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장. 무료한 시간들
“확실히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알겠다.”
“그러게.”
서준의 말에 윤태는 입을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길석 하나 사라졌다고 섬이 꽤나 조용해졌다.
“다들 자기 할 일을 하고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여유롭네.”
“그러게.”
윤태는 이리저리 목을 풀며 기지개를 켰다. 식량에 대한 걱정도 없고 그냥 편하다는 느낌이 들 따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간을 너무나도 끔찍하게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도 휴가를 왔다는 생각이 드네. 그래도 우리가 여기에서 시간을 본래 수 있다는 이야기이니까.”
“좋겠다.”
“뭐가?”
“나는 이 순간에도 빚이 늘고 있을 거다.”
서준은 입을 쭉 내민 채로 고개를 저었다.
“학자금 대출. 그거 누가 갚아주는 거 아니니까. 내가 알아서 갚아야 하는 건데. 정말 감당이 안 된대.”
“이 형이 낭만이 없어.”
“이 상황에서 낭만 찾게 생겼어?”
“그런가?”
윤태는 씩 웃으면서 서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가면 내가 싹 갚아줄게.”
“뭘?”
“형 학자금 대출.”
“됐다.”
“왜?”
“괜히 설레.”
“진짜로.”
윤태는 장난스럽게 웃다가 이내 그 표정을 지우고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형이 이윤태를 몰라? 내가 또 이런 거. 의리 잘 지키고 그런 사람이잖아. 왜 그 동안 빚이 있다는 말을 안 했어? 그 정도 내가 갚아주지. 형 학자금. 그거 뭐 얼마나 된다고 그래. 갚아줄게.”
“정말이지?”
“그럼.”
“무르기 없기다.”
“물론이지.”
“좋아.”
서준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흐뭇하게 웃었다. 윤태는 고개를 끄덕이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형 빚이 얼마야? 보통 한 학기에 400쯤 하니까 한 2000 조금 안 되겠다. 안 그래?”
“아니.”
“그럼?”
“내가 학교를 좀 길게 다녔잖아.”
“아.”
윤태는 손뼉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중간에 학교를 옮기기도 하고 쉽게 적응을 하지 못했던 윤태였다.
“그럼?”
“좀 오래 다녔지.”
“그래서?”
“그리고.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아직 이렇게 안정적인 학자금 대출이라는 시스템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않아서 말이야. 은행에서 그 빚을 다 내서 갚고. 뭐 그런 종류의 시스템이었거든.”
윤태는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윤태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목을 풀었다.
“나는 목이 좀 뻐근하네.”
“너 약속했다.”
“무슨?”
“학자금.”
“어?”
“고마워. 내 1억.”
윤태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이런 윤태의 난처함과 다르게 서준은 그저 행복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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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같은 인간이 하나 사라졌다고 해서 섬이 이렇게 조용해질 줄 알았으면 진작 보낼 걸 그랬어요.”
“그러게.”
세연의 말에 지아는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을 누군가가 잔인하게 생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데 언니는 어떻게 면 생리대를 만드는 법도 다 알고 그러는 거예요? 정말 대단한 거 같아?”
“이것저것 내가 안 해본 게 없거든.”
“그렇구나.”
세연은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지아는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자기는 뭐가 이렇게 궁금한 게 많아? 저기 윤한이가 자기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야?”
“네?”
지아의 말에 윤한을 힐낏 보던 세연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흔들고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세요.”
“아니. 자기 한국에 있을 때도 윤한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고. 내가 보기에 두 사람 사이 뭔가 애매한데.”
“아니에요.”
세연이 얼굴을 붉힌 채로 고개를 흔들자 지아는 씩 웃었다.
“좋아해?”
“아니.”
세연은 침을 꿀꺽 삼키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글을 쓰는 사람이 너무 멋있으니까.”
“그래요?”
“네. 안 그래요?”
“뭐.”
지아는 입을 내밀고 고개를 그덕였다. 자신은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낭만이 전혀 없지만 누군가는 그런 것에 대해서 낭만을 가질 수 있다는 것까지 부정할 그런 모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 좋다고 하지.”
