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장
“가지 마.”
영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은이 그의 옷깃을 잡았다. 영재는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나은을 바라봤다.
“저 가야 합니다.”
“어디로 가려는 거야?”
“집에 가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있으면 되잖아.”
외로운 사람. 너무나도 외로운 사람. 나은은 온 몸으로 자신이 외롭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저는 내일 출근을 하지 못합니다. 저는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이고. 사장님이 좋아하시지 않을 겁니다.”
“백현 그 사람에게는 내가 말을 해줄게. 그 사람이 아무리 너에게 함부로 대하더라도. 그 사람은 절대로 나에게는 그렇게 굴지 못해. 내 말을 쉽게 거절하거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야.”
“그래도 싫습니다.”
영재는 나은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저와 사장님 사이의 약속 같은 것이니까요.”
“도대체 백현이랑 무슨 사이야?”
“네?”
나은의 눈이 가늘어지자 영재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도대체 두 사람이 무슨 사이인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야. 도대체 두 사람. 왜 그렇게 다정한 거라니? 왜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는 거라니?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야?”
“아무 사이 아닙니다.”
영재는 허리를 숙여 나은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은은 그의 입술을 피할 거 같으면서도 받아들였다.
“마음에 들지 않아.”
“죄송합니다.”
“그래서 간다고?”
“네.”
영재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그녀에게는 영재를 막을 이유 같은 것이 없었다.
“가.”
“네.”
영재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자 나은은 옅게 웃었다. 그리고 가볍게 영재의 손을 끌어 가볍게 그의 손에 입을 맞췄다. 영재는 씩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집을 나섰다. 나은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백현.”
나은은 아랫입술을 물고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당신 뭐야?”
나은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
“뭘 하자는 거야?”
“뭐가?”
“한서운.”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거야.”
서운은 백현의 눈을 보며 그저 덤덤하게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미련 같은 것은 없었다.
“우리 두 사람 도대체 뭘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건데?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잖아. 그런데 도대체 무슨 미련이 있다고 그런 말을 해? 그런 말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 아닌가? 한심하잖아.”
“아니.”
“한심해.”
백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운은 반박했다. 그리고 침을 삼킨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 막힌다. 정말. 당신하고 있으면 내가 뭘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너무 힘이 들어. 아파.”
“그래서 내가 곁에 있는다고 한 거잖아. 그래서 내가 네 곁에 있는다고. 채동우? 저 녀석은 너를 나보다 알지 못해. 내가 너를 훨씬 더 잘 알고 있어.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래서 좋아.”
“뭐?”
서운의 말에 백현의 몸이 굳었다. 서운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한숨을 토해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살짝 옷깃을 여민 후 백현의 눈을 물끄러미 보고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불편한 이유는 당신이 나를 너무 많이 알아서 그러는 거야. 나를 너무 많이 아니까. 정말 나를 너무 많이 아니까 나는 그게 불편해. 나는 나를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이 너무 싫어.”
“그게 왜 싫어?”
“그냥 싫어.”
서운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그 자체가 나는 너무나도 싫어. 나는 당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아니야.”
백현의 말을 이어서 답하는 서운. 백현은 모든 것을 잃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한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숙인 후 원망스러운 눈으로 서운을 바라봤다.
“모든 걸 버릴 수 있어.”
“거짓말.”
“진심이야.”
“아니.”
서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백현의 얼굴을 바라봤다. 많이 지친 얼굴. 이전의 백현과 다소 다른 느낌. 그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런 것을 보면 다소 아프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당신이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
“뭘 하자는 거야?”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거야.”
“한서운.”
“이제 우리는 그저 남매라는 거야.”
서운의 말에 백현은 침을 삼켰다. 남매라는 단어가 이토록 잔인한 단어인지. 뭔가를 막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싫어.”
서운이 다시 입을 열자 백현은 그녀를 밀었다. 그리고 벽에 부딪친 서운의 눈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뭐 하자는 거야?”
“정말 나랑 아무 사이가 아니어도 괜찮아?”
“이미 아무 사이도 아니었잖아.”
“뭐?”
“우리가 무슨 사이이기는 했나?”
“한서운.”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
서운은 백현을 밀어냈다. 하지만 단단히 버티고 선 백현은 쉽게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서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백현의 눈을 차갑게 응시하고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뭐 하자는 거야?”
“당신이 그런다고 해서 나는 무섭지 않아.”
“무서우라고 하는 거 아니야.”
“뭐?”
“그저 당신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가여운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는 걸. 지금 내 눈으로 말하는 거야.”
“내가 가엽다고?”
“그래.”
