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장
“나랑 같이 떠날래?”
동우의 물음에 서운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적어도 여기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거야. 당신을 위해서도 그게 좋을 거야.”
“떠날 거라고 했잖아. 하지만 채동우. 당신과는 아니야. 당신은 나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니까.”
“힘들어 보여.”
“힘들어. 힘들지.”
서운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동우의 눈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나를 아무 것도 도와줄 수 없다는 것 정도도 알고 있어.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야. 채동우. 당신은 나에게 빛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나도 밝은 사람이야.”
서운의 말이 끝이 나기가 무섭게 동우가 그대로 입술을 덮쳤다. 뜨거운 키스. 서로의 타액이 섞였다.
“떠나지 마.”
“갈 거야.”
서운은 동우의 얼굴을 가만히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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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을 그만 두시면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모르겠군.”
영재의 질문에 백현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만 두신 겁니까?”
“뭐?”
백현의 미소에 영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백현은 그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왜?”
“아니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아무 것도 해결이 안 되는데.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서운이랑 뭔가를 할 거라는 그런 기대 같은 것을 하는 건 아니지? 남매야.”
“피는 아니죠.”
영재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백현은 아랫입술을 물고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한심했다.
“그냥 죽을까?”
“사장님.”
“그러면 간단하잖아.”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나머지 반은 진심인 백현의 말에 영재는 아랫입술을 물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그런 말씀은 다시 하지 마십시오. 사장님께서 생각을 하시는 것보다 사장님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걱정하는 사람이라.”
백현은 싸늘하게 웃으며 턱을 만졌다. 살짝 자란 수염이 거칠하게 느껴졌다. 백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였다.
“여행을 갈까?”
“네?”
“같이 갈래?”
영재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이내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미친 새끼.”
“사장님께서만 좋다고 하시면 저는 가능합니다. 저는 언제나 사장님하고 같이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친구니까요.”
백현은 침을 삼켰다. 친구라는 말. 뭔가 묘한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를 아프게 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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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직 못 찾은 거지?”
“응.”
원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은 글라스 가득 소주를 따른 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나도 참 그래. 그렇게 부잣집에 장가를 들어놓고 고작 이런 소주가 맛있어. 위스키나 그런 술은 너무 독해서 마실 수도 없다고. 이런 나를 보고 도대체 왜 다들 부럽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지?”
“부러우니까.”
원우의 간단한 대답에 백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부러워 해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만 두려고.”
“뭘?”
“다.”
“다?”
“응.”
백현이 다시 소주를 따르자 원우가 그의 손을 잡았다.
“놔.”
“너 취했어.”
“오늘 취하려고 너 보자고 한 거야.”
백현은 원우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술을 따랐다. 백현의 그런 모습을 보고 원우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저었다. 백현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한숨을 토해냈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속은 편했다.
“내가 그 동안 너무 잘못 산 거 같아서. 내가 틀린 거 같아서. 내가 너무 한심해서. 그래서 답답해.”
“뭐라는 거야.”
원우는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백현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야?”
“나은이랑 완전히 갈라서려고.”
“이미 갈라선 거 아니야?”
“마음으로도.”
알 것 같기도 하고 알 수 없을 것 같기도 한 말에 원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럴 수 있다는 게 너무 우스운 거라서.”
원우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너 이제 나에게 얻어먹는 거 끝이다.”
“뭐래?”
“이제 사장 그만 두려고.”
원우의 표정이 더 묘하게 변했다.
“그 좋은 자리를 왜?”
“그냥. 나랑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이걸 조금 더 빠르게 알았어야 하는 건데.”
“그러게. 더 빨리 알았어야지. 네 재주랑 상관없이 그 자리에 간 거였으니까. 알았어야 하는 건데.”
원우의 장난스러운 말에 백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연한 거지만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해.”
“뭐?”
“그러게.”
백현은 멍하니 술잔을 바라봤다.
“내가 뭘 할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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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무슨 짐이야?”
“떠나려고.”
동우의 집에 들어간 서운은 침을 삼켰다.
“어디로?”
“당신이 나보다 백현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내가 곁에서 너를 흔들지 않기 위해서 떠나주려고.”
“말도 안 돼.”
서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거였다. 절대로 그러면 안 되는 거였고 그럴 수 없는 거였다.
“도대체 네가 왜 나를 떠나. 도대체 왜? 나는 말도 안 되잖아. 그거.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네 곁에 내가 있으면 계속 헷갈릴 거잖아. 나는 네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거든. 나는 당신과 어울리지 않으니까.”
“제발.”
서운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누구도 감히 그녀를 먼저 떠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우를 막을 힘이 없었다.
“네가 나를 떠나면 나는 죽어.”
“알아.”
“그런데 간다고?”
“응.”
서운은 침을 삼켰다. 동우의 단호한 말. 모든 것은 다 자신이 자초한 것이지만 이럴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내가 이렇게 모질게 행동을 해야지. 겨우 한서운. 네가 네 마음을 안다는 것을 깨달았거든.”
“내 마음?”
“백현.”
서운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여전히 그녀를 흔드는 사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아무리 백현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그냥 떠날 수는 없는 거였다.
“네가 나한테 원망스러운 마음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 그건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그저 원망스러운 마음이 아니야.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당신이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
“행복?”
너무나도 이질적인 그 단어에 서운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침을 삼켰다.
“그게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응.”
“뭐?”
“백현. 그 녀석을 보면 가장 설레는 너. 그게 네 진심이었던 거야. 너는 아니라고 하지만. 너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하지만. 백현은 너를 살리는 사람이고, 너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사람이야.”
“그래.”
서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이 자신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어떤 의미를 갖는다거나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사실이 아니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건. 나는 당신을 떠날 거야. 한서운. 그게 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니까.”
“너를 위해서 좋다니.”
“네 곁에 있으면 평생 나는 바보처럼 당신을 위해서 그렇게 살고. 또 보고 아파하고 그럴 거야.”
서운은 침을 삼켰다. 자신은 동우를 바라볼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동안 그걸 잊고 있었다.
“정말로 우리 두 사람을 위한 거라면. 내가 떠나야 옳은 거야. 그게 우리 두 사람을 위한 거야.”
“거짓말.”
서운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럴 수 없는 거였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도대체 뭐 때문에 나에게 이러는 건데? 내가 뭘 잘못했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동우는 덤덤하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서운의 눈을 물끄러미 보더니 밝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그저 그것인 거야.”
“뭐?”
“그냥 그래서 그런 거라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으면서도 알 수 없는 이야기. 서운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자신은 동우를 붙잡을 자격이 없었다. 자신은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일들을 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미안.”
“아니.”
서운의 사과에 동우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를 사랑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서운을 뭐라 할 자격은 없었다.
“정말 미안해.”
서운은 동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런 나쁜 년인지 모르겠어. 그냥 너랑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 네가 좋아. 너무 좋아. 그런데 이게 참 이상하게도. 너는 나에게 있어서 백현보다 우선이 될 수 없는 사람이야.”
“그래.”
동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운의 앞에 같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이웃을 사랑해줘서 고마워.”
“채동우.”
“당신에게 있어서 나는 너무나도 이상한 사람이었어. 갑자기 들어온 거고. 갑자기 뭔가를 말한 거고.”
“하지만.”
“그러니까. 이제 당신이 행복한 걸 찾아.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당신이 백현을 사랑한다고 해서 욕을 한 대도 나는 아니니까.”
서운은 침을 삼켰다. 이 말을 듣고 싶었다. 자신이 백현을 좋아해도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거지?”
동우는 대답 대신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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