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장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습니다.”
영재의 솔직한 대답에 백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모르는 것을 영재가 쉬이 알 리가 없었다.
“아무튼 나는 사장 자리를 그만 두면 자네 자리 하나 보전해줄 수 없는 사람이야. 유나은에게 갈지. 아니면 그냥 나를 따라서 일을 그만 두고 여행을 갈지. 뭐든 골라. 돈은 내가 줄 수 있어.”
“친구 사이에 여행을 가면서 돈을 받는 건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유 사장님에게 바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바로 가지는 않는다.”
다소 말장난 같기는 했지만 이게 아마 영재가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일 거였다.
“그렇겠지.”
“적어도 사장님께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럴 거야?”
“네?”
갑작스러운 백현의 질문에 영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사장님.”
“아.”
겨우 백현의 말을 이해한 영재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백현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여기를 떠나서 잘 할 수 있을까?”
“잘하실 겁니다.”
“그냥 그런 이야기 말고.”
“하지만.”
“됐다.”
영재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하자 백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목을 풀었다.
“일단 유 회장님께 다녀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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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그만 둘 것인가?”
“네.”
백현의 간단한 대답에 유 회장은 미간을 모았다.
“자네가 여기를 나가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을 거 같은데. 그래도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은가?”
“네.”
백현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런 것은 전혀 두렵거나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가 겪어야만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가지고 괜히 망설이거나 그럴 이유는 없는 거죠.”
“허나 그로 인해서 자네의 손에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애초에 제 손에 있던 것은 없습니다. 제가 갖고 있던 것은 모두 다른 이의 것이었죠. 제가 제 노력으로 인해서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없으니. 그게 더 이상 저에게 없다고 해서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백현은 덤덤한 고백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 않다고 하면 솔직히 100% 진심은 아닐 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에 와서 그 모든 것을 다시 하거나 돌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어차피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어야 했던 겁니다. 제가 그 동안 너무나도 망설이고 그랬던 거죠. 그나저나 한 비서의 선택이 의외이기는 합니다. 당연히 유나은 그 사람. 유 사장을 고를 줄 알았거든요.”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유 회장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창을 바라봤다. 멀리 날아가는 새를 보며 그는 혀를 찼다.
“자네는 저 새들이 자유로워 보이나? 하나도 자유롭지 않아. 제 몸 하나 제대로 쉴 곳 없이 저리 방황하고 있는 것인데. 지금 저들이 부럽다고 하면 자네도 너무나도 한심한 선택을 하는 거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만 둔다?”
“네.”
“후회하지 않겠는가?”
“후회할 겁니다.”
백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좋은 자리를 그만 두고 후회를 하지 않을 자신 같은 것은 없었다. 무조건 후회할 거였다. 지금 이 선택을 한 자신을 너무나도 멍청하게 생각할 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에 더 붙들려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 있을까? 불안해하면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자네만 원한다면 그 자리 지켜줄 거야.”
“아니요.”
백현은 고개를 저었다. 유 회장의 진심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쇠약한 자신의 몸을 대신해서 이 자리에 버틸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 자리에 태화를 앉히고 싶었지만 실패한 거였기에 그가 더 필요한 거였지만, 더 이상 유 회장의 그런 장난감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가려는 거군.”
유 회장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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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만 둔 거야?”
“응.”
서운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미쳤어.”
“알아.”
백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을 했고. 이미 저지른 거였다.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도대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냥 보면 되는 거야.”
“당신이 그런 짓을 한다고 내가 뭐 안쓰럽게 생각할 거라고 믿어? 절대 아니야. 아니라는 거 알잖아.”
“그래.”
백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에게 동정을 받으려고 이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뭔가 정리하고 싶었다.
“한서운. 너에 대해서 아무런 원망 같은 건 하지 않아. 네가 나를 버렸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나를 못 알아본 건 어머니니까. 세상에 그 어떤 어미가 자기 새끼를 알아보지 못할까. 그러니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런 식으로 위로하지 마.”
서운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고작 그런 걸로 위로한다고 해서. 그게 무슨 위로가 될 거라고 생각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한서운.”
“됐어.”
백현이 자신에게 손을 데려고 하자 서운은 단호하게 그 손을 밀어냈다.
