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구 장. 술이 차면
“어디를 다녀오는 겐가?”
“다녀올 곳이 있었습니다.”
춘향의 대답에 학도는 미간을 모으더니 고개를 흔들고 엷은 미소를 지은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그대가 어린 아이도 아닐 것인데 자꾸만 그대를 압박을 하고 그래서 잘못을 한 것이오.”
“사또.”
“응?”
“몽룡 도련님이 가엽습니다.”
춘향의 말에 학도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어찌?”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대는 정녕.”
“그래서 같이 있고 싶습니다.”
학도는 짧은 한숨을 토해낸 후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자신이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누가 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왜 나에게 묻는가?”
“죄송해서 그렇습니다.”
“무엇이?”
“저를 살려주신 분이 사또니까요.”
“지금 그 말은?”
학도는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자신이 생각한 말을 그대로 하는 것은 너무 비참한 것이었다.
“술을 마시겠는가?”
“예?”
“술을 마시고 싶네.”
“준비하겠습니다.”
“그러게.”
학도가 도포를 휘날리며 돌아서자 춘향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데 향단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향단아.”
“지금 무엇을 하십니까?”
“응?”
“하여간.”
향단은 춘향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무엇이?”
“안색이 안 좋습니다.”
“그래?”
무영의 물음에 학도는 빙긋 웃으며 얼굴을 매만졌다. 딱히 좋을 것도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일이 많고 그러하니 사람의 피부도 이리 변하게 되는 구나. 그렇다고 사내가 뭐 낯까지 관리를 할까?”
“허나 낯이 좋아야 보는 이도 마음이 편안합니다. 지금은 많이 불안하고 또 불안해 보이십니다.”
“그래?”
학도는 씩 웃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이상하구나.”
“그렇습니까?”
무영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 없는데 내가 사또 자리에 있어도 되는 것인지 궁금하구나. 사람들이 과연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믿어줄 것인지. 과연 그것을 믿을 수 있을지 말이다.”
“사또.”
“그래.”
무영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학도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이런 말을 해도 답이 나올 리 없었다.
“너는 나에게만 뭐라고 하겠지.”
“뭐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또 같은 분이 어찌 이리 아파하고 또 힘들어하시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럴 이유가 하나 없을 진데.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예?”
“그런가?”
“그럼요.”
“그래.”
학도는 턱수염을 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춘향이를 품고 싶다.”
“사또.”
“허나 사내로 그럴 수 없어.”
학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그 여인은 관기가 아니다. 내가 그 여인을 소유하고 싶어도. 품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그게 맞는 것입니다. 그게 옳은 일입니다. 이미 그 분을 위해서 그리 하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어찌 이러십니까?”
“그러니 말일세.”
학도는 혀로 입술을 살짝 축인 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추접한 사내가 되지 않기로 다짐을 했다. 춘향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는데 자꾸만 마음이 흔들렸다.
“그 동안 내가 그 사람에게 잘 해주면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네. 그런데 그 사내가 다시 돌아오고 나서 그 사람이 다시 흔들리는 것을 보니. 내가 너무 멍청하고 한심하게만 보이는 것이야.”
“사또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고 있지.”
학도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산을 좋아한다고 해서 산이 반드시 나를 좋아해줄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그래도 씁쓸한 것을.”
“그렇겠지요.”
“아프네.”
“죄송합니다.”
“자네가 왜 미안한가?”
무영의 사과에 학도는 껄껄거리며 손사래를 쳤다.
“이건 다 내가 아둔하고 멍청해서 이러는 것이야. 자네가 그런 식으로 나에게 사과를 할 이유는 없어.”
“사또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또의 편을 들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내가 자네를 벗으로 좋아하는 걸세. 나를 위해서 올곧은 소리만을 해주는 사람이니.”
학도는 먼 하늘을 바라봤다. 답답하고 가슴이 콱 막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무엇이?”
“사또가 아니었으면 지금 아가씨께서는 여기에 없다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사또 덕분에 여즉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고 있는데. 도대체 왜 자꾸 몽룡 도련님에게 가겠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가야 하니까.”
