자고.”
“너 왜 거기에서 나오는 거냐고!”
백현의 고함에 서운은 침을 삼켰다. 동우가 뒤늦게 밖으로 나섰다. 백현은 아랫입술을 물고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 뭐야?”
“백현.”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백현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결국 이런 거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무리 너랑 나랑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그래도 너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왜?”
“뭐?”
“왜 안 되는 건데? 아무 사이도 아닌데? 도대체 너랑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안 되는 건데?”
서운의 물음에 백현은 할 말을 잃었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도대체 왜 이러느냐는 물음에 대해서 답을 해줄 말이 없었다. 정말로 아무 사이도 아닌 거니까. 그가 따질 것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를 이렇게 확실하게 잡은 적이 없잖아. 그런데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거야? 어?”
“내가 잡는다고?”
“늦었어.”
“아니.”
백현은 아랫입술을 물고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서운을 놓칠 수 없었다. 그래도 그가 오랜 시간 같이 하던 사람이었다. 서운이 없는 세상은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줄 수 없는 세상이었다.
“네가 있어서 내가 사는 거야. 너는 나를 구원했어. 너는 나를 절대로 버리면 안 돼.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잖아. 네 멋대로 나를 구하고. 그러고 지금 나를 버리겠다고 하는 거야?”
“내가 너를 구원한 적 없어.”
“뭐?”
“애초에 내가 널 망가뜨린 거야.”
서운의 덤덤한 고백에 백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서운은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내가 이미 말했잖아. 당신을 망가뜨린 것이 바로 나라고. 내가 당신을 망가뜨렸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한서운.”
“그만.”
“뭘 그만하라는 거야?”
“다 그만해.”
서운은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으로 무슨 일이 가능한 것처럼. 그런 식으로 나를 설득하면. 내가 언제까지 거기에 대답을 해줘야 하는 건데? 당신이 그렇다고 하면 무조건 나는 당신을 봐야 하는 그런 사람이니?”
“한서운.”
“그만 하라고.”
서운의 눈에서 차가움이 묻어났다. 동우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거절하지 않는 서운을 보며 백현은 침을 삼켰다.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왜 안 되는 건데?”
“뭐?”
“안 될 이유 없잖아.”
서운의 미소에 백현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당신에게 말을 한 것처럼 나는 당신을 버렸어. 그리고 아무리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하지만 우리 남매야. 우리 두 사람. 그런데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을 하니? 이야기를 하려면 나가서 하고 아니면 돌아가.”
“얘기 좀 해.”
서운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나가려고 하자 동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가지 말라는 게 아니라 춥다는 거야.”
자신의 생각과 다른 말에 서운의 눈이 흔들렸다.
“감기 걸릴 거야.”
“괜찮아.”
“괜찮지 않아.”
동우는 자신의 가운을 벗어서 서운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바닥이 글리는 것을 보고 서운이 멈칫하자 동우는 고개를 저었다.
“더러워진 것은 빨면 괜찮아.”
“그래.”
서운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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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하려는 게야?”
“아버지야 말로 뭘 하시려는 겁니까?”
태화의 물음에 유 회장은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아버지는 지금 제가 그저 필요해서 옆에 두시는 건데. 그마저도 저는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걸 이제 알았느냐?”
“그러니 말입니다.”
태화는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에게 받은 주식. 그거 쓸 겁니다. 그거 백현. 그 망할 자식이 그 자리에 있도록 쓸 겁니다.”
태화의 말에 유 회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고얀 놈. 네가 지금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게야?”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면 아버지께서 꿈을 꾸는 것들이 많이 망가진다는 의미 아닙니까?”
“그걸 아는 놈이!”
유 회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전이라면 위협을 느꼈을 태화는 더 이상 움츠리지 않았다.
“한 비서를 보고 알았습니다.”
“뭘 말이냐?”
“저는 아버지에게 그리 굴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태화의 말에 유 회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저에게도 아버지께서 너무나도 주용한 분이고 반드시 필요한 분이지만, 아버지에게도 제가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 이상 제가 일방적으로 숙일 이유가 없다는 거죠.”
“네가 아니어도 너를 대신할 사람은 있다. 백현이 있고 나은이가 있어. 그런데 무슨 말을 하는 게야?”
“나은이를 인정하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태화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유 회장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태화의 얼굴에 확신에 찬 표정이 떠올랐다.
“나은이가 아버지 아들이 아니죠.”
“무, 무슨?”
“알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이상하게 두 사람은 닮았습니다. 그 이유까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버지께서 유나은의 어머니를 좋아하기는 하셨다는 거죠. 그래서 저를 버렸고요.”
“무슨 말을 하는 게야?”
“그러게 말입니다.”
태화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도 재미있는 일을 할 자격이 생겨서요.”
“재미있는 일?”
“모든 걸 망칠 자격이요.”
유 회장은 손에 잡히는 것을 그대로 태화에게 던졌다. 하지만 태화는 여유롭게 그것을 받아냈다.
“저는 한 비서가 아닙니다.”
“고얀 녀석.”
“한 비서는 지금 아버지의 편을 드는 게 아니에요. 그저 백현. 그 망할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는 거죠.”
“너보다는 낫다.”
“그럴 테죠.”
태화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이는 것이 더 두려울 정도로 그녀는 맹목적으로 백현의 편을 들고 있었다. 그는 그저 그것을 이용하기만 하는 거였다.
“적어도 유나은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면 제가 지주 회사 사장 자리를 빼앗겨도 억울하지 않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저는 그 아이에게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해 하시죠?”
“너는 나은이를 이기지 못해.”
“그래서 이겨 보려 합니다.”
태화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버지께서 절대로 안 된다는 그것. 제가 하려고요. 저랑 백현이 손을 잡으면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손!”
“나은이는 외로운 사람이죠.”
태화는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었다.
“저는 그저 그 외로움을 자극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너랑 그 아이가 남매로 살아온 것이 그 긴 시절이다. 그런데 뭘 하겠다는 것이야!”
“그래서 그 아이의 행복을 하나하나 뺴앗을 겁니다. 요즘 들어 어린 아이처럼 사랑에 빠졌더군요.”
유 회장은 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강영재. 전에는 백현의 운전기사였고 지금은 그의 비서인 사람. 지금 나은이 녀석 그 사람에게 빠졌습니다.”
“뭘 하려는 게냐?”
“그 사람에게 더 큰 것을 줄 겁니다.”
태화의 표정을 본 유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나은을 지켜야만 했다. 그가 유일하게 들은 부탁이었다.
“나은이 건드리지 말거라. 건드리지 말아!”
유 회장의 간절한 부탁에도 태화는 그저 여유로운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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