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일 장. 초록이 피고
“오늘은 좀 괜찮소?”
“예. 괜찮습니다.”
춘향의 걱정 어린 물음에 방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향단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대갈통에 피가 묻어납니다. 꾹꾹 누르면 그러한데 뭐가 그리 괜찮느냐고 자꾸만 물으십니까?”
“너처럼 그렇게 무식하게 쥐어짜면 내 머리통에서만 피가 나는 것이 아니라 마른 논에서도 물이 나오겄다.”
“그럼 좋은 거지?”
“뭐라고?”
“향단아 되었다.”
향단은 어깨를 들썩이며 입을 내밀었다. 춘향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춘향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향단은 밖으로 나가버렸다.
“저런 고얀.”
“그냥 두시게.”
“허나.”
“그대 때문에 안 그렇소?”
“예?”
춘향의 대답에 방자는 멍해져서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그대가 괜찮다고 하는 이야기는 다시 몽룡 도련님 댁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제가 사는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러니 그곳으로 돌아가야지요.”
“그러니 그러는 것이지요.”
“예?”
방자는 여전히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멍해졌다. 춘향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향단이 저 아이가 그대를 많이 좋아합니다.”
“허나.”
“이전부터 그랬는 걸요.”
“이전부터요?”
“예. 그렇습니다.”
춘향의 대답에 방자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조그마한 계집이 벌써 처녀가 된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허나 자신의 두근거림과 같은 것을 어쩌면 향단도 하고 있을지 모른다니 낯설었다.
“단 이것은 비밀입니다.”
“비밀이요?”
“향단이가 알면 속상할 겁니다.”
“속상해요?”
방자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춘향은 미간을 살짝 모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정녕 모르십니까?”
“무엇을.”
“여인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사내에게 고백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사내가 먼저 자신에게 고백을 해주기를 바라지요. 그것이 여인의 자존심을 아주 조금이라도 지킨 거라고 생각을 하니까요.”
“아.”
방자는 멍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춘향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저는 그리고 원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집은 사시기 불편하실 텐데.”
“아니요.”
춘향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살던 집입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 되었는데 오히려 그런 집에 살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그것이야 그렇지만.”
“그냥 아시라고요.”
“예. 알겠습니다.”
방자는 미간을 모았다. 도대체 춘향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채비를 마치시면 같이 가시지요.”
“허나. 그랬다가는.”
“그럼 혼자 가서 설득을 해보시렵니까?”
춘향의 물음에 방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스스로 몽룡을 설득한다는 것. 어렵지만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 하겠소.”
“그럼 그러시죠.”
춘향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었다. 방자는 사람들이 왜 춘향을 좋아하는지 한 순간 그녀의 웃음으로 깨달았다.
“도련님.”
“왜 들어와?”
말은 저리 퉁명스럽게 하더라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느껴지자 방자는 빙긋 웃어보였다.
“제가 오지 않으면 도련님은 어쩌고요?”
“고얀 놈.”
“그리고 책을 얻어왔습니다.”
방자의 말이 끝이 나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다시 또 머리가 터지나 생각을 했는데 몽룡은 그를 보더니 미간을 모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글 배워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게야? 나도 글을 배워 써먹을 일이 하나 없는데 말이다.”
“그냥 제 이름 쓰고 싶습니다.”
“뭐?”
“아비를 몰라 성도 없습니다. 허나 그래도 제 이름 하나는 쓰고 싶습니다. 방자. 방자 놈. 이 이름을 쓰고 싶습니다.”
몽룡은 한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저었다.
“술이 필요하다. 가서 술 좀 얻어 오거라.”
“예?”
“얼른 그 책 두고 술 가져오라고.”
“예. 예.”
방자가 기쁜 얼굴로 나가는 것을 보고 몽룡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 이름이라.”
몽룡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는 도대체.”
“무엇이?”
“도대체 이사를 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향단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향단의 당돌한 대답에 춘향은 싱긋 웃었다.
“왜?”
“왜라뇨?”