“아가씨.”
“가야 한다.”
향단의 당황스러움과 다르게 춘향은 간절했다.
“도련님이 얼마나 오랜 시간 혼자서 아파했는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으냐? 응?”
“그래서 방자 놈 대가리를 터뜨린 놈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거기로 다시 가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아가씨.”
“어쩔 수 없다.”
향단의 당황스러움과 다르게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밀어내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마음에 품은 사내였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맨 처음 그네에서 나를 본 이후 먼저 연서를 보냈던 그 마음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이냐?”
“사내가 용기도 하나 없이 그것을 방자 놈에게 보냈읍죠. 그런데 지금 무슨 말을 하십니까?”
“향단아.”
“안 됩니다.”
“네가 왜?”
“예?”
“네가 뭔데 그러니?”
춘향의 차가운 말에 향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춘향은 이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고 이마를 짚었다.
“미안해. 미안하다. 미안해. 향단아.”
“아가씨 많이 지쳐섰어요.”
향단은 춘향을 부뚜막에 앉힌 후 맑은 술을 가져왔다.
“드시지요.”
“되었다.”
“술이라는 것이 때로는 기운이 나게도 합니다.”
향단의 말에 춘향은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한숨을 한 번 토해낸 후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달았다.
“맛이 좋구나.”
“제가 담군 걸요.”
“그래? 우리 향단이 기특하구나.”
“그러니 도련님 이야기는.”
“그만.”
춘향은 짧게 고개를 흔들고 남은 술을 모두 마셨다.
“그만 하여라.”
“아까 사또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 얼굴이 얼마나 상처로 가득했던 것인지. 얼마나 아픔으로 가득 담겨 있었던 것인지. 아가씨가 그 얼굴을 몰라서. 보지 못하여서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사또의 기분까지 생각을 할 여유가 있겠느냐?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다 따질 여유는 없어.”
“아가씨.”
“도련님이 가엽다.”
춘향은 아랫입술을 물고 고개를 저었다.
“그 분이 너무 가여워.”
“자기 복을 차신 분입니다.”
“그래도.”
“아가씨.”
“아. 술상. 사또가.”
“예. 그건 제가 준비합니다.”
향단은 혀를 차며 상에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겼다. 춘향은 한숨을 토해내며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사또께 너무 죄송해서 그렇다. 내가 사또와 다른 마음인데 자꾸만 사또의 마음을 받는 것이 죄송해서 그렇다.”
“그러니 사또의 마음을 받아주셔요.”
“아니.”
춘향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에는 여태 몽룡이 크게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아무리 나를 아둔하게 보더라도 어쩔 수 없어.”
“아가씨.”
“내가 가마.”
춘향은 술상을 들고 싱긋 웃었다.
“내가 사또를 위해서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아가씨.”
향단은 그런 춘향을 슬픈 눈으로 쳐다봤다. 학도도 불쌍하고 몽룡도 불쌍했지만, 가장 가여운 것은 춘향이었다.
“어찌 저리 혼자서 모든 것을 다 감당하려고 하십니까?”
향단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고맙소.”
“아닙니다.”
학도의 인사에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 편이 마음이 편했다.
“저기 사또.”
“무영.”
춘향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학도가 무영을 불렀다.
“이리 와서 같이 들게.”
“저는.”
“부탁일세.”
무영은 춘향의 눈치를 살폈다.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무영도 자리에 앉았다.
“도대체 왜 이리 짓궂게 구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랑 저 분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면서.”
“어젯밤에는 나 없이도 그리 잘 놀던 두 사람이 이제 와서 우습구나. 벗이라도 된 것 같던데?”
“벗이지요.”
춘향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렇습니까?”
“벗이 맞소.”
무영도 고개를 끄덕이자 학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술병을 들어 춘향의 잔과 무영의 잔에 가득 따른 후, 자신의 잔에도 가득 따랐다. 그리고 가만히 그 술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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