“도대체 당신이 뭐니? 당신이 뭐라서. 네가 뭐라서 내가 너에게 흔들리고 그러는 거야. 나 이해가 안 가.”
“그러게.”
백현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이 모든 것을 망가뜨린 자신. 그리고 이 모든 순간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나를 죽여줄래?”
“미쳤어.”
“내가 불쌍해야 네가 나를 좋아해줄 테니까.”
서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가 목을 단단히 막고 있었다. 백현은 그대로 허리를 숙여 서운에게 입을 맞췄다. 뜨거웠다.
“너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어.”
“미친 새끼.”
서운은 백현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백현은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서운을 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너만 나를 살릴 수 있어. 그러니 네가 나를 살려. 그러니 제발. 제발 네가 나를 살렸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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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거야?”
“네.”
나은은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영재를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기를 바랐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끔찍할 거야. 그러니까 나를 위로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마.”
“죄송합니다.”
영재가 고개를 숙이자 나은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이렇게 자신이 먼저 마음을 보였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어디로 갈 건데?”
“모르겠습니다.”
“뭐? 설마.”
“네.”
영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은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말도 안 되는 거였다.
“도대체 백현이 뭔데. 그 사람이 뭔데? 네가 그 사람을 따라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간다는 거야? 그 사람이 너에게 뭘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 사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야. 너에게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을 거고. 너에게 약속하는 거 지키지 못할 거야.”
“아무 것도 약속 받은 것이 없으니 그 분이 저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실망할 일은 없을 겁니다.”
영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은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여 그녀를 안았다.
“제가 아니어도 좋은 분을 만날 겁니다.”
“뭐?”
“저는 그저 사장님께서 백현. 그 분이 아닌 다른 분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ᅟᅡᆺ람이니까요.”
“증명?”
나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저는 사장님에게 어울리기에는 너무 부족한 사람입니다. 저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왜 그러세요.”
“내가 좋다고.”
나은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지금 생각하는 것. 이 모든 느낌을 그에게 모두 말을 해야만 했다.
“백현이 아니라 이제 네가 좋다고. 그런데 네가 사라진다면. 그런다면 나는 뭘 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영재의 거듭된 사과. 나은은 고개를 저었다.
“자존심 상해.”
“죄송합니다.”
“사과. 하지 마.”
나은은 영재의 눈을 바라봤다. 영재는 아이처럼 밝게 웃으면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따스했다.
“사랑해.”
“고맙습니다.”
나은은 영재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가 백현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영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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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화자는 놀란 눈으로 백현을 바라봤다. 백현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너무 답답했다.
“미안해요.”
“아들.”
“내가 이제야 와서 미안해.”
“아이고. 우리 아들이 뭐가 미안해?”
화자는 그 예전의 화자처럼 활달한 채로 백현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미친년이지. 내가 도대체 왜 내 아들을 못 알아봤는지 모르겠다. 우리 아들 잘 컸네. 잘 컸어.”
“응. 잘 컸어.”
화자는 백현의 얼굴을 쓰다듬었고, 백현도 자신의 얼굴을 만지는 화자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아들 잘 컸어.”
“서운이랑 행복해.”
백현은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내가 미안하다. 내가 모진 년이라서. 내가 멍청한 년이라서 두 사람 인연을 그 꼴로 만들었다.”
“그게 어떻게 엄마 잘못이야.”
“처음 너희 두 사람이 눈이 마주한 순간부터 이상하더라. 그리고 서운이 그 년이. 너를 버리고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순간에도 너희는 이상했어. 서로에게 끌리고. 그 마음을 애써 부정한 게야. 지독한 거지. 아주 두 사람은 지독한 사이야. 그리고 그 동안 너희는 연애를 한 거야. 너희 나름의 방식으로. 서로를 부정하고 원마하고 밀어내고 서운하게 하면서. 그렇게 지독한 연애. 지독한 연애를 한 거야.”
백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 말이 모두 옳을지도 몰랐다. 자신들은 그런 지독한 연애를 한 거였다. 그런 멍청한. 그런 한심한 일을 하면서 살아온 거였다. 그랬다.
“아들. 행복해.”
“네.”
화자는 미소를 지은 채 백현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고 손을 떨어뜨렸다. 백현은 화자의 손을 꼭 잡고 서럽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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