“어떻게 여자가 그래요?”
“어?”
“여자는 뭔가 조신해야 한다고요?”
“자기 무슨 구석기 사람이니?”
“네?”
지아의 단호한 말에 세연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자기 그런 생각이 멍청한 남자들에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심어주거든.”
“말도 안 되는 상상이요?”
“아무튼 고백해.”
지아의 말에 세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잠시 고민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쪽은 무리였다.
“뭐라고 할 줄 알고요?”
“거절하면 거절하는 거지.”
“네? 언니도 참.”
“안 그래?”
지아가 간단하게 대답하자 세연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간단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기엔.”
“뭐가 복잡한 건데?”
“그러니까.”
“여기 무인도야.”
지아가 양 팔을 벌려 보이자 세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무인도였다. 아무 것도 달라질 것 없는.
“그런데 도대체 무슨 고민을 하는 거니? 여기에서 우리가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필요도 없는 고민을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냥 자기 마음 그대로 고백을 하라고.”
“거절을 할까요?”
“모르지.”
“냉정해.”
“그럼.”
세연은 입을 내밀고 지아를 노려보다 곧바로 지아에게 팔짱을 끼고 웃어보였다.
“언니는 그래서 고백할 거예요?”
“뭐가?”
“이윤태 씨.”
“아니.”
지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지아의 반응에 세연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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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조금 더 심해진 거 같지 않아요?”
“그러게.”
지웅은 먼 바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율은 다른 날보다 훨씬 적은 물고기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도 계절이 있는 거 같아요.”
“그런가?”
“우리가 지금 좋은 계절에 와서 먹는 것에 크게 걱정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제 겨울이 오는 거 같아요.”
“겨울.”
여기도 같은 북반구였으니까. 계절의 흐름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였다. 재율의 말이 옳을 거였다.
“어떻게 하실래요?”
“뭘?”
“남은 사람들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재율의 물음에 지웅은 입을 다물었다. 재율의 말이 옳을 수도 있었다. 아니. 옳은 말일 거였다. 여기에 있다가는 모두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새로운 곳을 향해서 나아가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제 불안해하고 있어요. 우리가 섬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이 길어진 거니까요.”
“그렇지.”
“겨울이 되면 파도가 더 심해질 거예요.”
“그러게.”
겨울의 파도. 그건 꽤나 끔찍하다는 것은 지웅도 알고 있었다.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복잡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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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수첩에 뭔가를 적던 윤한이 고개를 들었다. 세연이 미소를 지은 채로 그의 텐트에 들어와서 앉았다.
“바빠요?”
“아니요.”
윤한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에요.”
“뭐가요?”
“윤한 씨 수첩.”
“아. 네.”
윤한은 잠시 무슨 말을 하나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싸구려라고 생각을 했던 가방이 그렇게 제대로 방수가 될 줄이야. 수첩들은 모두 멀쩡했다. 노트북은 맛이 간 거 같았지만 배터리 문제일 수도 있었고. 아무튼 연필과 수첩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윤한에게는 너무 다행이었다.
“저기.”
세연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왜요?”
“아니요.”
세연은 그대로 텐트를 나갔다.
“뭐지?”
윤한은 입을 쭉 내밀고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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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세연은 한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숙였다. 고작 이 정도 말도 못한다는 게 너무나도 우스웠다.
“아니 아빠가 그렇게 모델을 하지 말라고 할 때는 그렇게 당돌하게 부딪쳤으면서.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빠가 지금 자신을 보면 혀를 끌끌 차고만 있을 거 같았다. 세연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뭐.”
날이 오늘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세연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근데 날이 좀 추운 거 같은데.”
세연은 팔을 문질렀다.
“뭐지?”
세연은 하늘을 바라봤다. 어두웠다.
“흐음. 겨울인가?”
별 것 아닌 거 같은 말이었지만 세연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겨울. 생각도 하지 않은 단어였다. 이곳에서 또 다른 계절을 맞이하는 건가? 세연은 입을 내밀고 천천히 자신의 텐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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