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칠 장. 여정 둘
“가셔요.”
“싫다.”
향단의 제안에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내가 이 고을을 떠나서 살 수가 있겠니? 어머니의 삼 년 상도 내가 다 치러야 하는 것인데.”
“그럴 꼭 아가씨가 챙기셔야 하는 겁니까?”
“응?”
향단의 말에 춘향은 미간을 모았다.
“그게 무슨 말이니?”
“아가씨. 저도 마님의 덕이 아니었으면 여적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찌 이리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까? 종년의 팔자란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 아가씨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예?”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향단의 말에 춘향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게 무슨?”
“알고 있습니다. 천하디 천한 제가 마님을 모신다는 것이 좋아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허나 그리 하여도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제가 대신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아가씨는 떠나십시오. 더 이상 이 남원 고을에 메여서 슬퍼하시고 아파하시지 마시고. 당장 이곳을 떠나십시오. 그래도 되십니다.”
“싫다.”
춘향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뉘가 뭐라고 하더라도 이곳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었다. 그리고 지켜야 할 곳이었다. 무조건 도망을 가고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어찌 그러는 것이냐? 내가 지킬 것이다.”
“이 고을에 계시면 아가씨 지치십니다.”
“괜찮다.”
“아가씨.”
“향단아.”
춘향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 번 피했으면 된 것이다. 더 이상 피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내가 자신들을 피한다고 그것을 갸륵하게 여길 거라고 생각을 하니? 그렇지 않아. 사람들은 내가 겁쟁이라고 생각을 할 게다.”
“제가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
향단의 다부진 대답에 춘향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향단은 미소를 지으며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제가 그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저만 그리 생각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이들의 말이 왜 그리 중요하십니까?”
“그건.”
“저에게 그러시지 않으셨습니까? 스스로에게만 당당하면 되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당당해지십시오. 아가씨는 스스로에게 더 당당해도 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인데 왜 그리 망설이고 또 망설이십니까?”
“그러게 말이다.”
자신이 향단에 그리 말을 했었구나. 묘한 느낌이 들면서 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이 아주 먼 과거의 일처럼 아득하니 느껴지는 것이 정말로 묘한 느낌이었다.
“신기해.”
“그러니 가세요.”
“싫다.”
“아가씨.”
“싫어.”
“부탁입니다.”
향단이 큰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로 춘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춘향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저는 마님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러다가 아가씨까지 지키지 못한다면. 혹여 아가씨마저도 큰일을 당하신다면. 정말 저를 용서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러니 아가씨 스스로를 지키실 수 있는 곳으로 가주세요. 부탁입니다. 괜찮습니다. 모두 다 괜찮을 일입니다. 그러니 아가시만 생각을 하십시오.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고 그러지 마십시오. 그것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은 이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배려하고 있는 것일가? 그저 겁을 내고 망설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다.”
“아가씨.”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두려워.”
춘향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고 고개를 저었다.
“누가 나를 받아주겠느냐?”
“왜요?”
“나는 관기였다.”
“이제 더 이상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이 변할 것 같으니?”
“변합니다.”
“아니.”
춘향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변하지 않을 거였다.
“사람들은 계속 나를 관기라고 생각을 할 거다. 그리고 그 사실은 계속 나를 괴롭히고. 또 괴롭힐 것이다. 그러니 나는 관기이다. 사람들이 아니라고 해도. 네가 아니라고 해도 관기이다. 그러니.”
“그러니 스스로 생각을 바꾸십시오.”
“뭐라고?”
향단의 말에 춘향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나 겨우 할 말이었다. 자신이 향단에게 할 것 같은 말을. 그 말을 향단이 자신에게 했다.
“정녕 그것이 네 생각이니?”
“예.”
“그럼 너는 어쩌고?”
“이거 보세요.”
“응?”
향단의 반응에 춘향은 멍해졌다. 향단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검지를 들었다.
“지금도 저를 우선으로 생각을 하시는 것 아니십니까? 도대체 제가 뭐라고 이러시는 겁니까?”
“그러니까.”
지금도 자신은 향단을 우선으로 생각을 하는 거였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은 모르는 채 할 수 없는 거였다.
