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 장. 여정 셋
“무슨 짐이 이리 많아?”
“오랜 여정일 수도 있으니까요.”
“아니.”
향단의 짐을 본 춘향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남원으로 돌아올 거야.”
“예?”
“언젠가 돌아오게 될 거야. 나는 이곳에서 몽룡 도련님을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니까 다시 돌아올 거야.”
“아가씨.”
춘향의 대답에 향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입을 삐쭉 내밀었다.
“정녕 그리 생각을 하십니까?”
“그럼.”
“답답하십니다.”
춘향의 대답에 향단은 혀를 찼다.
“지금 몽룡 도련님 댁에서 누구 하나 온 적이 있습니까?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아무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요.”
“그럴 수도 있지?”
“아가씨.”
“되었다.”
향단의 말이 더 길어질 것 같자 춘향은 고개를 저었다. 향단은 작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콩콩 두드렸다.
“어찌 그리 아둔하게 생각을 하시는 겝니까? 그 영리한 아가씨가 도대체 어찌 이리 되셨습니까?”
“향단아.”
“돌아오시지 않으십니다. 몽룡 도련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으십니다. 만일 그 집에서 그럴 생각이 정말 요 만큼이라도. 아주 요 만큼이라도 있었다면 오지 않을 리가 있을 거라 생각을 하십니까?”
“그건.”
향단이 엄지와 검지를 아주 작게 벌리고 말을 하자 춘향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럴 거였다.
“그것은. 그러니까.”
“아가씨.”
“됐다.”
춘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튼 돌아올 것이다.”
“돌아오시건 마시건 일단 이 만큼은 챙겨야 합니다. 적어도 한 달은 훌쩍 넘게 지내게 되실 텐데요.”
“그래도 이건.”
이불까지 챙기는 향단을 보며 춘향은 미간을 모았다.
“경주요?”
“왜 그러느냐?”
“너무 멀어서 말입니다.”
향단의 대답에 학도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기를 어찌 걸어서.”
“누가 걸어서 간다고 하더냐?”
“예?”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갈 것이다. 그러니 너는 아무런 염려를 하지 말거라. 어린 계집이 아주 걱정이 많다.”
“그렇습니까?”
학도의 대답에 곧바로 환해지는 향단의 얼굴을 보며 춘향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어린 아이였다.
“너무 멉니다.”
“무엇이 말이오?”
“그것이 다시 이곳에 돌아오고.”
“이 년이 걸릴 것이오.”
“예?”
학도의 대답에 춘향은 미간을 모았다.
“무엇이?”
“이곳에 돌아올 것입니다. 이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내 여기로 다시 그대와 같이 돌아올 것이오.”
“이 년이요?”
춘향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학도는 빙긋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먼 하늘을 보았다 다시 춘향을 쳐다봤다.
“싫소?”
“너무 깁니다.”
“무엇이 기오?”
“그 전에 도련님이 돌아오면.”
“아가씨!”
“괜찮다.”
향단이 새된 비명을 지르듯 외치자 학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춘향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었다.
“이몽룡 그 자요?”
“예.”
“그 자가 언제 올지 알고?”
“그것이.”
언제 온다는 기약이 없었다. 그저 장원 급제 하면 그제야 돌아온다는 말을 하고 한양으로 간 사내였다.
“내가 알기에 올해는 과거가 없소.”
“예?”
춘향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게 무슨?”
“홍길동이라는 사내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통에 이 나라 조선에 여러 문제가 생겨서 말입니다. 그래서 올 한 해는 과거를 보지 않기로 하였소. 그리고 내년에는 다시 본다고 하나 내년에 바로 붙을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 전에 과거 소식이 있으면 그대만 오면 되는 것 아니오.”
“그것이.”
춘향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학도의 말이 옳았다. 몽룡이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대가 어디로 갔는지는 이 고을 사람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그것이 무슨?”
“하오나.”
“나를 못 믿소?”
“예? 아닙니다.”
학도의 물음에 춘향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학도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저. 그것이. 그저.”