서운은 손을 들어 백현의 얼굴을 만졌다. 거칠해진 그의 얼굴. 그리고 그의 얼굴을 만지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가 버린 사람이었고, 그녀가 구원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지켜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네가 없이 살 수 없어. 네가 있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 직위. 돈. 그런 것 하나 중요하지 않아.”
“그럼 버리고 와.”
“그럼 받아줄 거야?”
백현의 떨리는 목소리에 서운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백현은 이미 자신과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지금 이 말로 증명했다. 자신이 뭔가를 해주지 않으면 그는 손에 쥐고 있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거였다.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무슨 말이지?”
“내가 그런 조건을 걸지 않으면 당신은 손에 있는 것을 버리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결국 같은 상황일 거야.”
“그건.”
서운의 말에 백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서운은 백현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를 밀어냈다. 밀리지 않던 백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운에게 밀려나서 뒤로 두어 발 물러났다.
“뭐 하자는 거야?”
“그래서 너는 지금 나보다 저 녀석이 좋다는 거야? 나보다 당신을 모르는데. 당신이 뭘 좋아하는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지금 저 녀석이 좋다는 거야?”
“그래.”
서운은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어떤 확신 같은 것이 들었다. 자신은 좋았다. 동우가 있어야 편했다. 동우는 그녀의 모든 것을 다 보이게 하는 사람이었다.
“꾸밀 필요가 없잖아.”
“꾸마다니.”
“아니야?”
서운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에 백현은 침을 삼켰다.
“당신은 나를 보면 뭔가를 꾸며야 하잖아. 우리 두 사람이 솔직한 모습을 보이면 서로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잖아.”
“나는 할 수 있어.”
“내가 못해.”
서운은 가만히 백현의 눈을 응시했다. 한참을 마주하던 백현은 먼저 서운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다 망가뜨릴 거야.”
“할 수 있으면 해.”
“한서운. 당신이라는 사람이 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잊고 있어. 그러면서 지금 이러는 거라고.”
“우리 두 사람 참 지독해.”
서운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참 말도 안 되는 인연이었다. 자신은 마치 뻐꾸기처럼 행복하기 위해서 백현을 밀어냈다.
“나는 그저 나의 행복만을 원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당신은 뭐니? 당신은 당신의 행복만을 원하는 사람이니? 아니잖아. 그런데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어. 당신은 뻐꾸기가 아닌데 뻐꾸기가 되었어.”
“그래서 채동우라고?”
“그래.”
백현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에 서운은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정말 그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야.”
“한서운.”
“너는 내 어두운 공간에 기꺼이 들어오는 사람이었어. 나도 처음에는 나의 어두움에 기꺼이 들어오는 사람이 좋았어. 그런데 이제야 안 거야.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있는 어둠으로 들어와주는 사람이 아니구나. 나는 거기에서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서 불안하기 바란 게 아니었어. 그저 누군가가 나를 꺼내주고 구원해주기를 바란 거야. 그런데 너는 나와 같이 어둠에 있었어.”
“외면한 적 없어.”
백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늘 서운의 곁에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잃을 위기에도 그랬다.
“모든 걸 망친 건 너야.”
“그래.”
“망가뜨린 건 너야.”
“그래.”
“그런데 나에게 이런다고?”
“그래.”
서운의 너무나도 간단한 대답. 어쩌면 심드렁하고 예의가 없을 수도 없는 그 말에 서운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내가 도대체 뭘 어떻게 했는데?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해서 이러는 건데?”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
“뭐?”
잘못도 하지 않는데 벌을 받는 중이었다. 백현의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든 세계가 부서지는 중이었다. 무너져내렸다. 더 이상 그의 세상을 지탱하는 한서운이라는 사람은 없었다.
“도대체 채동우가 뭐가 좋아.”
“연애를 할 수 있어.”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지독한 연애. 서로를 망가뜨리고 가지고. 서로의 모든 상처를 다 바라보는 그거. 할 수 있다고.”
“나랑도 그렇잖아.”
백현의 얼굴이 묘하게 밝아졌다. 어떤 희망이라도 생긴 것 같은 그 말에 서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지독하기만 해.”
“한서운.”
“하지만 채동우 저 사람은 나와 뜨거워. 당신은 나를 달아오르게 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나는 당신을 달아오르게 할 수 없어.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다른 사람이고 그렇게 먼 사람이야. 다른 세상의 사람이야.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서운은 이 말을 남기고 백현을 둔 채 돌아섰다. 백현은 그대로 자리에 무너졌다.
'☆ 소설 창고 > 지독한 연애[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47장] (0) | 2016.12.08 |
---|---|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46장] (0) | 2016.12.07 |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44장] (0) | 2016.12.06 |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43장] (0) | 2016.12.06 |
[로맨스 소설] 지독한 연애 [42장] (0) | 2016.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