“그렇다고 내가 너를.”
“사또를 따라가세요.”
“향단아.”
“그게 아가씨를 위한 길입니다.”
향단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표정이었다. 춘향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이런 향단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생각이 바뀌었소?”
“아니요.”
“알겠소.”
학도는 이 말만 묻고 그대로 집을 떠났다. 뭐 하는 것인지.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도 사또를 그냥 보내셨소?”
“그러하였다.”
“왜 그러십니까?”
또 잔소리. 춘향은 피식 웃어버렸다.
“내가 가버렸으면 좋겠니?”
“예.”
“향단아.”
“아가씨가 여기에 있으면 저까지 힘듭니다.”
“그게 무슨?”
“사람들 수군거리는 소리 안 들리시오?”
그제야 춘향은 사람들이 이미 자신의 집을 보고 있어다는 사실을 알고 몸을 살짝 움츠렀다. 답답했다.
“저 사람들은 아가씨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 얼마나 가여운 사람인지. 그런 것을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 그거 하나 찾는 사람들입니다.”
“이웃들에게.”
“이웃이요?”
향단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들은 이웃이 아닙니다. 이웃이라면 그럴 수가 없는 법이지요. 다들 아가씨께서 그 일을 당할 때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다들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척 했습니다.”
“그것은.”
춘향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럴 수 있다.”
“아가씨. 어찌.”
향단은 춘향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왜 아니 되니?”
“마님이 얼마나 잘 해주셨는데요?”
“응?”
“봄에 곡식이 모자라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가을에 목화가 모자라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겨울에 불씨를 꺼뜨리면 나눠주고, 장작도 나눠주고. 그런 사람을 어찌 이리 대한다는 겁니까!”
향단이 악을 지르자 모두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갔다. 춘향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그럼 같이 가십시다.”
“응?”
“저도 같이 가십시다.”
향단의 말에 춘향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엄니는?”
“이해하실 겁니다.”
엄마에게 또 잘못할 수는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엄니. 나는 어쩌요?”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춘향은 월매의 무덤에 엎드렸다.
“나는 어쩌요?”
서러웠다. 너무나도 서러웠다.
“엄니.”
뭘 할 수 있을까? 자신이 뭘 할 수 있을까?
“가.”
“엄니?”
춘향이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월매의 목소리였다.
“가. 어여 가.”
“엄니. 엄니.”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고 할 수도 있었다. 아니 미쳤다고 할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악!”
춘향은 놀라서 자리에 앉았다. 향단이 놀라서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향단아.”
“예?”
“같이 가자.”
“예?”
자다가 갑자기 하는 춘향의 말에 향단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춘향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입을 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셔요.”
“그래. 가자.”
월매도 떠나라고 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곳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럴 수 없었다.
“가자. 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향단이도?”
“예.”
학도가 아니 된다고 할까 춘향은 조마조마했다.
“그러니.”
“가자.”
“예?”
너무 쉬웠다.
“그러니 사또.”
“가자꾸나.”
학도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이유도 없었다. 아무 조건도 없었다. 그저 가면 되는 것이었다.
“네가 그리 부탁을 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에게 부탁을 하지 않더구나. 그러니 다행이다. 네가 이리 나에게 부탁을 하니. 이리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니 다행이다.”
“사또.”
“그대는 이제 나와 같이 갈 것이오.”
존칭을 썼다가 하대를 했다가. 학도도 평소와 다르게 긴장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춘향은 아랫입술을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
'☆ 소설 창고 > 벚꽃 필적에[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맨스 소설] 벚꽃 필적에 [십구 장. 술이 차면] (0) | 2017.06.06 |
---|---|
[로맨스 소설] 벚꽃 필적에 [십팔 장. 여정 셋] (0) | 2017.06.05 |
[로맨스 소설] 벚꽃 필적에 [십육 장. 여정 하나] (0) | 2017.05.25 |
[로맨스 소설] 벚꽃 필적에 [십오 장. 모든 걸 잃던 날] (0) | 2017.05.23 |
[로맨스 소설] 벚꽃 필적에 [십사 장. 그 시절 이야기 셋] (0) | 2017.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