“그러니 가시죠.”
춘향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엇이?”
“그 자리에서 어찌.”
향단은 팔짱을 끼고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런 말을 하시면 사또께서 얼마나 서운하게 느끼실지 모르고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 겁니까?”
“향단아.”
“가시죠.”
“허나.”
가야 했다. 가야만 하는 거였다. 이 고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알고 있기에 가야 하는 거였다. 그러는 동시에 가기도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몽룡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두려웠다.
“외간 사내를 따라서 떠났다고 하면.”
“그럴 분이면 제가 아가씨를 보내드리지 않을 겁니다.”
“응?”
“몽룡 도련님이 그런 분이라면 제가 아가씨 치맛자락을 놓지 않고 꼭 붙들고서 시집 못 가게 할 겁니다.”
“그래?”
춘향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
“못 믿으시는 게지요?”
“응?”
향단의 말에 머리가 아득했다.
“그 말이.”
“지금 몽룡 도련님을 믿지 못하여서. 그 분이 아가씨를 어떻게 생각을 할까 그것이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아니라.”
아닌 게 아니었다. 그것이었다. 이게 사실이라서 더욱 당황스러운 거였다. 춘향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풀었다.
“그렇구나.”
“아가씨.”
“내가 그랬구나.”
몽룡을 믿지 못한 것이었다. 모두 다 믿는다고 하고서. 모두 괜찮다고 하고. 그래놓고 믿지 않은 것이었다.
“아둔하게도.”
“누구나 그렇습니다.”
“아니.”
향단의 말에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그렇지 않을 것이었다. 다른 여인들은 이러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가실 것이지요.”
“가야지.”
춘향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 하는 거였다. 어차피 이곳에 있어봐야 달라질 것은 없으니.
“가야지.”
“아직 기다리오?”
“아닙니다.”
짐을 모두 꾸리고 망설이는 춘향을 보고 묻는 학도의 물음에 춘향은 쉬이 대답을 하지 못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가시지요.”
“참 매정합니다.”
“향단아.”
“어찌.”
몽룡의 집에서는 결국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를 버려두는 것이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잊는 것이었다.
“오르시지요.”
“예.”
춘향은 마지막까지 몽룡의 집이 있는 방향에 시선을 둔 채로 마차에 올랐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것이 서양에 그리 많은 것이라지요.”
“향단이 네가 영특하구나.”
“소설에서 읽었습니다.”
“그래.”
학도는 향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멀리 색목인들이 타던 것을 청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군요.”
“길이 멀다. 가자꾸나.”
“예. 아가씨?”
“응? 응.”
춘향이 고개를 끄덕이자 학도는 말고삐를 죄었다. 그리고 말은 천천히 걷기 시작하고 마차도 움직였다. 이제 남원을 정말로 떠나는 여정에 오른 것이었다.
“아직도 제 잘못입니까?”
“그것이.”
춘향의 긴 말이 끝이 나자 몽룡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러니까.”
“저는 도련님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춘향이 얼마나 자신을 간절히 기다리고 또 기다린 것인지 몽룡도 알고 있었다.
“한 마디 답이 없었습니다. 서편을 건넸건만.”
“그러니.”
“되었습니다.”
몽룡이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하자 춘향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따지려고 하는 말이 아니니까죠. 그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러는 것입니다.”
“춘향아.”
“오늘 방자는 제 집에서 재울 것입니다.”
몽룡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도련님을 지금 지키는 것은 방자 하나입니다. 그 방자도 놓치고 싶지 않으시다면 깊이 생각을 하십시오?”
“무슨?”
몽룡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리 되었어도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는 거였다.
“나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냐?”
“하찮게 여긴다.”
춘향은 몽룡의 말을 가만히 따라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가 아닙니다.”
“그럼?”
“도련님 스스로 그러시는 것이지요.”
춘향의 말에 몽룡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부디 스스로를 귀히 여기십시오.”
춘향은 이 말을 남기고 몽룡의 방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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