“이 집은 나의 집이 아니다. 그리고 너의 집도 아니야. 그저 사또가 우리를 배려해서 있었던 집이다. 우리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면 당연히 우리가 살던 집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니겠니?”
“그건.”
향단은 할 말을 잃었다. 이건 춘향의 말이 옳았다. 애초에 이 집에 있는 것이 우스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집. 그 집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리로 온 것입니다.”
“대충 치웠다.”
“예?”
향단도 모르게 집을 치우다니. 춘향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고 침을 삼킨 후 입을 열었다.
“당당하고 싶다.”
“아가씨.”
“더 이상 사또에게 그렇게 빚을 지고 살 수가 없어. 나도 사람인데. 나 혼자서 뭘 할 수 있다고 보여주어야지.”
“허나.”
“부탁이다.”
춘향의 간절한 목소리에 향단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춘향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이 집에 계속 있는 것은 내가 자유로운 신분이 아니라고. 그리 말을 하는 것 같아서 그렇다.”
“어찌 그리 느끼십니까? 세상 사람 아무도 아가씨에게 그럴 사람이 없는데 어찌 그러시는 겁니까?”
“내가 관기였으니까.”
“아가씨.”
향단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춘향은 그런 향단의 얼굴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내가 멍청한 것을. 그리 느낄 것이 없는데. 자꾸만 내가 그리 느껴지고 그런다.”
“아가씨.”
“네가 가기 싫으면 내가 너는 이곳에 있을 수 있게 사또께 말씀을 드려보마. 아마 능히 그러라고 하실 것이다. 지금도 가끔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네가 한 것을 찾으시는 적도 있으니까.”
“아니요.”
향단은 입을 내밀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사또의 집이 편해서 남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가씨와 같이 있고자 그러는 것이지. 아가씨께서는 무슨 말씀을 또 그리 하시는 겁니까? 서운하게?”
“그래?”
춘향은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향단은 한숨을 토해내고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가씨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나도 이해가 안 가.”
“하오나.”
“그러니까 그만.”
춘향이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말을 하자 향단은 잠시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뭐라고 할 것은 없었다. 춘향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집을 고쳐?”
“예.”
몽룡의 얼굴이 밝아지자 방자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몽룡의 반응이 쉬이 이해가 가지 않는 그였다.
“그런데 왜 그러시는 겁니까?”
“무엇이.”
“그리도 춘향 아가씨를 좋아하시는 분이. 도대체 왜 그렇게 모르는 척을 하고 그러시는 겁니까?”
“모르겠구나.”
“도련님.”
“되었다.”
방자가 다시 채근하자 몽룡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이곳을 떠난 지 피차 오래된 인연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낡은 끈을 잡아당겨 무얼할까?”
“그 끈이 여전히 이어져있다면 꿰고 그러면 되는 것 아닙니까? 도대체 왜 그리 생각을 하시고.”
“건방진 놈.”
몽룡의 눈빛이 곧바로 서늘하게 변하고 방자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몽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네가 나에게 그리 행동을 하면 안 되는 것이야. 내가 아무리 만만해도 그러면 안 돼.”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나 나름대로 이런저런 생각이 있다. 그런데 어찌 네가 나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야?”
“알겠습니다.”
몽룡의 서슬 퍼런 말에 방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공연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또 머리가 터질 수도 있었다.
“하여간 무식한 것들이.”
몽룡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답답했다. 가슴이 뭔가를 콱 누르는 것처럼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제야 왔네.”
춘향은 기둥을 만지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집에 왔어.”
“아가씨!”
“응?”
“이것 보셔요.”
“뭘?”
춘향은 향단의 소리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향단이 들고 있는 그림을 보고 그대로 몸이 굳었다.
“엄니.”
“어찌.”
“엄니가. 엄니가 어찌.”
월매의 초상이었다. 춘향은 그대로 앞으로 다가가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감히 만지지 못했다.
“어떻게 이것을?”
“사또가 해주신 것 같습니다.”
“사또가?”
춘향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너무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밀어내도 늘 그녀의 곁에 있어주는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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