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육 장. 변학도 하나
“정말 가지 않을 것인가?”
“아직은 모르겠네.”
“아직도 모르다니.”
학도의 대답에 길동은 미간을 모은 채 혀를 찼다.
“도대체 왜 그리 미련하게 구는 것이야? 춘향이라는 사람도 결국 자네가 가면 갈 것이 아닌가?”
“그러지 않을 걸세.”
“응?”
“강제로 데리고 가지 않을 거야.”
길동은 입을 쭉 내밀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오랜 시간 여인 하나 곁에 두지 않던 이가 한 여인에 이리 목숨을 걸다니. 그것도 왕의 명까지 거절하면서 이 고을을 지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조정에서 그대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은 그대도 이미 잘 알지 않나?”
“알고 있지.”
“자네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들로 서학쟁이라는 소문은 덮었으나 그 이상은 쉽지 않을 수도 있어.”
“알아.”
길동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저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척 대답하는 학도가 안쓰러웠다.
“도대체 왜 그러는가?”
“무엇이?”
“세상에 여인이라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그대를 밀어내면 다른 이를 보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게 쉽지 않아.”
학도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물끄러미 길동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율도국 일은 잘 되어가나?”
“잘 되어가지.”
“왜는?”
“별 말이 없지. 어차피 자신들이 버린 땅이 아니던가? 본섬에서도 그리 멀리 떨어져있는데 무어라 할까?”
“그렇지.”
학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길동이 새로이 만든 그 왕국. 그곳은 새로운 희망이 있는 곳이었다.
“내 벗들이 셋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조선의 임금이요. 또 하나는 율도국의 왕이요. 무영이 저 사람이 뭘 할지 궁금해.”
“무슨 말씀을 그리.”
무영은 곧바로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농으로 하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누군가가 듣는다면 이상하게 오해를 할까 걱정이 됩니다.”
“두려운가?”
“두렵습니다.”
“그래.”
학도는 턱수염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울 수 있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그것으로 끝이었으니까.
“말을 돌리지 말고.”
길동이 다시 학도를 불렀다.
“그래서 안 간다고?”
“그래.”
“나 참.”
길동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혼 그 사람이 이리 부르면 갈 법도 한 일이었다.
“이혼 그 사람도 지금 얼마나 힘든지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홀로 버티기 힘들어 하고 있어.”
“그렇다고 내가 가서 그 사람에게 큰 힘이 되지는 못할 걸세. 내가 간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것도 없고. 나는 오히려 전하의 또 다른 약점이 될 수도 있어. 자네도 그것을 알지 않는가?”
“약점이라니?”
“내가 여인에게 글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 이미 한양에서는 그를 좋지 않게 보는 것을 아는데 왜 딴청인가?”
“아는가?”
길동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학도는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남은 차를 모두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시게.”
“자네 정말.”
“다시 벚꽃이 피기 전에 남원을 떠나지 않을 걸세.”
“다시 벚꽃?”
길동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막 벚꽃이 지는 참이었다. 그런데 다시 벚꽃이라니. 이 말은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보다 더 잔인한 말일 터였다. 학도를 물끄러미 보며 길동은 입을 쭉 내밀었다.
“자네의 그 귀한 재능을 써야지.”
“남원이 바뀌는 것을 모르는가?”
“알지.”
“아는데?”
“여기만 바뀌어서 쓰겠나?”
“이 근방부터 바꾸어야지.”
학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이 작은 고을부터 지키지 않으면 결국 전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그러기엔 지금 한양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 그렇지. 대국은 우리를 압박하고 왜도 이상하니 말이야.”
“그래도 안 갈 걸세.”
“그래.”
길동은 숨을 크게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도가 이리 말을 하는데 굳이 그가 뭐라 할 수 있을까?
“그럼 나는 돌아가지.”
“미안하네.”
“아닐세.”
길동은 옅은 미소를 지은 후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곧바로 구름이 되어 사라졌다. 학도는 고개를 저었다.
“고마운 사람.”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럼.”
무영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학도는 미소로 답했다.
“전하께서 얼마나 좋은 분인지는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고작 이 정도를 가지고 나를 압박하지 않을 걸세.”
“허나 전하께서 이미 힘들어하시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그럴 테지.”
학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렴풋이 그 역시 알고 있었다.
“힘이 되셔야 할 겁니다.”
“내가 무슨?”
“허나 전하가 무너지신다면 결국 사또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렇지.”
자신과 이혼은 한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다. 함께 배웠고 함께 자랐고 같은 뜻을 하는 이였다. 그런 이가 무너진다면 결국 학도 역시 자신의 뜻을 펼치기 그리 수월하기만 하지는 않을 터였다.
“사또 계십니까?”
춘향의 목소리가 들리자 학도는 곧바로 미간을 모으며 무영을 보더니 이내 장난스럽게 웃었다.
“비밀일세.”
“알겠습니다.”
무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안 가십니까?”
“그래.”
“도련님.”
방자는 몽룡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몽룡은 요지부동이었다. 방자는 미간을 모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찌 이러시는 겁니까? 도련님께서 이러시면 춘향 아가씨가 마음 편하게 떠나실 거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닐 테지.”
몽룡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허나 내가 무엇을 하겠는가? 마냥 그 사람을 보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그 사람을 마구잡이로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없어 나도 너무 힘들어.”
“보내십시오.”
“보냈다.”
“아니요.”
방자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몽룡은 춘향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미련을 갖고 있었다.
“지금 왜 술을 드시는 것입니까? 그것을 다들 모를 거라고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도대체 왜. 왜 그러시는 겁니까?”
“힘들다.”
몽룡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한숨을 토해냈다.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정말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이었다.
“더 이상 나를 설득할 생각은 마. 이미 나는 내 생각을 분명히 했으니. 너나 가려무나. 글을 배워야지.”
“도련님.”
“어서.”
방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몽룡은 방을 나가는 방자를 보며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도련님은?”
“오시지 않으신답니다.”
“안 됩니다.”
춘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향단이 춘향의 손을 잡았다.
“안 됩니다.”
“향단아.”
“절대로 몽룡 도련님께 가시면 안 됩니다. 도대체 거기를 왜 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아가씨 안 됩니다.”
“허나 도련님이 거기에 계신데. 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우스운 일이 아니더냐? 응? 가야지.”
“아가씨.”
“가지 마세요.”
방자도 이리 말을 하자 춘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자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허나 도련님이 아가씨를 어떤 마음을 놓은 것인지. 아가씨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왜 도련님에게 다시 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가지 마세요.”
방자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춘향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답답하고 마음이 아팠다.
“어찌 그래.”
“더 이상 글을 가르치러 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아가씨께서 한양으로 가면 그래도 선생은 하겠지요.”
“이 고을을?”
“예.”
춘향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방자가 이리 말을 한다면 사실이렸다. 춘향은 향단의 손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또께 다녀오마.”
“아가씨.”
“간다고 말을 하마.”
“예?”
그토록 향단이 설득해도 안 되던 것이었다.
“한양으로 간다고. 같이 간다고. 내 그리 말을 하고 오겠다. 그러니 너는 예서 기다리거라. 알았지?”
“예? 예.”
향단은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자는 입을 꾹 다물고 멀어지는 춘향을 응시했다.
“어찌.”
“참말이냐?”
“응?”
향단이 갑자기 자신을 보자 방자는 미간을 모았다.
“무엇이?”
“도련님이 아가씨를 위해 그랬다는 것.”
“당연하지.”
“당연하다.”
향단은 한숨을 토해냈다. 이로 한 장이 넘어가는 것이었다. 허나 춘향의 마음은 더욱 뜨거울 터였다.
“어찌 그 말을 한 것이야. 도련님이 성정이 나빠서. 못되어서. 그렇다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니야?”
“그렇지 않으신데 어찌 그래?”
“허나.”
“되었다.”
방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이건 더 이상 그들이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일이 아니다. 도련님과 아가씨가 알아서 할 일이지.”
방자의 말이 모두 옳아 향단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 말이 옳기에 더욱 답답하고 무겁게만 느껴지는 향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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